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0장. 서서히 다가오는. -01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으나 유호량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반호진의 말이 정론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나 반호진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결국 절정의 벽을 넘는 건 본인 스스로 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 절대 해 줄 수 없는 게 절정이라는 경지였기에 유호량은 무거운 눈빛으로 환희에 찬 이들과 질투심을 애써 숨기는 이들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간절함이라.”
“깨달음은 각기 다르지만 그 저변에는 모두 간절함을 가지고 있죠. 절정에 오르고 싶다. 벽을 부수고 싶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이 있더라도 간절함이 없다면, 노력하지 않는다면 벽을 넘을 수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유호량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장 그만 하더라도 절정에 오를 때 마음고생을 엄청 했었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정체기에 좌절도 많이 했고.
그러나 그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절정에 오르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그저 그런 무인이 아닌, 한 명의 진짜 무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소위 말하는 수재들에 비해 늦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절정고수가 되었다.
“간절함이 크다면 절정의 벽을 넘을 것이고, 부족하다면 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간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것이기도 하고요.”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런 경험은 흔하게 겪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애초에 유호량 역시 이백 명 전원이 절정의 벽을 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계를 넘어서는 게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님을 잘 알아서였다.
게다가 동문도 아니었기에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했다.
그러나 반호진의 말처럼 이번에 벽을 넘지는 못하더라도 이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절정에 닿을 터였다.
‘끝끝내 문턱에도 닿지 못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유호량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어쩌면 백구십구 명은 성공하고 한 명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정신적인 충격이 어마어마할 터였다.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지금은 한 명이라도 더 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우는 것만 생각해야 해.’
유호량은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 하는 건 맞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반호진의 말대로 이제 막 물꼬가 트인 상황이었기에 당장은 벽을 넘는 이들을 늘리는 데 최대한 집중해야 했다.
“나, 나도 넘었다!”
“수강(手罡)이다!”
“크하하핫! 이게 바로 도강(刀罡)이다!”
경쟁심리 때문인지 여기저기에서 강기 특유의 찬란한 빛이 솟구쳤다.
하나둘 검기성강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에서 유호량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표사들과 금가장, 하오문의 무인들이 은연중에 서로를 견제하는 게 눈에 잡혔다.
“허어.”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경쟁심을 숨기지 않는 모습에 유호량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이것 또한 반호진이 그린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세 곳의 무인들을 받아들였다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 그건 착각이었다.
애초부터 반호진은 이런 판을 짠 것이었다.
스윽.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유호량은 자기도 모르게 반호진을 바라봤다.
지금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반호진은 그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유호량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문주님!”
“감사합니다!”
유호량에 경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비천대원들이 반호진에게 우르르 달려왔다.
기쁨과 환희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어찌 보면 반호진이 비천대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어서 그런지 다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스승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달려와 반호진을 둘러쌌다.
“모두 문주님 덕분입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같이 울컥한 얼굴로 비천대원들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반호진이 아니었다면 비천대도 없었고, 그들도 없었다.
과거 반호진이 선의로 하오문에 판매한 무공비급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들이 있을 수 있었다.
때문에 절정고수가 된 비천대원들은 존경심과 고마운 마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제 덕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결국 벽을 넘은 건 여러분입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넘은 것이죠. 그러니 감사 인사는 이 정도만 받겠습니다.”
반호진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고마운 마음은 알겠으나 자꾸 이러면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었기에 반호진은 분명하게 말했다.
이 이상은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것이니까요.”
“맞습니다. 문주님께서 선의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희는 없었을 테니까요.”
“본문도요.”
“그렇기에 절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천대원들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반호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았으나 그럼에도 표현하고 싶었다.
절정에 오른 후 가장 먼저 떠오른 이가 반호진이기도 했고.
그들에게 반호진은 은인이자 귀인이었다.
“다음 사람들도 있다는 걸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반호진은 단호했다.
초장에 기준을 잡아 놓아야 이 이후가 편해져서였다.
“저기…….”
그런데 문제는 고마워하는 이들이 하오문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금가장의 무사들 역시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는 듯이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뒤이어 표사들도 슬금슬금 걸어왔다.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천하제일인이 할 수 있는 반호진과의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고 싶어서였다.
