제 135장. 십마룡(十魔龍). -03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일단 목표가 확실하잖아. 여기 있는 이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침착함을 되찾은 선우방이 모용척과 정이륭, 서조운, 사마의성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눈빛으로 전해지는 뜻은 분명했다.
그래서 다들 부정하지 않았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네. 추월당하지 않으려면.”
“아니. 넌 좀 더 게을러도 돼.”
“맞습니다, 형님.”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시지요.”
어깨를 으쓱이는 반호진을 향해 선우방과 모용척, 정이륭이 기겁하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언제 따라잡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질 않는데 더욱 노력하겠다고 하자 셋은 빠르게 말렸다.
반대로 서조운과 사마의성은 반호진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동조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회는 무슨. 각자 알아서 열심히 하는 거지. 그나저나 각오는 되어 있어? 십대세가 중 한 곳으로 정마대전에 참전하는 건데.”
“안 그래도 걱정이 많아. 나도 그렇고 아버지와 가문의 어른들도. 상대가 워낙 막강해야지.”
“그래도 싸울 수밖에 없어. 중원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는. 다만 문제는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도 모자랄 판에 결속이 안 된다는 거지만.”
“이제는 좀 정신을 차릴 때도 되었는데 말이지.”
선우방이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경험이 쌓이면 당연히 발전을 해야 하는데 어째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마교의 명맥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겠지. 마교뿐만 아니라 포달랍궁이나 북해빙궁, 구천문도.”
“하긴. 아무리 막기 급급했더라도 후대를 위해서라면 끝장을 보는 게 맞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우리 대에서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고. 멸문이 힘들다면 적어도 백 년 내에 다시 쳐들어오지는 못하게.”
“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선우방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무림 전체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대문파와 명문세가들은 알고 있었다.
반호진이 담현, 개왕, 운상, 남궁호, 당우혁, 팽만철과 함께 중원을 침공했던 곳들을 직접 찾아가 징벌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맞아. 그럴 여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은 해 두어야지. 당하기만, 두들겨 맞기만 하면 호구로 아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전적으로 동의해. 아무리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지만 물리친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었어. 그렇게 흐지부지 넘어갔기에 마교와 새외무림의 침공이 계속 이어진 거니까.”
“그래서 이번 전투가 아주 중요해.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타격을 입혀야 하니까.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하달까. 어중간하게 이기면 과거가 반복될 뿐이야.”
“아는데 쉽지 않아서 그렇지. 압도적으로 이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선우방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문제가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이지만 예상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들 표정이 어두웠다.
“우선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자고. 미리 계획을 짠다고 해서 결과가 꼭 원하는 대로 나오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 그럼 문제는 마교주와 구마겠네.”
“전쟁의 향방을 쥐고 있는 자들이지.”
“천하십대고수 대 마교주와 구마라.”
단순히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 선우방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마교주와 구마라는 이름은 무겁고 두려웠다.
“정확하게는 중원 백도무림 대 신강의 마교지. 그보다 선우세가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어떻게 하기는. 늘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너희와 함께지. 십대세가에 들어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제갈 대협께서도 굳이 손발이 맞춰져 있는데 다른 곳으로 배정할 리도 없을 테고. 설사 배정하려고 해도 우리 쪽에서 거부할 거야. 이제 그 정도 발언권은 있으니까.”
“오.”
자신감을 넘어 패기 가득한 선우방의 모습에 서조운은 물론이고 모용척과 정이륭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보는 모습에 다들 놀란 것이었다.
반면에 반호진은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지켜보기만 했다.
“이번에도 이겨 보자고. 누구도 죽지 말고.”
“그럼. 너를 시작으로 척이와 이륭이, 조운이 장가가는 건 보고 죽어야지.”
“목표가 불손하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이번만은 넘어가 주지.”
“후후후.”
진담을 농담으로 받아치는 반호진의 모습에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다 함께 지내던 때가 떠오른 것이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달라진 게 전혀 없는 모습과 분위기에 모두 비슷한 미소를 머금었다.
***
공동산 곳곳에서 비명 소리와 피가 난무했다.
북쪽을 제외한 동, 서, 남에서 정천맹의 병력이 거세게 달려들었는데 정작 전장의 한복판에 있음에도 모여 있는 열 명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신강에서도 보기 드문 대규모 전투였으나 열 명의 관심을 끌 정도는 아니었다.
규모만 컸을 뿐 진짜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퍼퍼퍼펑!
“시시하군.”
십대마가와 사단 소속 마인들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중원 무인들의 모습에 흑랑마가(黑狼魔家)의 소가주가 조소를 머금었다.
숫자만 많을 뿐 죄다 맹탕이어서였다.
신강의 본산이었다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녀석들이 살기등등하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자 그는 어이가 없었다.
“아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예는 나서지 않았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추뢰마가(追雷魔家)의 소가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작 전초전에 너무 크게 기대하는 것 같아서였다.
어차피 하류무사들은 숫자가 아무리 많아 봤자 의미가 없었다.
승패에 눈곱만큼도 영향을 끼칠 수 없었기에 냉정히 말해 있으나 마나 했다.
“정천맹의 정예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데.”
“적어도 지금 부나방처럼 쓸려나가는 잔챙이들보다는 낫겠지. 천하십대고수라 불리는 이들은 우리가 상대하기에 좀 벅찰 테고.”
“안 벅찰 것 같은데. 죄다 나약해 빠져서.”
“허어.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나름 중원에서 제일 강한 무인 열 명인데.”
“그래 봤자 중원에서지.”
흑랑마가의 소가주가 코웃음 쳤다.
