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1장. 은밀하고 섬뜩하게. -01
“하하. 티가 많이 납니까?”
“예. 눈 밑이 검은 게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할 일이 끝이 없더라고요. 하나가 끝나면 두 개가 새로 생기니 무한 반복하는 느낌입니다. 사부님이 방주직에 계실 때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오중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의 고생이 모두 담긴 한탄 가득한 한숨이었다.
“가끔은 쉬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요.”
“역시 저보다 선배라서 그런지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선배라니요. 규모 자체가 비교불가인데요. 남창 귀퉁이에 있는 작은 문파와 개방을 어찌 같은 선상에 놓겠습니까.”
“귀퉁이에 작은 문파라니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오중건이 실소를 흘렸다.
겸손해도 너무 겸손한 것 같아서였다.
개방과 비교하면 규모는 확실히 작을지 모르나 명성을 기준으로 하면 절대 꿀리지 않았다.
이건 그의 생각이 아니라 무림인이라면 대부분 동의할 터였다.
“아직 규모가 작은 건 사실이니까요.”
“점점 커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만 하더라도 변화가 온몸으로 느껴지던데요. 유명세야 원래부터 가지고 계셨고, 지금은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곳이 되지 않았습니까.”
“선망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박하게 평가하시네요.”
오중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겸손한 건 좋지만 지나치게 평가가 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는지요?”
“늘 그렇듯이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인사만 했는데 중원을 한 바퀴 돈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제는 방주님이시니까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원해서 오른 건 아니지만요.”
진심이 담긴 투덜거림에 반호진이 옅게 웃었다.
약한 소리를 하지만 오중건은 능력자였다.
후개 시절부터 이미 방주인 개왕을 대신해 개방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하기도 했고.
실제로 오중건이 뜬금없이 방주직에 올랐음에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다들 칭찬하던데요. 일을 잘하신다고요.”
“누가 하더라도 칭찬했을 겁니다. 비교 대상이 사부님이니까요.”
“하하하.”
보통은 까더라도 돌려 깔 텐데 오중건은 달랐다.
대놓고 까는 그의 모습에 반호진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어서였다.
“참, 소식은 들었습니다. 드디어 무상문에 안주인이 생겼다고요.”
“안주인이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허어. 아직 비공식인 겁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는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오중건이 개구쟁이처럼 키득거렸다.
난감해하는 반호진의 모습을 보자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모용세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끈질긴 노력 끝에 용을 품에 안아서였다.
‘근데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
다른 이들이 어떻게든 반호진을 손에 넣으려고, 움켜쥐려고만 할 때 모용세가는 다르게 움직였다.
반호진이라는 존재를 소유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속된 말로 물건 취급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 그리고 감정으로 다가갔다.
오중건은 이 차이가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가문과 여인이 반호진을 노렸지만 결국 성공한 건 모용희수뿐이었다.
그게 모든 걸 증명했다.
‘정확하게는 모용세가의 노력이 아니라 모용희수의 노력이지만.’
많은 이들이 모용궁의 지시하에 모용희수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시작은 모용궁의 지시였을지 모르나 지금의 결과를 만든 건 오롯이 모용희수였다.
백봉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고 한 명의 여인으로서 반호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오중건은 바로 그 점이 대단했다.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이자 무림삼봉 중 한 명으로서 자존심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모용희수는 망설이지 않고 모든 걸 내려놓고서 반호진에게 다가갔다.
“대체 그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제게 있어 문주님은 특별하니까요.”
“특별 관리 대상이라고 너무 대놓고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전혀 아닙니다. 절대 그럴 마음도 없고요. 그저 개인적인 관심입니다.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의 발로라고나 할까요?”
오중건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나름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려고 한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반호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런 말이 있지요. 말이 길어질수록 핑계나 변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심장을 후벼 파는 말이네요. 근데 개인적인 관심인 건 맞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는 건 아니고, 그냥 동향만 파악하는 수준입니다.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것들도 있고요. 제가 알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게 제법 많거든요.”
“이해합니다. 개방의 눈과 귀는 어디에도 있으니까요.”
“동시에 어디에도 없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날짜는 아직입니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오중건이 물었다.
기대하기보다는 놀리려는 의도로 물은 것이었다.
“혼인에 대해서는 아직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군요. 저였다면 일단 날부터 잡았을 텐데.”
오중건이 진심으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반호진이 선을 명확하게 그었다고 하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욕심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모용궁과 모용희수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자 오중건은 의아했다.
“저에 대해 그만큼 잘 아는 거죠.”
“오, 생각해 보니 그게 맞겠네요. 어차피 결정권은 문주님께 있으니까요. 둘 다 결혼적령기이기는 하나 급한 나이는 또 아니니.”
이어지는 말에 오중건은 곧바로 수긍했다.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모용희수와 모용궁의 뜻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결정은 반호진이 하는 것이었기에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맞습니다. 아직은 둘 다 여유가 있지요.”
