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9장. 더 넓게, 더 크게. -03
“이럴 때 보면 형님이 자신에게 성을 주었다는 걸 아는 것 같아요. 다른 아가들도 그렇고.”
“그런 걸 알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을까?”
서조운의 말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말도 트지 못했는데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서였다.
“이상하게 형님한테 안겨서는 울지 않으니까요.”
“나도 그게 신기하기는 해. 내가 딱히 잘해 준 건 없는데 말이지.”
반호진이 조심스럽게 반선희를 안아들었다.
부모를 알지 못하니 이름은 물론이고 자신의 성까지 주었다.
혹여나 나중에 성이 없어서 차별을 받지는 않을까 싶어 그의 성을 준 것이었다.
“왜 해 주신 게 없습니까. 선희나 다른 아가들 입장에서 형님은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데요.”
“맞아요.”
서조운의 말에 모용희수가 동의했다.
짐승도 자신을 살려 준 이는 알았다.
그렇듯 미물도 구명지은을 아는데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
“생명의 은인이라.”
“에헤헤.”
“후후.”
말을 곱씹던 반호진이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세상 무구한 아기의 미소에 저절로 감화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반호진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서조운과 모용희수는 물론이고 모용척과 정이륭, 사마의성을 비롯해서 예유화와 곽춘 등등도 활짝 웃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대신 수많은 오빠 동생이 생겼으니까요.”
“엄마는 몰라도 아빠는 생겼죠. 오빠의 성을 물려받았으니까요.”
“아,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모용희수의 말에 서조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어서였다.
더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엄마가 반드시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고.
‘엄마보다 잘해 줄 사람들이 많으니까. 엄마는 없지만 이모, 숙부, 언니, 오빠들이 수두룩하니.’
서조운의 실소를 흘렸다.
숙부라는 호칭이 생소해서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했다.
조만간 큰형의 아이도 태어날 예정이었으니까.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하루하루를 죽어 가는 심정으로 살았던 날들을 떠올리며 서조운이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나 행복했다.
불가에서 말하는 극락이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더더욱 지켜야 해. 이 평화가 오래갈 수 있도록.’
서조운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설렁설렁하게,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의미를 그도 이제는 알았다.
반호진이 말한 꿈이 얼마나 원대한지 말이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으잉?”
서조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품에 아기를 안은 예유화가 대뜸 다가와서였다.
그의 얼굴에 아기를 들이밀자 서조운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무슨 생각 하세요?”
“어, 그냥 이런저런? 곧 조카가 태어나기도 하고.”
“아들이래요, 딸이래요?”
“그건 안 물어봤어. 나야 뭐,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상관없기도 하고.”
“그게 뭐예요. 무심하게. 그래도 가족이고 친조카인데.”
예유화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친조카인데 너무 무심한 것 같아서였다.
심지어 이번에 태어나는 조카는 첫 번째였기에 예유화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너무 혈연에 연연하는 것도 좋지 않아. 안 그래?”
“우히히히!”
“그래그래. 역시 너는 내 편이구나.”
활짝 웃으며 양팔을 크게 흔드는 아기의 모습에 서조운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반면에 예유화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희들도 고생이 많다. 아기들을 돌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아기들 돌보는 건 익숙한걸요!”
여전히 반선희를 안고 있던 반호진이 서조운과 예유화를 일별하며 곽춘과 한륭, 황동오, 봉구 등과 차례대로 시선을 마주했다.
공치사는 미루는 것보다 그때그때 해 주는 게 가장 좋았기에 반호진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칭찬했다.
“익숙하다고 해서 몸이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너희들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도 있는데.”
“진짜 괜찮아요. 혼자서만 돌봐야 하면 못 하겠지만 다 함께 하니까요. 돌아가면서 돌보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아요. 그리고 왠지 저희 같기도 하고요. 버려진 심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곽춘은 물론이고 아이들 모두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가 똑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다들 쉽게 친해진 걸지도 몰랐다.
“너희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너희들이 먼저 손을 놓지 않으면 내가 먼저 손을 놓는 일은 없을 거야.”
“무, 문주님.”
“그러니 아픔은 간직하되 거기에 너무 매몰되지는 마. 과거는 지우거나 잊을 수 없지만 흘려보낼 수는 있으니까. 아, 너무 어려운 말을 했나?”
반호진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난해한 말을 한 것 같아서였다.
“아니에요!”
“이해했습니다.”
“그래?”
아이들을 과소평가한 모양인지 곽춘과 봉구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느 아이들과 달리 조숙한 편이라 얼추 이해한 듯싶었다.
“예!”
“결국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니까요. 선희를 비롯해서 다른 아기들도 마찬가지고요. 오히려 저희들보다 상황이 훨씬 낫죠. 적어도 눈칫밥을 먹지는 않을 테니까요.”
“고생도 덜 하고 말이지.”
“맞아. 그게 크지. 일단 굶주리지는 않을 테니까. 난 지금도 제일 무서운 게 배고픈 거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봉구의 한마디에 곽춘은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도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지금은 식사를 풍족하게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굶는 게 일상이었다.
당장 남창의 빈민가만 하더라도 굶주리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인정.”
“나는 맞는 거. 잘못하거나 실수한 게 없는데도 나한테 화풀이를 하니까. 그럴 땐 진짜 억울해.”
“맞아. 부모가 있는 아이들한테는 안 그러고. 이것도 명백히 차별이야.”
“내 말이.”
