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0장. 서서히 다가오는. -02
모용척이면 모르겠으나 선우방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굳이 그가 신경 쓰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잘할 인물이 선우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걱정이 되는 모용척도 더는 사고를 치지 않고 정이륭, 서조운과 함께 수련에 매진했기에 반호진이 딱히 신경 쓸 게 없었다.
그래서 요즘 매우 행복하기도 했고.
“근데 이 녀석이 더 행복해 보이네.”
대놓고 표현은 하지 않았으나 문장에서 반호진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선우방이 현재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특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에 대해서 장황하게 쓴 글을 보며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처가가 되리라고 예상하기는 했으나 지금 글을 보아하니 그 수준을 훌쩍 넘을 듯했다.
“아기라. 나쁘지 않지. 부부의 결실이기도 하고.”
예전이었다면 선우방이 아기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공감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선우방보다 그가 더 아기에 대해 잘 알았다.
똥오줌이 묻은 천 기저귀를 거리낌 없이 갈아 줄 정도로 말이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애정 없는 정략결혼이었기에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걱정을 제법 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인 듯싶었다.
부인인 팽수영에 대한 애정 가득한 내용에 반호진은 조심스럽게 경사를 기대했다.
“지난 생에서의 방이는 혼자였는데 말이지.”
반호진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이제는 오로지 그만 알고 있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지금보다 나이도 많고, 잃은 것도 많은 선우방은 여자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천하사패와의 전쟁만 생각하고 싸웠었다.
한데 그랬던 선우방이 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자 반호진은 만감이 교차했다.
또한 변화는 선우방만이 아니었다.
“다 변했지. 모두 좋게.”
반호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 난희주, 금호연의 인생 역시 모두 바뀌었다.
모용희수 역시 마찬가지였고.
“잘 도착하셨으려나.”
마지막으로 반호진은 모친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본가에 도착했을 것 같아서였다.
선물을 바리바리 싸 줘서 짐이 많았지만 마차 한 대를 같이 보냈기에 오히려 올 때보다 편하게 갔을 터였다.
“아버지와 형들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반호진이 입맛을 다셨다.
나름 신경 써서 준비했지만 정작 받는 이들은 심드렁할 수도 있기에 걱정이 되었다.
똑똑똑.
“문주님. 매향이옵니다.”
“들어와.”
“네.”
“무슨 일이야?”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무실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황매향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그렇듯이 차분한 신색으로 조신하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반호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손님? 오늘 약속한 손님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숙소로 모셨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반호진을 향해 황매향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는 이런 일이 익숙했기에 일처리가 능수능란했다.
예전이었다면 예기치 못한 방문객의 등장에 우왕좌왕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누군데?”
“태정문(太正門)의 태상문주님과 태정문주가 방문했습니다.”
“사문의 속가문파들이로군.”
곧바로 대답하는 황매향의 말에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소림사의 속가문파들 중에서 나름 어깨에 힘 좀 주는 곳이 바로 태정문이었다.
속가제일문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곳이었다.
“어찌할까요?”
“바로 모셔 와. 어차피 당장은 할 일이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모셔 오겠습니다.”
태정문주는 반호진과 같은 배분이지만 태상문주는 소림사의 방장인 담현과 같은 배분이었다.
그렇기에 황매향은 호칭에 조심하며 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집무실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호진입니다.”
백염백미를 가진 지긋한 나이의 노인을 향해 반호진이 먼저 인사했다.
사문의 존장인 만큼 예의를 다한 것이었다.
“허허허. 처음은 아니네. 천사맹, 마도련과의 전쟁 때 스치듯이 마주쳤었네.”
“그렇습니까.”
배분은 노인이 높았으나 반호진 역시 일문의 수장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태정문이 아니라 무상문이었기에 태상문주는 배분이 높다고 함부로 하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상문주님.”
“말씀 편히 하시지요, 두 분 다.”
태상문주에 이어 정중하게 인사해 오는 태정문주를 향해 반호진이 먼저 운을 띄웠다.
이런 건 아무래도 후배인 그가 먼저 말하는 게 맞아서였다.
“아니네. 숭산이었다면 모를까 이곳에서 어찌 문주에게 말을 놓겠나. 나이는 어려도 일문의 수장이거늘.”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라고 하지만 속가장문인이시지 않습니까. 응당 그에 따른 예의를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두 부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두 사람의 배분이 높다고 하나 지킬 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짧게 볼 사이라면 막 대해도 상관이 없지만 둘은 그럴 수가 없었다.
태상문주야 삼 년 뒤, 오 년 뒤를 장담할 수 없지만 현 문주인 태정문주는 달랐기에 선을 명확하게 그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저희는 속가장문인이신 무상문주님을 뵈러 온 것이기도 하고요.”
“우선 앉으시죠.”
인사가 생각보다 길어졌기에 반호진은 뒤늦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고맙네.”
“반가운 차향이군요. 잘 마시겠습니다.”
향기만으로 어디서 재배된 차인지 알아차린 태정문주가 빙긋 웃었다.
같은 종의 차일지라도 어느 지역에서 재배됐는지에 따라 향과 맛이 미묘하게 달랐다.
