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3장. 첫 교전. -03
최대한 티를 내려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천하의 당우혁도 숨길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새로운 적의 등장은 그조차도 암담하게 만들었다.
정확히 어떤 부대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풍기는 기세로 보건대 최소 철마단과 비슷한 전력이었다.
규모도 비슷했기에 연정과 청성파 장문인도 마른침을 삼키는데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그리고 그건 철마단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우혁의 지근거리에 있었기에 그도 낯선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자 고개를 돌렸는데 보는 순간 철마단주의 동공에 경련이 일어났다.
이곳에서 만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 다가오고 있어서였다.
“검신……!”
“마교도에게 검신이라 불리니까 느낌이 조금 묘한데.”
“그만큼 형님의 위명이 마교에도 자자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놀라기보다는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반호진의 말을 서조운이 받았다.
그러더니 아부하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두 손을 비비지는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연상이 된다고나 할까.
“위명보다는 악명이겠지.”
“악명도 명성이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근데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네. 단일 세력이라서 그런가. 마도련하고는 기강 자체가 다르네.”
“마도련은 연합이었으니까요.”
자신을 주시하는 철마단주의 시선에도 반호진은 태연했다.
당우혁 못지않은 고수였으나 반호진의 눈에는 그저 마교주 직속 부대인 사단(四團) 중 한 곳인 철마단의 단주일 뿐이었다.
스윽.
호승심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않고 발산하는 철마단주를 일별한 반호진은 처참하게 죽어 있는 사천당가의 무인들을 살펴봤다.
대부분이 머리나 목, 심장 부근에 손도끼가 박힌 채로 죽어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반호진은 단박에 철마단의 노림수를 파악했다.
독의 무서움을 알기에 가장 먼저 사천당가를 공격한 것이었다.
그것도 독보다 빠르게 손도끼를 날려서.
‘일종의 속도전인가. 머리를 잘 썼어. 상성도 유리했고.’
반호진의 시선이 철마단원들에게로 향했다.
가장 먼저 흑빛을 띠는 마갑(馬甲)과 양쪽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각종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로 하나의 무기만 사용하는 무인들과 달리 철마단원들은 참마도와 단창, 손도끼, 단검 등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지원군을 믿는 건가?”
“혹 지원군을 기다리는 건가?”
철마단주가 반호진의 말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절대 지원군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딱 선을 그은 것이었다.
“글쎄. 그쪽은 몰라도 난 지원군이 필요하지 않아서.”
“필요 없다고?”
애마 위에 올라타 있는 철마단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반호진의 주위에는 고작해야 열 명 남짓한 인원만 있을 뿐이었다.
좋게 말해 소수정예이지 반호진을 빼면 딱히 위협적인 인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유로운 반호진의 태도에 철마단주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고작 오백 명 정도야. 아, 저 부대가 합류하면 천 명이 되겠군.”
“마교의 사단 중 한 곳인 흑풍단(黑風團)입니다, 문주님.”
길 안내를 위해 오중건이 특별히 보내 준 개방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검은색 피풍의만 봐도 달려오는 이들이 어떤 부대인지 알 수 있어서였다.
“고작 천 명이라.”
흑풍단이라는 설명을 들었음에도 표정 변화가 전혀 없는 반호진의 모습에 철마단주는 물론이고 두 명의 부단주들도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반호진의 위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상대가 일개 마교도도 아니고 교주의 직속 무력 부대인 사단 중 두 곳이었다.
그럼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지껄이자 부단주들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인정하기 싫다면 증명하든가.”
“그래야겠지. 무인은 무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법이니까.”
츠츠츠츠!
철마단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철마단의 진영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솟구쳤다.
모두의 살기가 하나로 합쳐져 반호진에게 집중된 것이었다.
유형화되지는 않았으나 거의 근접하게 느껴지는 거대한 살기에 반호진의 주위에 있던 서조운과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특히 무경이 가장 떨어지는 사마의성의 표정이 가장 딱딱했다.
“맞는 말이야. 무인은 무로 증명해야지.”
찌이익!
철마단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지금 반호진 일행을 짓누르는 기세는 그뿐만 아니라 철마단원들 모두의 기세가 합쳐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세를 반호진은 손짓도 아니고 무형지기로 가볍게 찢어발겼다.
이 정도쯤은 의지만으로 갈라 버릴 수 있다는 듯이 너무나 손쉽게 찢어 버리는 모습에 철마단주와 부단주, 단원들 모두 동공이 커졌다.
“검신은 내 것이다!”
그사이 흑풍단이 도착했다.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철마단의 모습에 흑풍단주는 혀를 차며 달려들었다.
반호진이 흑풍단을 본 것처럼 흑풍단주 역시 반호진을 알아봤기에 경신술을 극성으로 펼치며 쇄도했다.
같은 사단 소속이지만 엄연히 경쟁하는 관계였기에 흑풍단주는 철마단주에게 반호진을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욕심이 과하구나.”
그러나 흑풍단주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반호진에게 향하는 길목을 막은 하나의 인영 때문이었다.
쩌어어엉!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인영은 단순히 길목만 차단하지 않았다.
강력한 일격으로 흑풍단주의 돌진을 막았다.
“크흡!”
같은 사단의 단주였기에 흑풍단주의 무위는 철마단주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철마를 타지 않은 상태라면 흑풍단주의 승산이 더 높았다.
한데 그런 흑풍단주의 질주가 저지당하자 당사자는 물론이고 철마단주와 흑풍단원들도 놀랐다.