그동안 겪은 불합리한 것들을 아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한데 가만히 듣고 보면 어째 겪은 것들이 다들 비슷했다.
마치 똑같은 사람에게 당한 것처럼 말이다.
“…….”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모용희수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만 들어도 얼마나 끔찍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모용희수는 슬픈 눈으로 아이들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 눈빛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쳐다보는 게 아이들에게 더욱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스윽.
한편 반호진은 모용척과 정이륭을 지나 서조운을 바라봤다.
그동안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았다는 듯이 셋 모두 꽤나 발전해 있었다.
사마의성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은데도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은 듯했다.
“참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곤히 자지?”
“그러게.”
어느새 다가온 서조운 반호진의 품에서 곤히 자고 있는 반선희를 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반호진이 안고 있으면 아기들이 울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황매향이나 다른 여인들처럼 자주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씩 보면 보통은 낯을 가리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반호진에게 낯가리는 아기들은 없었다.
“척이 형한테 안기면 무조건 울던데.”
“나를 왜 걸고넘어져?”
“사실이잖아요. 이륭이 형은 반반이고.”
“척이보다는 낫지.”
모용척이 인상을 팍 썼다.
반면에 정이륭은 씨익 웃었다.
적어도 호감도에서는 자신이 모용척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어서였다.
“애들이 아직 어려서 그래. 조금만 더 크면 달라질걸.”
“너무 정신승리하려는 발언 아닌가요?”
“뭐야?”
“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잠든 아기들도 있으니까요.”
“끄응!”
모용척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자기중심적인 그라도 갓난아기들 앞에서 제멋대로 할 정도로 후안무치하지는 않았다.
이건 아주 기본적인 것이었기에 모용척은 불만은 있어도 더 이상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죄가 있어도 서조운에게 있었지 아기들에게는 죄가 없었기에 모용척은 분노를 속으로 삭였다.
찌릿!
대신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서조운을 노려봤다.
하지만 살벌한 모용척의 눈빛에도 서조운은 겁먹지 않고 더욱더 능글맞게 웃었다.
‘다들 쑥쑥 크고 있네.’
티격태격대는 둘의 모습에 반호진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전과 비교하면 크게 신경을 못 써 주고 있음에도 다들 알아서 잘 성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예유화와 백휘경, 백휘성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 덕분인지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아주 좋아.’
사건사고 없이 무탈하게 이어지는 평화로운 하루하루에 반호진은 만족했다.
이런 삶이야말로 그가 꿈꾸던 일상이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행복했다.
***
봄이 오는 걸 알리듯 연무장 곳곳에 꽃들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다.
아직 활짝 피지는 않았으나 곧 만개할 듯했다.
“아아!”
그때 연무장의 한쪽에서 홀로 권무(拳舞)를 추던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 감격한 얼굴로 탄성을 터트렸다.
그토록 고대하고 고대하던 권기성강을 이루어서였다.
이제 막 절정에 발을 디뎠기에 주먹은커녕 손등에 겨우 권강을 만든 게 전부였으나 그럼에도 중년인은 더없이 기뻤다.
비록 불안정한 상태이지만 중요한 건 강기를 이루었다는 것이었다.
“우와……!”
“부럽다. 그나저나 처음이지?”
“우리 기수에서는 처음이지. 근데 저 사람이 먼저 절정의 벽을 넘을 줄은 몰랐는데.”
“역시 청림표국이라고 해야 하나.”
“예끼! 그런 말 말게! 문주님과 유 교관님이 차별하는 거 봤나?”
권강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몇몇 이들이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말에 근처에 있던 표사들이 버럭 화를 냈다.
지금 중얼거린 말들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해서였다.
자칫 잘못하면 연대책임을 질 수도 있었기에 표사들은 혹여나 다른 이들이 들었을까 싶어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웅웅웅!
“나, 나도 성공했다!”
청림표국의 표사가 시작을 끊자 하오문에서도 벽을 넘은 자가 나왔다.
표사와 비슷하게 불안정한 검강을 피워 올린 것이었다.
검신을 감싼 검강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일렁였지만 비천대원은 그마저도 감격스러웠다.
하류인생을 전전하던 자신이 일류무사를 넘어 절정고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크윽!”
“축하한다!”
“우리도 곧 따라가마!”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가가 촉촉해진 비천대원의 주위로 친구라 할 수 있는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친구가 절정고수가 되자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모두가 눈을 빛냈다.
친구가 벽을 넘었으니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나왔다!”
“우와아아!”
뒤이어 금가장의 무인들에게서도 환호성이 나왔다.
세 번째 절정고수가 금가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근소한 차이였기에 금가장의 무사들은 크게 함성을 내지르며 동료를 축하했다.
“드디어 벽을 넘은 이가 나왔네요.”
끊이지 않는 환호성을 들으며 유호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한 번 성공했다고 하지만 그땐 그가 없었었다.
또 인원도 저번과 비교하면 일곱 배 가까이 많았기에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세 명이 벽을 넘자 유호량은 이제야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물꼬가 트였으니 곧 우수수 나올 겁니다. 지난번에도 그랬거든요. 한 명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 명만 나오면 추격하려는 마음 때문인지 연달아 벽을 넘더라고요.”
“얼마나 넘을 수 있을까요?”
유호량이 반호진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도감을 숨기지 못하는 그와 달리 반호진은 늘 그렇듯이 여유로웠다.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유호량은 궁금했다.
“글쎄요. 얼마나 간절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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