그래서 그는 단박에 숭산에서 자란 찻잎임을 알아봤다.
“별말씀을.”
반호진 정도쯤 되면 귀한 차들도 진상 받을 터였다.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 내어준 차는 결코 상등품이라 할 수 없었으나 태정문주나 태상문주는 그 부분에 대해서 전혀 서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구려.”
“원하신다면 조금 드리겠습니다.”
“준다면야 고맙게 받겠네.”
차의 맛도 맛이지만 소림사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향취가 이곳에는 있었다.
분명 사찰이 아닌데도 소림사의 향기가 난다고나 할까.
어쩌면 뿌리가 같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양은 넉넉히 있어서요. 대사형께서 보내 주시는 것도 있고, 여기서 직접 재배도 하고요.”
“안 그래도 우리 역시 가져왔다네. 본문에서 직접 키운 녀석들이지.”
“선물입니다.”
태상문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정문주가 미리 챙겨 온 자그마한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장정 품에 폭 안길 정도의 크기였는데 말린 찻잎을 생각하면 상당한 양이었다.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으나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방문객으로서 선물을 준비하는 건 일종의 관례나 마찬가지기에 거절하지 않고 담담히 받았다.
과한 선물도 아니었기에 부담도 없었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먼.”
“이따가 바로 마셔 보겠습니다.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차는 좋아하는지라.”
“소림사에서 수행을 하면 차를 싫어하기가 어렵지. 다른 의미로 술을 더욱더 좋아하는 경우도 있네만.”
과거가 떠오르는 모양인지 태상문주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이제는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었기에 태상문주의 표정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후르릅.
얼굴 위로 희로애락이 떠오르는 걸 보며 반호진은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그런 반호진의 배려를 알아차렸는지 태정문주가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안하네. 객으로 와서 추태를 부려서.”
“괜찮습니다. 저에게는 익숙한 일이기도 하고요.”
“방장께서는 어떠신가? 최근에는 몸이 좋지 않아 숭산을 가지 못해서 말일세.”
반호진의 시선이 태상문주에게로 향했다.
분명 담현과 비슷한 또래일 텐데도 태상문주의 건강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체격과 근육을 떠나서 혈색이 안 좋아 보였다.
“아직 정정하십니다.”
“여전하신 모양이야.”
“개인적으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맞네. 방장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 말일세.”
태상문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림사가 태산북두라 불리는 것처럼 담현은 현재 백도무림의 정신적인 지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담현의 건강은 생각보다 무림정세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동의합니다.”
“바쁜 사람의 사람을 더 이상 뺏는 건 예의가 아니니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까 하네. 문주도 짐작하겠지만 우리 둘은 청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왔다네.”
“편히 말씀하시죠.”
태상문주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반호진을 찬찬히 살펴봤다.
호의적이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같은 속가문파라고 해서 무조건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겠다는 기색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지금 표국들과 금가장, 하오문이 받고 있는 훈련 말일세. 우리도 혹시 받을 수 있겠는가?”
“똑같은 훈련과정으로 말입니까?”
“그렇다네.”
태상문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눈앞에 있는 반호진의 성격이 직설적인 만큼 굳이 에둘러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괜히 돌려 말했다가 반감을 살 수 있기에 태상문주는 솔직하게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안 되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라 이상해서요. 태정문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반호진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속가문파라면 이해가 갈 텐데 태정문이 이러는 게 반호진은 의아했다.
“보다 빠른 길이 있다면 그걸 선택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비용적인 문제가 있으니까요. 현실적인 문제를 빼놓을 수도 없고요.”
“좀 더 멀리 보고자 함이네. 또 시기의 중요성도 있고. 문주도 알지 않나. 이십 대 때 절정에 오르는 것과 삼십 대 때 오르는 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다르긴 하지요.”
반호진은 순순히 인정했다.
가능성 자체가 다르다는 걸 그 역시 잘 알아서였다.
아무리 고수들의 노화가 늦게 진행된다고 해도 이십 대의 몸과 삼십 대의 육체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가급적이면 이른 나이에 절정에 오르는 게 유리했다.
“그래서 혹시 우리도 가능한가 싶어 문주를 찾아온 것이라네.”
“안 될 건 없지요.”
“정말인가?”
태상문주는 물론이고 잠자코 반호진과 부친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정문주도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에 부정적인 소문이 많았기에 사실 둘은 가능성이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운이 좋아야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말자고 말이다.
그런데 반호진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자 두 사람 다 동시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귀를 쫑긋거리면서 말이다.
“예. 차별하는 것만큼 치사한 거는 없으니까요. 태정문은 남이 아니기도 하고.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그, 그게 무엇인가?”
태상문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나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근데 그건 태정문주 역시 마찬가지인지 얼굴이 한순간에 경직되었다.
“당장은 힘듭니다. 현재 인원이 꽤 많아서요. 지금도 간당간당하게 감당하고 있는 수준이라.”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우리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네.”
“더해서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 일을 반드시 진행시킬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한 번 더 고민해 보셨으면 합니다.”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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