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3장. 첫 교전. -01
백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던 난희주가 싱긋 웃었다.
면사를 쓰고 있었음에도 정문을 지키던 곽춘이 한눈에 자신을 알아봐서였다.
“어머? 나는 안 보이나 봐?”
“아닙니다, 백 무사님!”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지나칠 정도로 깍듯하게 포권을 하는 곽춘의 모습에 백설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예의 바른 것도 좋지만 그래도 너무 과한 것 같아서였다.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 제법 오랜 시간을 같이 있었는데도 절대 누나라고 부르지 않자 백설은 많이 섭섭했다.
난희주야 하오문의 소문주이기에 편히 대하기 어렵다지만 자신은 다른데 지나치게 깍듯하게 대하자 백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제가 어찌 백 무사님을 누나라고 부르겠습니까.”
“뭐 어때? 춘이랑 륭이는 무상문의 문도들인데. 급으로 따지자면 나보다 윗줄이지. 너희 둘이.”
“그, 그럴 리가요.”
곽춘과 한륭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물론 무상문의 위상이 엄청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건 반호진에게나 국한된 이야기였다.
자신들과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너희들도 알 텐데? 엄청 많은 사람들이 너희들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걸. 당장 나만 하더라도 마찬가지고.”
“저희는 그냥 일개 문도인데요.”
“맞습니다.”
곽춘과 한륭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절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다만 운이 매우 좋았다고만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는 또 모르지. 강호를 호령하는 고수가 되어 있을지. 문주님이 사람을 엄청 까다롭게 보는 거 알고 있지? 지금까지 찍어서 고수 안 된 사람이 없는 것도. 안목이 대단하신 분이야. 그러니 너희들도 가능성이 있지. 나중에 절대고수가 되면 나나 소문주님을 잊으면 안 된다?”
“참고로 이건 농담이 아니야. 진담이야.”
조용히 셋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난희수가 씨익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녀는 진짜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저는 절정고수만 되어도 엄청 기쁠 것 같아요.”
“난 이왕이면 초절정고수. 절정에 발을 디뎠으면 그래도 끝까지는 가 봐야지. 사내대장부로 태어났는데.”
“꿈이 크네.”
“원래 꿈은 크게 잡을수록 좋다고 하셨어. 문주님이.”
“인정. 그리고 절대고수가 되어도 절대 잊지 않을게요.”
곽춘의 시선이 난희주와 백설에게 향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곽춘은 절대 둘을 잊지 않을 터였다.
“절대고수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막 말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요. 남아일언 중천금이잖습니까. 뱉은 말은 무조건 지킵니다.”
“좋아. 약속한 거다?”
“네!”
다시 한번 확답을 들은 백설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 역시 곽춘이나 한륭이 절대고수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또 몰랐다.
지금은 그저 그런 재능을 가진 일개 무상문도일지 모르나 미래에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오빠는 안에 있어?”
“예. 안에 계십니다.”
“떠날 채비하느라 바쁘지?”
“예.”
“그래도 다행히 늦지는 않게 왔네.”
난희주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엇갈리지는 않아서였다.
서두른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난희주는 곽춘을 바라봤다.
“오빠에게 안내해 줄래?”
“예! 륭아, 정문을 부탁해.”
“그래. 잘 다녀와.”
한 명은 문지기로서 정문을 지키고 있어야 했기에 곽춘은 한륭에게 그 임무를 맡기고는 난희주와 백설, 그리고 호위대로 함께 온 비천대를 이끌고 장원을 가로질렀다.
곧장 반호진의 집무실로 향한 것이었다.
똑똑똑.
“문주님. 하오문의 난 소저를 모시고 왔습니다.”
“들여보내.”
“예. 들어가시죠.”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능숙하게 안내하는 곽춘의 모습에 난희주와 백설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 자란 동생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마냥 애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꽤나 의젓했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럼 저는 이만.”
“수고해.”
“예.”
그런 두 여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곽춘은 담담하게 허리를 숙이며 짧게 읍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다시 본래의 일을 하러 정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끼이익.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난희주는 면사를 벗으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편하게 앉아 있는 반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바쁘다고 들었는데 생각 외로 여유롭네?”
“딱히 준비할 게 없으니까. 옷이랑 속옷만 챙기면 되지. 필요한 건 그때그때 사면 되고. 굳이 짐을 늘릴 필요는 없지.”
“속도가 중요하긴 하니까.”
“근데 어쩐 일이야?”
자리를 권하기 무섭게 용건을 묻는 반호진이었으나 난희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걸 그녀 역시 선호하기도 했고.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서.”
“나한테? 혹시 마교에 대해 알아낸 게 있나?”
반호진이 눈을 반짝였다.
개방이 실패했다고 해서 하오문도 실패하리라는 법은 없어서였다.
게다가 티가 확 나는 개방도들과 달리 하오문도들 중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들도 꽤 많았다.
그들을 활용해서 정보를 구하는 방식도 잘 쓰기에 반호진은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마교에 대해서는 우리도 알아낸 게 별로 없어. 경계가 워낙에 삼엄해서. 일단 생김새에서 구별이 되기도 하고.”
“억양도 다르지.”
“맞아.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려고 노력 중인데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어.”
“마교에 관한 게 아니라면, 뭐야? 나에게 할 말이라는 게.”
“여기는 걱정하지 말라고.”
