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4장. 공동산으로. -02
당우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초반에는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주로 당했지만 본격적인 전투에서는 아미파와 청성파의 제자들이 많이 죽었다.
흑풍단의 가세에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은 것이었다.
“역시 마교는 마교군요.”
“대단하다, 대단하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겪어 보니 알겠더구먼. 완전 지독해. 여기서 철마단과 흑풍단을 만날 거라 예상하지도 못했고.”
당우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마교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나 자신은 천하십대고수의 한 명이었고 사천당가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아미파, 청성파와 함께 이동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격돌로 그 자신감은 산산조각 났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무상문주 덕분에 살았네. 만약 무상문주와 상 문주님이 와 주시지 않았다면…….”
슬픔과 분노가 공존하는 얼굴로 죽은 제자들의 눈을 하나하나 감겨 주는 연정과 청성파 장문인을 지켜보며 당우혁이 말끝을 흐렸다.
만약 반호진과 상일기가 제때 와 주지 않았다면 도망치는 쪽은 사천당가와 아미파, 청성파였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철마단주와 흑풍단주의 무경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어쩌면 여기에서 죽었을 수도.’
상상만 해도 당우혁은 아찔했다.
아무리 그가 절대고수라고 해도 죽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강한 무인을 만난다면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두 분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제자들의 시신과 부상자들을 수습한 연정과 청성파의 장문인이 다가왔다.
둘 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두 사람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싸움은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에 둘 모두 슬픔은 일단 묻어 두려는 기색이었다.
그게 맞는 것이기도 했고.
“아닙니다. 전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다니요. 저희는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반호진을 비롯해서 상일기와 일행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하며 고마움을 표했던 청성파 장문인이 고개를 저었다.
결코 사과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장 그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철마단과 마주치리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반호진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늦지 않게 도착한 것만으로도 그는 천지신명께 감사했다.
“근데 걱정이네요. 저희도 공격받았으니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텐데.”
“으음!”
연정의 중얼거림에 당우혁이 침음을 흘렸다.
무려 사천당가와 아미파, 청성파가 함께 움직였는데도 이빨을 들이밀며 공격한 게 철마단이었다.
그런 성향으로 보았을 때 합류하러 오는 다른 곳들을 공격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청성파의 장문인 역시 당우혁과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 부분은 아무래도 개방에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마주쳤다면 늦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대비가 가능하니까요.”
“바로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중원 전역이라면 불가능하지만 감숙성에 한해서라면 반나절이면 모든 곳에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개방도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허리 숙여 인사한 후 곧장 움직였다.
감숙성으로 집결하고 있는 모든 문파에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도 천천히 움직입시다. 철마단과 흑풍단이 다른 사단과 합류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당장 합류할 수 없기에 아까 전처럼 꽁지 빠지게 도망친 걸 수도 있으니.”
청성파의 장문인이나 연정은 추격할 겨를이 없었으나 당우혁과 반호진, 상일기는 가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 사람이 추격하지 않은 건 흑풍단처럼 다른 사단이 합류할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반호진의 무위가 압도적이라지만 초월경 고수 넷에 사단 전부라면 위험했다.
정확하게는 당우혁 본인이.
“불안하시면 이곳에서 대기해 소림과 합류한 후 움직이는 방법도 있습니다.”
“소림사가 근처에 있습니까?”
“예. 어제 받은 연락에 의하면 하루에서 반나절 정도의 거리입니다.”
청성파 장문인이 반색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으나 그렇다고 무의미한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다시 싸우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소림사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자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 그럼 합류해서 함께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철마단주와 흑풍단주를 잡을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둘을 잡자고 제자들을 희생하고 싶지는 않아요.”
연정이 청성파 장문인의 말에 동조했다.
아미파 역시 청성파 못지않게 피해를 입었기에 그녀도 서두르기보다는 소림사와 함께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이왕 기다리는 김에 정리도 제대로 하고요.”
반호진의 시선이 한 구씩 정리되고 있는 시신들로 향했다.
그러자 상일기를 비롯해서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의 얼굴에도 안쓰러움이 떠올랐다.
끼이익.
대회의실로 사용하던 곳을 개조해 거대한 대전으로 만든 곳에 철마단주가 흑풍단주와 함께 들어갔다.
일개 수신호위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의 기도를 흩뿌리는 문지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붉은빛 융단이 두 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화려하게 쫙 펼쳐진 두꺼운 융단이 철마단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두려움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꿀꺽!
그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흑풍단주 역시 마찬가지인 듯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한데 정작 흑풍단주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뭐 하느냐. 들어오지 않고.”
“죄, 죄송합니다!”
바짝 긴장한 흑풍단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철마단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선은 바닥에 둔 채로 말이다.
이윽고 철마단주는 내리깐 시선에 태사의가 닿자 천천히 오체투지를 했다.
“만마(萬魔)의 지존께 인사 올립니다!”
“만마(萬魔)의 지존께 인사 올립니다!”
마치 사전에 짜기라도 한 듯이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것도 대전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말이다.
