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0장. 서서히 다가오는. -04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모친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사마의성까지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게 반호진은 의아했다.
“오빠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죠.”
“그런가. 하긴. 의성이에게도 사적인 영역이 있는 법이니까. 엄마도 마찬가지고.”
“맞아요.”
“그런데 왜 아직도 둘은 말을 안 놓아? 동갑끼리.”
“동갑이라고 해서 꼭 말을 편하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모용희수가 씨익 웃었다.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그런 법이 없기는 한데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불편하게 지낼 필요가 있나 싶어서.”
“저는 안 불편한데요? 사마 소저도 마찬가지고요. 말은 서 공자와도 안 놓았고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
“하지만 저나 서 공자나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죠.”
모용희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셋 다 동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말을 놓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각자 편한 방식이 있는 법이었고, 혹은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었다.
서로 불편하다면야 당연히 개선을 해야겠지만 당장은 세 사람 중 누구도 불만이 없었다.
“뭐, 그거야 너희 셋의 문제니까. 싸운다면야 내가 나서야겠지만 그건 또 아니니.”
“싸울 일이 없죠. 오히려 친한 편이니까요.”
“그래?”
반호진이 반문했다.
세 사람의 관계가 친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친한 편이죠. 나쁘지는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서먹서먹한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네.”
“여름도 금방일 거 같아요. 벌써 한낮에 이렇게 더운 걸 보면. 봄이 온 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참 빨리 흘러.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빨리 가는 것 같아.”
“맞아요.”
기지개를 켜며 모용희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제 막 이십 대가 되었지만 그녀도 새삼 느끼고 있었다.
십 대 때보다 지금의 하루가 훨씬 더 빠르게 흘러감을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좀 웃기네.”
“전 안 웃긴걸요?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거잖아요. 저도 공감하고요.”
“너나 나나 이십 대 초반인데 말이지.”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었는데 딱히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거 같아요. 언니들이 나중에는 한 살 한 살 먹는 게 두렵다고 했는데 아직은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도 않고.”
모용희수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서였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듯 바람에는 온기가 서려 있었는데 밖보다 더 더운 부엌에 있어서 그런지 그녀에게는 훈풍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직은 어리니까.”
“어려도 여자랍니다. 십 대와 이십 대는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요.”
모용희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마치 이제는 소녀가 아니라 여인이라는 듯한 미소에 반호진은 코웃음을 쳤다.
“다르긴. 이제 갓 스물이 됐으면서. 적어도 일 년은 지나야 좀 달라지는 게 있지. 지금은 퍽이나 있겠다.”
“아니거든요.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만 보더라도 일 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잖아요. 이제는 삼형제의 새끼들도 다 컸고요. 곧 손자들을 볼걸요?”
“……그렇긴 하겠네.”
반호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삼형제가 일 년을 다 채울 때쯤에 새끼를 낳아서였다.
“강아지와 사람을 비슷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니까요.”
“그렇다고 해 두지 뭐.”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산책하자고 한 거예요?”
“너랑 이런 시간을 가진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모용희수의 두 눈이 커졌다.
가뜩이나 큰 눈이 더욱 커지며 반호진의 상반신을 담았다.
“없긴 했죠. 이렇게 단둘이는.”
“맞아. 문득 그게 떠올라서 바로 찾아간 거야.”
“아하. 그래서 느닷없이 찾아온 거군요.”
“그렇지. 너무 갑작스러웠나?”
“아뇨. 전 좋은 걸요? 제가 없다고 해서 저녁을 준비하는 데 크게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제가 없어서 능률이 더 올랐을 거예요.”
모용희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씁쓸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다지만 아직 고수들에 비하면 그녀는 이제 막 초보를 벗어난 수준이었다.
잘 쳐줘야 다른 사람들 발목을 붙잡지 않는 정도라고나 할까.
“자기객관화가 잘되어 있네.”
“그래야 더 높은 경지로 갈 수 있으니까요. 오빠가 늘 말하는 거잖아요. 네 주제를 알라.”
“내가?”
“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반호진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였다.
“똑같이 말한 적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으로 말한 적은 많죠.”
“그건 인정.”
“어느 분야든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해 아는 건 중요하니까요.”
“맞아.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저에게요?”
반호진의 옆에서 사뿐사뿐 걸어가던 모용희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반문했다.
말투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져서였다.
가볍게 산책하자는 줄로만 알았는데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자 모용희수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응. 더 늦기 전에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늘 내 곁에 한결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
“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모용희수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 정도로 반호진의 말은 뜻밖이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녹아내렸던 것이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어. 태어나서 지금껏 이성을 좋아해 본 적이 없거든. 근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어.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해.”
“고마워요.”
“왜 네가 고마워 해. 지금 내가 고맙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말해 준 게요.”
“아직 내 말 안 끝났는데.”
누가 보더라도 감동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는 모용희수를 보며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아직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아서였다.
“더 남았어요?”
“응.”
“그럼 얌전히 들을게요.”
“지금 당장 혼인을 거론하는 건 너무 급한 것 같고 지금처럼 천천히 알아갔으면 좋겠어.”
“보통은 여자가 그런 말 하지 않아요?”
조용히 반호진의 말을 경청하던 모용희수가 눈을 곱게 흘겼다.