“또 부인을 한 명만 들일 필요도 없고 말이죠.”
오중건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맺혔다.
혼인은 못 해도 알 건 다 안다는 듯이 음충맞기까지 한 미소를 짓는 오중건의 표정에 반호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앞서가는 것 같습니다만.”
“미래는 모르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요즘에 걱정이 많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서요. 전쟁이 끝났을 뿐 싸움이 끝난 건 아닌데 말이지요.”
“천사맹과 마도련의 잔당은 대부분 처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리는 거의 되었습니다. 애초에 사도와 마도를 뿌리 뽑는 게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태초부터 백도무림과 함께 존재해 왔으니까요.”
전쟁에서 백도무림이 승리했으나 그렇다고 마도무림과 사도무림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단지 세력이 약해졌을 뿐이었다.
과거 정사대전, 정마대전에서 사도와 마도가 승리했을 때 백도무림도 똑같았었다.
패배했지만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저항이 거센 모양이군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문제입니까?”
반호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낌새를 보아하니 단순한 문제가 아닌 듯싶어서였다.
“완전히 다른 문제는 아닙니다. 근원을 따지면 천사맹, 정확하게는 사사혈천교와 연관이 있으니까요.”
“흡정대법, 아니. 사사혈천교는 흡정기공이라고 했던가요. 그게 문제인 겁니까?”
“맞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후 본방이 가장 집중적으로 노린 곳이 사사혈천교였습니다. 이유는 흡정기공 때문이었죠. 아마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흡정기공은 위험한 무공이니까요.”
“그렇죠.”
반호진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가 보더라도 흡정기공은 너무나 위험한 무공이었다.
사공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괜히 금단의 무공으로 지정한 게 아니었다.
“제가 판단하기로 사사혈천교는 구 할 가까이 멸절되었습니다. 일반 교도들은 몰라도 수뇌부는 확실하게 처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흡정기공을 비밀리에 손에 넣고서 연구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퍼져 있습니까?”
“그걸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반호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의외로 반호진은 놀라지 않았다.
분명 충격적인 사안임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별로 안 놀라시는군요?”
“예. 이상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이상하지 않다라.”
반호진의 대답에 오중건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한마디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아서였다.
“연구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힘에 대한 열망은 무인에게 있어 본능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다만 문제는 연구를 넘어 익혔을 때입니다. 상관세가처럼 은밀히 힘을 키우는 데 이용할 수도 있고요.”
“저 역시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익혔는지 안 익혔는지 육안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으니까요.”
“방주께서 이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몰래 연공한 곳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아직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오중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괜히 우려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한 번 벌어졌기에 오중건은 그 어떤 곳도 섣불리 믿지 않았다.
무림십대세가 중 한 곳이었던 상관세가조차 힘의 유혹을 떨쳐 내지 못하고 넘어가기도 했고.
“개방에서 막았군요.”
“예. 알려지면 몰래 익히고 있던 이들이 더욱더 음지로 숨을 테니까요. 혼란을 조장하는 꼴이 될 수도 있고.”
“그렇죠.”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곳들이 엮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중건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어디라고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반호진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가 어디를 의심하는지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죠.”
“만약에 연관이 되어 있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순리대로 할 겁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오중건이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아닐 거라고, 반호진이라면 인정에 휘둘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인간관계라는 게 칼로 자르듯 싹 베어 버릴 수 없었다.
“달리 말하면 구파일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죠. 그게 맞는 것이기도 하고요. 다만 문제는 개인의 일탈이냐, 소속 전체의 일탈이냐를 구분하는 것인데 이게 너무 어렵습니다.”
“그게 쉬운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요.”
“생각해 보니 또 그렇긴 하네요. 하하하.”
오중건이 피식 웃었다.
듣고 보니 자신이 너무 말도 안 되는 걸 바란 것 같아서였다.
판관조차도 실수를 하는데 이제 막 방주직에 오른 그가 완벽할 리 없었다.
“방주님께서 무엇을 걱정하는지 압니다. 그러나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육신통 중 타심통을 얻지 않는 한 말이지요. 그건 사부님께서도 불가능하십니다.”
“그렇지요.”
불가 육신통은 말 그대로 전설이었다.
하나라도 제대로 얻은 이가 드물 정도로, 아니 실제로 얻은 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경지가 육신통이었다.
그렇기에 오중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대비 정도만 해 놓으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사실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하고요. 괜한 의심으로 분란을 넘어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진짜 스물셋 맞습니까? 가끔 보면 나이를 속인 것 같습니다. 어찌 그리 시야와 생각이 넓으신지. 저와 나이가 뒤바뀐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현실적인 성격일 뿐입니다.”
“성격이 현실적인 사람은 많지만 다 문주님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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