“일어서라.”
“존명!”
나지막하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교주의 목소리에 철마단주는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절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종이 섬기는 주인을 마주 보는 건 무엄한 짓이었기에 철마단주는 교주의 발까지만 시선을 올렸다.
“소림검신을 만났다고?”
“예.”
“어떻더냐?”
“강했습니다.”
철마단주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어려운 대답이 아니었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왼팔은 검신에게 당한 상처더냐?”
“예.”
“소문대로 대단하긴 한 모양이야. 천하의 철마단주의 왼팔을 단숨에 잘라 낸 걸 보면.”
교주가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자세한 설명을 듣지는 못했으나 그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철마단주가 어떻게 당했는지 말이다.
“예상보다 강했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호오. 잘 모르겠다?”
“예. 제가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주인 앞에서 거짓을 논할 수는 없기에 철마단주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몇몇에게는 거슬렸던 모양인지 곳곳에서 진득한 살기가 날아왔다.
“철마단주가 가늠하기 힘든 수준이라. 하긴. 그래도 명색이 중원제일인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안 그럼 실망이지. 너무 쉽게 정복하면 재미가 없잖아? 안 그래?”
“그렇습니다.”
“최연소 중원제일인이라. 정말 기대가 되는군.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말이야.”
권태로움이 가득했던 교주의 두 눈에 짙은 호기심이 서렸다.
원래도 기대했지만 철마단주의 말을 들으니 더욱더 기대가 되었다.
“소림검신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지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옵니다!”
모든 관심이 철마단주에게 향하자 흑풍단주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신 역시 같은 전장에 있었던 만큼 한마디 정도는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제대로 붙어 보지는 않았으나 그가 보기에 반호진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교주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당연한 얘기를 하는구나.”
“헙!”
“철마단주야 중원제일인을 상대했기에 나름 정상참작이 되지만 흑풍단주는 실망이야. 법왕이나 검왕도 아니고 고작해야 명왕을 상대로 왼손을 잃다니.”
“소, 송구하옵니다!”
쿠웅!
싸늘한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느낀 흑풍단주가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그 수준을 넘어 이마를 대전 바닥에 강하게 찍었다.
단순히 사과하는 걸 넘어 행동으로 사죄했으나 교주의 눈빛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더 서늘한 표정으로 흑풍단주를 내려다봤다.
“그러니 다음번에 명왕을 만나면 증명해야 할 거야. 본교의 흑풍단주가 어떤 존재인지. 더불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말이야.”
“반드시 증명하겠습니다!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증명하지 못하는 자는 본교에 필요가 없으니까.”
꿀꺽!
무심하기에 더욱 섬뜩한 교주의 목소리에 흑풍단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동시에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나가 봐. 철마단주도 마찬가지고.”
“존명.”
교주의 명령에 철마단주는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흑풍단주가 불쌍할 법도 하건만 그는 일절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왔던 길을 되돌아 문을 향해 걸어갔다.
정상참작이 되었다고 하나 철마단주 역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만약 상대가 흑풍단주와 반대였다면 그가 흑풍단주 꼴이 되었을 터였다.
‘……왜 의문이 드는 걸까.’
오늘따라 더욱더 길게 느껴지는 길을 걸으며 철마단주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였다.
‘말도 안 되는 의문이다. 당연히 주군께서 승리할 수밖에 없어. 근데 왜 자꾸 의문이 드는 걸까.’
철마단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의 의문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반호진이 나이를 초월한 천재이자 중원무림을 대표하는 절대고수라고 하나 상대는 신강의 지배자이며 신교의 주인이었다.
당연히 교주가 이길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한 가닥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교주님과 비슷한 연배라면 모를까 지금은 불가능해.’
철마단주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머릿속의 상념을 털어 냈다.
쿠웅.
한편 철마단주와 흑풍단주를 내보낸 교주는 문이 닫히자 창밖을 응시했다.
건물 내부는 대부분 본래 사용하던 모습으로 바꾸었으나 밖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자연과 지형은 인간이 바꾸고 싶다고 해서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했고.
또 이국적인 풍경을 그도 싫어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비옥해.”
푸르름이 가득한 창밖의 풍경을 보며 교주가 중얼거렸다.
척박한 신강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라서였다.
황폐함과는 거리가 먼 공동산의 모습에 교주는 탐이 났다.
이 비옥하고 아름다운 대지가.
“그러니 가져야겠어. 이런 땅은 나에게 어울리니까.”
교주는 고향인 신강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하는 편이었다.
단지 그는 신강도 가지고 중원도 가지고 싶을 뿐이었다.
과거 신교의 교주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짓밟는 재미도 있고.”
교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과거 교주가 되기 전에는 매일매일이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게 싫지 않았다.
치고받는 재미가 있어 즐거웠다.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재미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중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역대 최고의 천재가 재능을 만개했다는 소식도 들었고.
“얼른 오라고. 기다리다 지치기 전에.”
웃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교주가 중얼거렸다.
남쪽을 지그시 응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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