어째 여자가 할 법한 말을 그가 하고 있어서였다.
자고로 남자라면, 그것도 상대가 절세가인이라 불리는 미인이라면 당연히 어떻게든 고꾸라뜨리려 해야 하는데 반호진은 정반대였다.
그 점이 모용희수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의 발언은 남녀차별적인 말이야. 남자가 이러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차암.”
당당하게 소신을 말하는 반호진을 모용희수는 새침하게 흘겨봤다.
그러나 내심은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싫으면…….”
“거기까지. 이제는 오빠한테 차이면 갈 곳도 없어요.”
“그럴 리가. 천하의 백봉이 너무 약한 소리를 하는데.”
“……다른 남자한테 가고 싶지도 않고요. 그나저나 놀랍네요. 오빠한테서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이야.”
“너무 늦었지. 미안해.”
오만가지 감정이 담겨 있는 중얼거림에 반호진이 미안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역지사지라고 그가 모용희수의 입장이었어도 마음고생이 상당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오빠의 마음도 이해하니까요. 제가 오빠를 선택했듯이 오빠도 오빠의 선택을 한 거니까요. 그러니 서운한 건 전혀 없어요. 오히려 기쁘죠. 지금이라도 오빠가 허락해 줘서. 그럼 이제는 팔짱 정도는 끼어도 되죠?”
“얼마든지.”
“헤헤헤.”
슬그머니 다가온 모용희수가 반호진의 왼팔에 자신의 오른팔을 슬쩍 걸었다.
그러고는 헤실거렸다.
“이왕 나온 거 저잣거리에 가 볼까? 애들 간식도 좀 살 겸 해서.”
“저는 좋아요!”
“그럼 가자.”
“네!”
모용희수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이렇게 단둘이 조용하게 산책을 하는 것도 좋았지만 시전에 가는 것 역시 좋았다.
구경거리도 구경거리지만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서였다.
자신과 반호진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가끔은 밖에서 사 먹는 간식이 맛있으니까. 너무 건강만 챙기는 것도 좋지 않아.”
“맞아요. 가끔씩 길거리 음식도 먹어 줘야죠. 은근히 생각나는 날도 있고요.”
모용희수가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건강을 생각하면 황매향의 주장대로 신선한 재료를 이용해 직접 만들어 먹는 게 가장 좋았다.
하지만 사람이 늘 똑같은 것만 먹고 살 수는 없었다.
때로는 건강에 그리 좋지 않더라도 자극적인 게 당겼기에 모용희수는 환하게 웃으며 반호진과 나란히 걸어갔다.
***
“이제는 제법 무림문파다운 면모가 보이는데.”
남창의 번화가를 가로지른 오중건이 멀리 보이는 무상문의 정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지기가 있는 모습을 보자 이제야 무림문파다운 느낌이 들어서였다.
진즉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지난번을 떠올리며 오중건은 히죽 웃었다.
“개, 개방주님?!”
느릿하게 걸어오는 오중건을 발견한 곽춘이 두 눈을 비볐다.
자신이 본 게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었다.
“나를 기억하느냐?”
“물론입니다! 저번에 오셨잖아요!”
“허허허.”
단박에 자신을 알아보는 모습에 오중건이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별거 아닌 건데도 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어딜 가든 개방주로서 대우를 받는데 말이다.
“안에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거 있나? 약속을 잡고 온 거라 지금쯤 내가 온 걸 문주께서 알고 계실 터인데.”
“그래도 또 혹시 모르니까요.”
“하긴. 이제는 규모가 제법 커졌으니 깜빡하셨을 수도 있지.”
역마살이 낀 것처럼 한시도 한곳에 머물지 않고 중원전역을 돌아다녔으나 그럼에도 반호진과 무상문에 대한 소식은 꾸준히 보고받았다.
오중건에게나 개방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이니만큼 늘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숙소로 먼저 안내해 드릴까요?”
오늘의 문지기는 곽춘만이 아니었다.
동갑내기 친구인 황동오도 같이 있었기에 그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았다.
“이왕 기다릴 거 숙소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지. 서 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문주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곽춘과 황동오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이윽고 예의 뒷짐을 진 채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반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주님.”
“하하하. 마중을 나와 주신 겁니까?”
“방주님이 오셨는데 당연히 제가 마중을 나와야지요.”
“너무 황송한데요.”
장난스러운 말과 달리 오중건은 헤벌쭉 웃었다.
그도 개방의 방주지만 눈앞에 있는 반호진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말 그대로 무림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인물이 반호진이었기에 이렇게 대접해 주자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개방주께서 찾아오셨는데.”
“에이. 소림검신이자 소림사의 속가장문인과 비교할 수 있나요. 저야 그저 거지들의 대표일 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여기 있는 아이들만 해도 그렇고요.”
“흐음.”
멍한 얼굴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곽춘과 황동오의 모습에 오중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어떤 말보다 와닿아서였다.
오중건은 스스로를 딱히 대단한 신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세인들의 시선은 달랐다.
그걸 그는 새삼 깨달았다.
“들어가시죠.”
“알겠습니다.”
더 있어 봤자 민폐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오중건은 순순히 반호진을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오중건은 반호진의 집무실에서 차를 받았다.
또르륵.
“저번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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