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417화 (417/468)

제 135장. 십마룡(十魔龍). -01

유호량은 새삼 느꼈다.

자신이 비주류에서 주류로 들어왔음을 말이다.

흔하디흔한, 그저 그런 무인에서 이제는 무상문의 호법이 되었다.

그것도 유일한 호법 말이다.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떠돌아다니는 일개 무인일 뿐이었는데.’

낭인들 중에서는 절정고수가 희귀하다고 하나 그건 낭인들의 세계에서만이었다.

백도무림, 중원을 놓고 보면 흔한 게 절정고수였다.

당장 이곳만 하더라도 절정고수가 아닌 이들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그랬던 자신이 이제는 갓 절정에 닿았던 수준을 넘어 최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것도 중엽이 아니라 말엽의 경지에 말이다.

이 모든 게 반호진의 은총이었기에 유호량은 다시 한번 그 점을 상기하며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호진을 위하겠다고 말이다.

‘그나저나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놀랍고 신기한 감정은 얼마 안 가서 사라졌다.

반호진을 중심으로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유호량 역시 느낀 것이었다.

회의는 제갈문곡과 구파일방, 오대세가를 중심으로 흘러갔지만 묘하게 다들 반호진을 의식하는 게 보였다.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이 회의장에 모두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견제당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좀 찝찝한데.’

유호량의 시선이 몇몇 이들에게 향했다.

듣기로 예전에는 반호진의 나이 때문에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고 했다.

어린 나이로 인해 선입견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고.

실력이 나이에 가려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반호진의 실력을 의심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문주님이 다 해결해 줄 것처럼 보고 있으니.’

유호량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느낌이 그랬다.

그래서인지 유호량은 말하는 걸 들으면 들을수록 눈살이 찌푸려졌다.

“잠시 쉬었다가 하죠.”

그걸 제갈문곡 역시 느낀 모양인지 휴식을 제안했다.

이대로는 무한 반복일 것 같았기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이어지는 회의에 지친 건 매한가지였기에 제갈문곡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나가자. 짐 풀어야지.”

나가는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출입구에 병목현상이 일어나자 여유롭게 앉아서 기다리던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아서였다.

한데 반호진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의존하는 걸 느꼈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리 대수로워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형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근데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너희뿐만 아니라 사부님도 알고 계시니까. 이제는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

서조운을 필두로 모두가 장탄식을 흘렸다.

무슨 의미인지 다들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또 달리 생각하면 기회이기도 하고.”

“기회요?”

“응.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서.”

반호진의 말에 사마의성이 눈을 반짝였다.

이해하지 못한 서조운과 달리 그녀는 대번에 알아들은 것이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마교까지 끝장내면 더 이상 없으니까요. 있을 수도 있지만 마교만 한 곳은 없을 것 같아요.”

“맞아. 그러니 나도 좀 편히 쉴 수 있겠지. 그때는 진짜로.”

세인들은 중원의 평화를 위해 반호진이 밤낮없이 싸우고 희생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전쟁이 더 커지기 전에, 혹은 장기전이 될까 봐 미연에 방지한 것뿐이었다.

정확하게는 개인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서.

물론 무림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마교를 물리쳐야겠네요. 아니면 물러나게 만들든가.”

“문제는 어느 쪽이든 우리가 이겨야 한다는 거지만.”

처음 마교의 침공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원망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원망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기에 반호진은 생각을 바꿨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원하는 걸 쟁취하기로.

“최선을 다할게요, 오빠.”

“우리만 노력해서는 안 돼.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해. 마교는 그런 적이니까.”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문주님.”

반호진을 따라 밖으로 나오던 유호량이 사마의성에 이어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반호진과 함께 싸우는 것이니만큼 그는 각오가 남달랐다.

“수뇌부 회의에 처음 참석해 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한편으로는 실망도 많이 했고요. 사람은 결국 다 똑같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실망스럽지만 이해해야 합니다.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양보하고 포용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요.”

“명심하겠습니다.”

“초반에는 많이 신나 하시던데요.”

유호량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추고 싶은 비밀을 들킨 듯한 민망함에 유호량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저도 그런 때가 있었습죠.”

“조운이도 그땐 어렸는데.”

“이륭 형도 어렸습죠.”

“하하하.”

유호량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놀리는 게 아님을 알지만 서조운과 정이륭의 대화를 듣자 민망함이 배가 되었다.

“우리 모두 어렸었지. 그리고 무인에게 있어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인데.”

“그러고 보니 형님께서는 내로라하는 무인들을 만났을 때도 딱히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으셨죠.”

“놀랄 이유가 없었으니까.”

“역시 어마어마한 자신감!”

서조운이 두 눈을 반짝거렸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존경심이 절로 일어나는 반호진의 모습을 보며 서조운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반호진처럼 되겠다고 말이다.

“어마어마하기는. 그냥 내 생각일 뿐인데.”

“다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놀라지 않은 거잖아요.”

“글쎄. 그보다 서가장주님께 안 찾아가도 돼? 기다리고 계실 텐데.”