거기에 따로 상관에게 지시를 받은 게 있기에 다들 반호진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저도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문주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죽기 직전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곳곳에서 감사 인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혹여나 반호진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어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저쪽으로 가죠. 다른 분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나지막하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파고들었다.
반호진이 내공을 담아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무장에서 각자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 모여든 이들에게만 전해졌다.
“아, 예!”
“알겠습니다!”
절정고수가 된 이들이 우수수 쏟아졌지만 비율로 따지면 아직 소수였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벽을 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주위로 모여든 이들을 데리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저희들에게요?”
“예.”
“모두요?”
반문한 표사 한 명이 금가장과 하오문의 무사들을 힐끔거렸다.
모두에게 똑같이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의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하오문과 금가장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적한 바를 이루었으니 이제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모두의 동공이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같은 소속끼리 눈을 맞췄다.
말 대신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양인지 다양한 감정들이 눈동자와 표정에 떠올랐다.
“저기, 꼭 가야 하나요?”
“이곳에서 좀 더 수련을 하면 안 될까요?”
“허락해 주신다면 조금 더 머물고 싶습니다, 문주님.”
은근히 경쟁하던 세 곳의 무인들이 지금은 뜻을 모았다.
다들 절정의 벽을 넘었음에도 떠나기보다는 머무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이번에는 반호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절정의 경지에 올랐으나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맞습니다. 문주님께 좀 더 배우고 싶습니다.”
“나가라고 하시면 나가야겠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조금 더 머물고 싶습니다.”
반호진의 눈치를 살피며 세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절정고수가 되어서 행복하고 기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말이다.
게다가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반호진에게서 조언을 받을 수 있을지 몰랐기에 다들 최대한 머물고 싶었다.
“저야 상관은 없습니다만.”
“동료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서로 자극도 될 테고요.”
이제 막 절정고수가 되었을 뿐 갈 길이 구만리였다.
게다가 강기가 불안정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심기체가 흔들린다는 걸 뜻했기에 주화입마를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더더욱 반호진이라는 존재가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만약 주화입마에 빠지더라도 반호진이 있다면 최악의 상황만은 면할 수 있어서였다.
“부탁드립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문주님!”
“흐음.”
포위하듯 반호진을 둘러싼 이들이 다시 한번 허리를 깊게 숙였다.
따로 상의를 하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는 듯이 간절한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반호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말을 아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꿀꺽.
그러자 다들 애가 타는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계약적인 부분에서 칼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거절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걸 다들 알고 있었기에 마른침을 삼키며 반호진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게 하시죠. 아직 계약한 기간이 남아 있기도 하고. 물론 복귀하고 싶은 분들은 언제라도 떠나시면 됩니다. 저에게 따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두 살 아이도 아니고 다들 직책이 있으신 분들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격렬하게 기뻐하는 모습에 반호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싶어서였다.
물론 왜 남으려고 하는지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은 객관적으로 희박했다.
‘뭐,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니까.’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중요한 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주 희박한 확률에 자신이 걸릴 수도 있기에 미연에 방지해서 나쁠 건 없었다.
반호진도 그 생각에 동의했고.
게다가 절정고수에 오른 이들이 떠나지 않으면 확실히 남은 이들에게 자극이 될 터였다.
‘반 이상만 벽을 넘었으면 좋겠네.’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결과라는 게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기에 반호진은 욕심을 버렸다.
과한 욕심이 가뜩이나 초조한 이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응원은 하되 부담을 주지 않는 것.
그걸 반호진은 다시 한번 속으로 곱씹었다.
촤라락.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꽃향기가 훅 들어왔다.
봄 내음이 어느새 사방에서 물씬 풍겨 오는 것이었다.
산뜻하고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반호진은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펼쳤다.
선우세가의 직인이 찍힌 서찰이었는데, 바로 선우방이 보낸 것이었다.
“짜식.”
명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선우방의 성격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정갈한 필체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글씨를 볼 때마다 선우방이 절로 떠올라서였다.
잠시 필체를 내려다보던 반호진은 이내 내용에 집중했다.
“호오.”
간단하게 결혼생활에 대해서 설명하던 선우방은 이내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적어 놓았다.
무상문에서는 개인의 수련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가정과 가문의 대소사에 집중하는 듯했다.
선우방의 소가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고나 할까.
본가에서도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사는 듯했다.
“전생에서도 알아서 잘하던 녀석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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