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403화 (403/468)

제 130장. 서서히 다가오는. -03

태상문주가 침음을 흘렸다.

말은 이해했으나 저의를 온전히 파악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순수하게 드러난 의미만 생각할 수가 없기에 그는 반호진의 표정을 살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제가 말하는 건 실패할 가능성이니까요. 두 분께서 기대했던 것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네. 세상일이라는 게 절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말도 안 되는 걸 바라면 그건 욕심이지.”

“첫 번째는 성공했고, 이번 기수 역시 실패는 아니지만 아직 결과가 나온 건 아닙니다. 진행 중이니까요. 그러니 한 번 정도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알겠네.”

태상문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의미로 이렇게 말하는지 잘 알았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결정은 내린 상태였다.

스윽.

그렇기에 그는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봤다.

자신이야 내심 결정을 내렸다지만 태정문주의 마음은 다를 수도 있어서였다.

또한 현재 태정문을 이끄는 수장은 아들이었기에 최종결정권은 태정문주에게 있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최악의 상황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절정의 벽을 넘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사람은, 무인은 늘 실패하니까요. 고작 한 번 더 실패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소림검신과의 비무는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또한 한마디의 조언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 두 개를 얻을 수 있기에 저는 그 시간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다.”

태정문주의 말에 태상문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역시 아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을 조율해 보죠. 두 분께서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문주님!”

태정문주가 반호진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가벼운 대답과 달리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그 스스로가 잘 알아서였다.

솔직히 반호진의 입장에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금액이 상당하다고 하나 반호진에게는 푼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반호진이 청탁과도 같은 그의 부탁을 받아 준 건 속가장문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일 터였다.

“어찌 보면 무림을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더욱이 남이 아니기도 하고. 다만 인원은 제한이 있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있어서요. 무공교두로 있는 분들도 각자의 일과가 있는지라.”

“다 이해합니다. 사실 저희로서는 부탁을 들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인원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있으신지요.”

“이번에 해 보니까 오십 명에서 백 명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지금 규모에서는요.”

반호진의 대답에 태정문주가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현재 보낼 만한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얼추 백 명 안팎은 될 듯싶은데.’

잽싸게 계산을 마친 태정문주가 미간을 좁혔다.

소림사 속가문파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규모가 제법 큰 곳이 바로 태정문이었다.

그런 만큼 문도들도 많았다.

한데 문제는 무상문에 제자를 보내고 싶어 하는 곳이 태정문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우리만 훈련받는 게 제일 좋지만, 그건 힘들겠지.’

사람 마음은 다 똑같았다.

또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러니 태정문이 독점하도록 표국이나 금가장, 하오문지 지켜만 보지는 않을 터였다.

“최대 백 명이란 말이로군.”

“예. 그 이상은 조금 버겁더라고요. 제가 돈에 연연하는 성격도 아닌지라.”

“하긴. 사실 문주 입장에서는 해서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 않은가.”

“맞습니다.”

아들이 생각에 잠긴 듯하자 태상문주가 시기적절하게 입을 열었다.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준 것이었다.

“본문은 문주의 일정에 무조건적으로 따르겠네.”

“감사합니다.”

“고맙기는. 당연한 것을.”

“아, 혹 가격에 대해서는 알고 계신지요?”

“물론이네. 사전조사는 필수이지 않겠나.”

태상문주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정도 조사도 하지 않고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례한 짓이었다.

모든 걸 알아보고 상의한 끝에 결정을 내리고 직접 움직인 것이었기에 태상문주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흠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일세.”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사마 소저와도 같이 일정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태상문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처럼 사마의성에게서도 훈련을 받았으면 싶어서였다.

특히 기문진법의 경우 제갈세가를 제외하면 수준 높은 실력을 갖춘 곳이 전무했기에 이왕이면 같이 훈련을 받고 싶었다.

“한번 물어는 보겠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의성이가 요즘 바빠서요. 나이는 어려도 사마세가의 당대 가주이기도 하고.”

“물론이네.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네. 강요할 마음도 없고. 다만 가능한지에 대해서만 묻고 싶을 뿐이네.”

“그럼 이따가 식사할 때 한번 얘기를 꺼내 보죠.”

“고맙네.”

태상문주가 환하게 웃었다.

일단은 거절을 하지 않았기에 그는 첫 번째 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막판에 어그러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첫 단추를 잘 꿰었기에 태상문주는 만족했다.

“표국들과 하오문, 금가장에게도 말했는데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다리뿐입니다. 조율은 두 분께서 사마 가주와 따로 해야 합니다.”