중원에서 손꼽히는 고수라고 해도 신강에서는 다를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원에서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신강무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도 그건 인정해. 본교의 무공은 중원의 무공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근데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거지. 안 그래?”
원래부터 고집불통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더욱 심한 흑랑마가의 소가주를 일별하며 추뢰마가의 소가주가 주변에 동의를 구했다.
자부심은 당연히 가져야 하지만 그게 자만으로 번져서는 안 되었다.
방심으로 죽는 것만큼 치욕적인 최후도 없었기에 그는 그 부분을 에둘러 짚었다.
“맞는 말이야.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다치는 경우도 있으니까. 만약 그러면 얼마나 쪽팔리겠어?”
“그렇지. 그보다 더 굴욕적인 것도 없겠지.”
열 명 중 유일한 여성이자 음천마가(陰天魔家)의 소가주인 여을영의 맞장구에 추뢰마가의 소가주가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여을영이 동조함으로써 최소한 그의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패배자의 말은 변명일 뿐이지. 결국 중요한 건 결과다. 만만하게 보더라도 이기면 되는 법.”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동조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반론을 펼치는 이도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묵성마가(默聲魔家)의 소가주가 훅 치고 들어왔음에도 추뢰마가의 소가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뜻에 동의할 거라 크게 기대하지 않아서였다.
“검신은 보이지 않는군.”
“소림검신을 말하는 건가?”
“그럼 누굴 말하겠어?”
지금껏 말이 없던 수혈마가(獸血魔家)의 소가주 효욱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거구에 털도 많아서 멀리서 보면 곰처럼 보였는데 그는 그걸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게다가 실제로 곰을 수족처럼 다루기도 했다.
그르릉.
효욱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세상 귀찮은 기색으로 땅바닥에 엎드려서 두 눈을 감고 있던 흑곰이 으르렁거렸다.
어느새 두 눈을 번쩍 뜨고서 말이다.
그런데 덩치가 보통의 흑곰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도 궁금하기는 해. 대단하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으니까. 근데 너나 나나 버겁지 않겠어? 약관의 나이에 중원제일인, 중원제일검의 자리에 올랐는데?”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이다.”
효육이 퉁방울만 한 두 눈을 부라리며 추뢰마가의 소가주인 추양극을 노려봤다.
실력에 격차가 있는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 차이가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만들어진 영웅일 수도 있었고.
일부러 영웅을 만드는 경우가 아예 없지만은 않았다.
“효욱.”
“왜?”
“소림검신은 내 것이다.”
“…….”
그때 진혈마가(眞血魔家)의 소가주인 야율천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언감생심 꿈꾸지도 말라는 듯이 말이다.
한데 그 말에 온몸으로 사나운 기세를 풍기던 효욱이 입을 다물었다.
흉포한 성정의 그가 찍소리도 못 했으나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발언은 선을 좀 넘은 것 같은데.”
“섭율.”
“나 역시 소림검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말이야.”
효욱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찌그러져 있는 사이 화려한 적의장포를 걸친 사내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바로 신성마가(神晟魔家)의 소가주인 섭율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마교주의 아들이자 차기 소교주로 유력한 야율천에게 대들지 못했으나 그는 달랐다.
진혈마가와 쌍벽을 이루는 신성마가의 후계자였기에 야율천의 매서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입을 열었다.
“소림검신은 내가 상대할 것이다.”
“네가 주장한다고 해서 내가 따를 이유는 없는데. 그리고 소림검신의 생각도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끝까지 가자는 건가?”
“나도 관심이 있거든. 게다가 넌 아직 소교주가 아니다. 또한 소교주가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교주가 되는 것도 아니고.”
키이이잉!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기세가 충돌하자 주위에 돌풍이 불었다.
그러나 거칠게 날뛰는 바람에도 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노려봤다.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야겠군.”
“둘 다 그만하지. 여기가 어디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매번 부딪치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장소가 나빴다.
이곳이야 여유가 있다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기에 추양극이 두 사람을 말렸다.
하지만 둘의 기운이 충돌하는 사이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추양극도 어디 가서 꿀리는 실력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은 말 그대로 격이 달랐기에 조금 떨어져서 말렸다.
“두 사람 다 잊은 거 같은데, 이곳에 우리만 있는 거 아냐. 교주님과 가주님들이 계셔.”
추양극의 말에는 일절 반응하지 않았던 야율천과 섭율이 여을영의 한마디에 빠르게 기세를 갈무리했다.
그녀의 짧은 일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허참.”
“정 소림검신을 상대하고 싶으면, 먼저 차지하면 되잖아? 그게 우리의 방식 아니었나?”
“맞지.”
“흥.”
여을영의 한마디에 깔끔하게 정리되는 모습에 추양극이 헛웃음을 흘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다들 은밀히 눈을 반짝였다.
소림검신과 맞붙고 싶은 건 섭율과 야율천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스슥!
그래서 다들 눈이 벌게지도록 정천맹의 진영을 살폈다.
가장 먼저 반호진을 찾기 위해서였다.
대면한 적은 없지만 용모파기로 인해 얼굴을 알았기에 다들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났다.
“가라!”
크아아앙!
다들 안력을 집중하고 있었으나 워낙에 전장이 넓었기에 반호진만 콕 짚어 찾는 건 어려웠다.
그렇다고 반호진의 성향이 돌격대장처럼 최전방에 서서 싸우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그때 효육의 일갈과 함께 수혈마가의 맹수들이 어느 한 곳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효욱의 지시에 수혈마가의 마인들이 맹수들을 조종해 길을 뚫기 시작한 것이다.
파아앗!
동시에 효욱 역시 신형을 날렸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갔는데 그런 그의 앞으로 미청년이 길목을 막아섰다.
“어딜 가려고.”
“비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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