난희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세한 설명 없이 한마디를 툭 내뱉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반호진은 이 말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내가 예상하는 게 맞나?”
“맞을 거야.”
“흐음. 그래 준다면야 나야 고맙지만 하오문 측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있지. 오는 게 있으면 당연히 가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물론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을 거야. 그게 서로를 위해서 좋을 테니까.”
반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심유한 눈으로 앞에 앉은 난희주를 지그시 바라봤다.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명분은 충분했지만 중요한 건 하오문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에게 좀 더 좋은 거 같은데.”
“길게 보는 거지. 우리가 일이 년만 볼 사이는 아니잖아. 그리고 잊은 거 같은데, 오빠 문도들 중 반 가까이는 본문에서 생활했어. 소속은 다르지만 남이 아니야. 본문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즉 오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는데.”
“고마우면 나중에 승리하고 돌아와서 나 좀 챙겨 줘.”
난희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알고 있었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저변에는 진심이 서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약속한 거다?”
“물론. 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잘 알지. 오빠의 한마디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고맙다. 너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이제야 차를 따라 주며 반호진이 말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지만 아마 하오문 내부에서는 말들이 많았을 것이었다.
정천맹이 승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겠으나 마교가 이긴다면 하오문으로서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기는. 금수도 은혜를 입으면 갚으려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사람이잖아.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아, 근데 함께 싸우겠다는 건 아냐. 그건 우리도 힘들어.”
“알지. 거기까지 바라지는 않아.”
“이래서 오빠랑 대화하면 편하다니까. 말이 잘 통해. 본문의 몇몇 늙은이들은 아예 소통이 안 돼.”
그동안 쌓인 게 많은 모양인지 난희주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게 모르게 시달린 게 상당한 모양이었다.
“생각하는 게 다르니까. 보는 것도 다르고. 그러니 결과로 증명해야지.”
“오빠가 딱 보여 주면 돼. 겸사겸사 늙은이들 콧대도 제대로 눌러 주고.”
“노력은 해 볼게.”
“자신은 있는 거지?”
난희주가 살짝 흔들리는 눈으로 반호진을 응시했다.
마교에 대해 알려진 게 워낙에 없다 보니 괴물 같은 반호진의 무위를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안했다.
“자신이 있다기보다는 최대한 노력해 보는 거지. 진인사대천명의 마음가짐이라고나 할까.”
“참 신기해. 걱정은 되는데 이상하게 오빠가 질 것 같지는 않아. 누구랑 싸우든지 말이야.”
“어떤 무인도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며 싸우지 않아. 정확하게는 덤빌 만한 상대에게 덤비는 거지만.”
“살아서 돌아와. 식구들도 있지만 이제는 연인도 있잖아?”
“역시 알고 있었구나.”
조금은 서글픈 기색으로 난희주가 말했다.
그러나 그 기색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반호진 앞에서 굳이 티를 내서 좋을 건 없었기에 난희주는 평소처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나 하오문의 소문주야. 차기 하오문주라고.”
“알지. 근데 무림 정세가 워낙에 흉흉하니까.”
“그래도 알아야 할 건 알아야지. 늦었지만 축하해.”
“고맙다.”
“근데 안심하지는 마. 모용 소저와 교제한다고 해서 정략결혼을 포기하는 이는 별로 없을 테니까. 애초에 정략결혼의 목적이 혈연이니까 첩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곳들이 있을 거야.”
난희주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인이 생겼다고 해서 포기할 위인들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오히려 대놓고 첩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도 있을 터였다.
“그렇겠지. 근데 내가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닌지라.”
“하긴. 어련히 잘할까. 어쨌든 모용 소저에게도 축하한다고 전해 줘. 시국이 시국인지라 나도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서.”
“알았어.”
“다음번에도 지금처럼 몸 성히 만났으면 좋겠어.”
놀리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말투로 난희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한 대로 급하게 시간을 만들어서 온 것이었기에 그녀는 짧은 인사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네.”
창가로 간 반호진이 멀어지는 난희주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반호진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
휘이이잉!
거친 바람으로 인해 모래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수백 기의 기마대가 움직였다.
거센 모래바람을 가르며 정체불명의 기마대가 이동했던 것이다.
“언제까지 잡놈들을 상대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주님.”
“불평불만은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교주님의 명령만을 따를 뿐이다.”
“저도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종남산까지는 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거리도 그리 멀지 않은데요.”
“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묵빛의 철갑을 입고 있는 철마(鐵馬) 위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복이자 친우인 부단주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명령 없이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단주님께서도 시시하지 않습니까. 공동파가 워낙에 기대 이하여서. 그러니 종남파도 한번 겪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겸사겸사 화산도 가고. 다른 사단(四團)과 달리 기동력은 저희가 최고이지 않습니까. 마음먹고 달리면 금방 다녀올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교주님의 명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일정 구역 이상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끄응!”
마치 석상하고 대화하는 것 같은 고지식함에 부단주가 앓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곳곳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단원들과는 형제나 마찬가지였기에 대놓고 비웃는 것이었다.
“너무 답답해하지 마라. 꼭 우리가 움직일 필요는 없으니까.”
“오고야 있겠지만 대신 다른 녀석들과 나눠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운명이라면 따라야겠지.”
“단주님께서도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투왕을 비롯해서 천하십대고수들의 실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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