“명심하겠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태상문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민을 끝낸 듯한 아들을 지그시 바라봤다.

***

부엌 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무려 삼백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느라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미녀, 모용희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자기가 만들 음식만 준비하는 것도 버거웠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가씨! 계란 좀 풀어 주세요!”

“알았어!”

오늘 만들 음식의 식재료를 다듬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 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양손을 따로 사용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모용희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도 이곳의 어엿한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희수야.”

“네?!”

그때 정신 사나운 부엌을 가르는 한줄기 목소리가 들렸다.

모용희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음성이.

그 목소리에 모용희수는 물론이고 부엌에서 정신없이 식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만들던 여인들이 얼음처럼 얼었다.

“잠시 시간 괜찮아?”

“지금이요?”

“응. 바쁘면 어쩔 수 없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모용희수가 황급히 대답했다.

잠깐 고민했으나 그 시간은 짧았다.

대체인력이 없다면 모르겠으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게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잠깐 걸을까?”

“네.”

후다닥 양손을 씻고 나온 모용희수를 보며 반호진이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스슥.

반호진을 따라 걷던 모용희수의 두 손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음식을 만들고 있었기에 머리카락이 산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리저리 삐져나와 있었다.

거기다 따뜻해지는 계절로 인해 얼굴에도 땀방울이 맺혔기에 그녀는 재빨리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너무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돼.”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너 정도 얼굴이면 뭘 해도 예뻐.”

흠칫!

모용희수가 움찔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모용희수는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서 반호진을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요란 안 떨어도 예쁘다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예쁘다고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모용희수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아앗!”

“내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했나?”

“처음이거든요. 저보고 예쁘다고 한 게.”

“그랬나? 근데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예쁜걸.”

“알고는 있죠. 근데 중요한 건 오빠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는 거예요.”

반호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게 무슨 차이가 있나 싶어서였다.

남의 인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느 분야든 애매한 사람들의 이야기이지 모용희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게 큰 차이가 있나?”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죠. 이런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거든요. 친오빠가 한 말과 오빠가 한 말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어요.”

“그래?”

모용희수가 설명했으나 안타깝게도 반호진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고.

“그래서 놀랐어요. 오빠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내가 그렇게 예쁘다는 말에 인색한 사람은 아닌데.”

“인색하지는 않죠. 근데 사람에게는 잘 안 하시잖아요.”

“그런가?”

반호진이 그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모용희수가 그렇다고 말하니 당황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자신의 삶을 반추했다.

“대개는 동물들이나 어린아이들한테만 예쁘다고 말하는 편이죠.”

“그……랬었나?”

“미심쩍으면 다른 분들에게도 한번 물어보세요. 그게 제일 객관적일 테니까요.”

“맞는 것 같네.”

반호진은 결국 인정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아서였다.

일단 모용희수에게 예쁘다고 말한 건 아무리 과거를 곱씹어 봐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근데 갑자기 웬 산책이에요?”

“가끔은 이런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너도 너무 일만 하는 것 같고.”

“재미있어요. 처음에는 나만의 무기를 갖추려고 시작했는데 막상 배워 보니까 재밌고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여전히 어렵긴 하지만요. 불을 조절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 같아요. 화력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간이야 이제는 감이 좀 잡히는데 불을 세밀하게 조절하는 건 쉽지 않더라고요. 장작의 크기가 다 다르기도 하고. 또 같은 크기라고 해도 습기를 먹었느냐, 덜 먹었느냐에 따라 화력이 달라지더라고요.”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모용희수의 말에 반호진은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숙달된 숙수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모용희수의 모습이 반호진은 새삼 예쁘게 다가왔다.

“후회하지는 않아?”

“전혀요.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의식주라고 하잖아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하는 게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나중에 자식이 태어나면 제가 직접 이것저것 만들어서 먹이고 싶어요.”

“언젠가는 너도 자식을 낳겠지.”

“오빠도요.”

모용희수가 싱긋 웃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반호진 역시 언젠가는 결혼할 거라 생각해서였다.

물론 그 반려자가 자신이었다면 좋겠다고 내심 바랐다.

차마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겠지.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얘기는 들었어요. 방장께서 특히 많이 원하신다고요. 어머님도 그렇고요.”

“우리 엄마랑은 무슨 대화 했어?”

“그냥 이것저것요. 딱히 특별한 건 없었어요. 오히려 사마 소저와 따로 대화를 많이 나눈 걸로 알아요.”

“의성이랑?”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얘기는 처음이어서였다.

“네. 근데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저도 몰라요.”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하셨지.”

“안 할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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