“아, 지금 다녀오겠습니다!”

깜빡했다는 듯이 서조운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반호진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이내 근처에 있던 개방도에게 안내를 부탁하며 사라졌다.

“우리도 가자.”

“예.”

순식간에 멀어지는 서조운을 잠시 지켜보던 반호진이 몸을 돌렸다.

배정받은 숙영지로 향하는 것이었다.

모용세가의 가주가 사용하는 천막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검소해 보이는 천막 안에서 모용궁이 안절부절못하며 이리 왔다, 저리 갔다를 반복했다.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함께 있던 모용척이 혀를 찼다.

“왜 그렇게 긴장하세요? 형님을 처음 뵙는 것도 아닌데.”

“너 같으면 긴장이 안 되겠느냐? 평범한 자리가 아닌데.”

“딱히 긴장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거야 네가 희수를 딱히 신경 쓰지 않으니까.”

“무슨 소리세요. 무상문에서 희수를 가장 많이 챙긴 게 저인데요.”

모용척이 얼굴 가득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남매처럼 살갑게 지내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빠로서 도리는 다한 그였다.

그런데 여동생을 방치했다는 듯이 말하자 모용척은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정말?”

“예. 티 나지 않게 제가 얼마나 챙겼는데요. 그리고 무상문에서 희수가 의지할 사람이 저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무상문주님이 계시지 않더냐.”

“장남보다 형님을 더 믿으시는 겁니까?”

모용척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리 반호진을 신뢰한다지만 자신은 혈육이었다.

심지어 하나뿐인 아들이자 가문을 이을 장손인데 자신보다 반호진을 더 믿는다고 하자 모용척은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듯이 모용궁을 쏘아봤다.

“희수에 한해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더냐? 게다가 네가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도 있고.”

“언제까지 과거의 일을 거론하실 겁니까?”

“말하는 게 되게 오래된 일인 것처럼 말한다?”

“오래된 일이죠. 벌써 몇 년 전인데요.”

“겨우 몇 년 전일 뿐이지.”

모용궁이 헛웃음을 흘렸다.

말이 몇 년이지 실제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용궁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걸고넘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럴 만하니까. 네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너 자신이 가장 잘 알겠지.”

“끄응!”

반박할 거리가 전혀 없었기에 모용척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나름 모용궁을 생각해서 긴장을 풀어 주려고 했는데 그 대가가 타박으로 돌아오자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는 뜻을 온몸으로 발산했다.

“가주님. 무상문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거라.”

“예!”

그때 인기척과 함께 출입구를 지키던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호진이 도착한 것이었다.

천막이 걷히는 소리를 들으며 모용궁은 심호흡을 했다.

못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최대한 긴장한 티를 털어 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모용가주님. 회의장에서 뵈었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허허허. 무상문주님께서 와 주시면 저야 영광이지요. 앉으시죠.”

“그 전에 가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는 말씀을 편하게 해 주시지요.”

“어…….”

모용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것이었다.

“아버지.”

점점 길어지는 말꼬리에 모용척이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다가는 대화가 완전히 단절될 것 같아서였다.

“아, 고맙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져서.”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을 들어서 말이지요. 아니, 말이네. 이것 참 말을 놓기가 쉽지 않구먼.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지금은 이게 한계인 것 같네. 말은 차차 놓는 것으로 하게나.”

“알겠습니다.”

“우선 앉지.”

반호진은 독촉하지 않았다.

모용궁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해서였다.

더해서 그의 성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기도 했고.

그렇기에 반호진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저는 나가 있을까요?”

왠지 모르게 무겁고 서먹서먹한 분위기에 모용척이 조심스레 물었다.

원래의 목적은 두 사람의 가교가 되어 주기 위해서였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난 상관없으니 너 편한 대로 하거라.”

“저도 괜찮습니다.”

모용척이 빠르게 둘의 표정을 살폈다.

말과 속내가 간혹 다르다는 걸 알기에 그걸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간절한 부친의 눈동자가 시야에 잡혔다.

“어, 그럼 얌전히 앉아 있겠습니다. 잔심부름도 하면서요.”

“그래라.”

아들과 비슷한 나이이지만 모용궁은 반호진이 어려웠다.

그리고 그건 모든 무인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반호진은 일개 후기지수가 아니라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든든한 것도 사실이었다.

“차를 따라 드리겠습니다.”

흐뭇한 얼굴로 아들과 반호진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모용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호를 들었다.

본인이 말한 대로 잡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윽고 반호진과 모용궁의 찻잔에 그윽한 향기를 가진 차가 채워졌다.

“가주님께서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제가 온 건 희수 때문입니다.”

“그럴 거라 예상하기는 했네.”

“희수와의 교제를 허락받고 싶습니다.”

“허허허허.”

더없이 공손한 반호진의 모습에 모용궁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어서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그에게 직접 막내딸과의 교제를 허락받으러 왔기에 모용궁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되고 짜릿했다.

어떻게 보면 남궁세가, 제갈세가, 하북팽가를 제치고 모용세가가 반호진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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