아무리 급습이라지만 흑풍단주가 뒷걸음질 친 게 믿기지가 않은 것이었다.
“무상문주님께 가기에는 아직 일러.”
“……명왕.”
강제로 멈추게 된 흑풍단주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그를 막아 세운 게 상일기라는 걸 알자 살기를 번뜩였다.
하지만 흑풍단주의 강렬한 살기에도 상일기의 표정은 담담했다.
분명 흑풍단주는 강했으나 상일기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 공격해라!”
“전부 죽여 버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모조리 쓸어버려라!”
상관인 흑풍단주와 상일기의 대치에 부단주들이 대신해서 지시를 내렸다.
흑풍단주가 상일기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눈치껏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우리가 먼저다!”
“전군! 돌격!”
그 소리에 철마단의 부단주들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만히 있다가는 먼저 도착하고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수도 있기에 서둘러 움직였다.
그러나 움직이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독이 바짝 오른 사천당가와 청성파, 아미파의 제자들 역시 전의를 불태우며 흑풍단과 철마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퍼퍼펑! 꽈앙!
폭음과 굉음, 신음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더불어 짙은 혈향이 전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충돌하자마자 수많은 이가 죽거나 다친 것이었다.
근데 놀랍게도 아수라장 한복판에 조용한 곳이 있었다.
휘이잉.
바로 반호진이 서 있는 곳이었다.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는 다른 곳들과 달리 반호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건 철마단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둘의 표정은 극명하게 달랐다.
‘으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철마단주와 달리 반호진의 표정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그 모습에 철마단주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배짱 역시 상당하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였다.
‘젊을 뿐만 아니라 경험도 많다는 건가.’
반호진의 여유는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그걸 철마단주는 알아볼 수 있었다.
어쭙잖은 허세도 못 알아볼 정도로 그의 연륜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쿠아아앙! 꽈과광!
철마단주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전황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상황이 그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흑풍단의 가세로 수적 열세가 뒤집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밀리는 건 그들이었다.
“크으윽!”
특히 호기롭게 나섰던 흑풍단주는 상일기에게 속절없이 밀리는 중이었다.
천하십대고수가 뭐 그리 대수냐고 떠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연신 뒷걸음질만 쳤다.
그 정도로 상일기의 무위는 대단했다.
신강의 검은 바람이라 불리는 흑풍단주가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커억!”
“끄으윽!”
거기에 독왕 당우혁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철마단에게 제대로 앙갚음을 하겠다는 듯이 당우혁은 오직 철마단만 집요하게 노렸다.
더 놀라운 점은 독은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순수하게 체내에서 발현되는 독강만으로 당우혁은 철마와 인간을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짓뭉개 버렸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점은 저 녀석들이다.’
철마단주의 시선이 네 명의 후기지수들에게로 향했다.
냉정히 말해 반호진 일행은 지원군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소수였다.
반호진과 상일기가 일당백의 전력이기에 지원군이라 할 수 있는 거지 그 둘을 제외하면 묏자리를 제 발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데 그 생각에 균열이 일어났다.
퍼퍼퍼펑!
얼굴을 보면 네 명은 분명 후기지수였다.
그러나 실력과 노련함은 결코 후기지수라고 하기 힘들었다.
서조운, 정이륭, 모용척의 실력은 최절정을 넘어 초절정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사마의성의 존재감 역시 세 사람과 비교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다.
즉 넷 다 또래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을 보여 주고 있었다.
‘중원무림의 수준이 이 정도일 리가 없는데.’
철마단주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놀란 기색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로 지금 네 명이 보여 주는 경지는 마교가 자랑하는 후기지수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꾸욱!
그 사실이 철마단주는 믿기지 않았다.
그가 아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에 철마단주는 자기도 모르게 언월도를 쥐고 있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좀 전의 자신감은 어디 간 거야? 천 명이나 된다고 거드름을 피우던 사람 말이야.”
“……초반의 우세일 뿐이다. 결국 이기는 건 우리다.”
“확실히 전체적인 수준이 대단하기는 해. 일개 단원이 절정고수라니. 괜히 단일 세력 중 최강이라 불리는 게 아닌 것 같아. 근데 당가주님을 막기에는 버거워 보이는데.”
반호진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들먹거리거나 비아냥거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말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철마단주는 이상하게 소름 돋았다.
“언제까지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본인이 잘 알고 있을 텐데. 토끼가 아무리 많아도 호랑이를 잡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늑대나 승냥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리고 아미와 청성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
철마단주의 입이 다물어졌다.
어느 하나 틀린 말이 없어서였다.
아직까지는 지형적 유리함으로 철마단이 버티고 있었으나 상일기와 당우혁의 존재감이 너무나 컸다.
거기다 연정과 청성파 장문인도 만만한 무인이 절대 아니었기에 무작정 시간을 끈다고 해서 승리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눈앞에 있는 검신이다.’
철마단주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상일기와 당우혁은 위협적이고 청성파와 아미파의 전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제일 위험한 건 바로 눈앞에 있는 반호진이었다.
당장 그만하더라도 반호진으로 인해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러니 승부를 내야 한다.’
철마단주는 결단을 내렸다.
고수일수록 본능과 직감이 예리해지기에 그는 단순히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반호진이 자신보다 윗줄의 강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승부는 절대 무공의 고하로 갈라지지 않으니까.’
파앙!
일대일 대결에도 수없이 많은 변수가 일어나는데 하물며 전장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철마단주는 두 발로 힘차게 애마의 옆구리를 찼다.
돌격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동시에 단전의 모든 공력을 언월도에 집중했다.
“차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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