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9장. 더 넓게, 더 크게. -02
정추연이 따라 준 차를 마시던 반호진이 갑자기 기침을 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사레가 들린 것이었다.
“어머. 그게 그렇게 놀랄 말이었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긴.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말이지. 희주는 일이 많아서 금방 갔지만 그래도 딱 보면 알아. 여자는 여자가 잘 보거든. 그런 의미에서 희주는 진짜 괜찮은 아이야. 미색도 두말할 필요가 없지.”
“셋 다 일단은 동생들입니다.”
사레를 수습한 반호진이 정색하며 말했다.
정추연의 기대를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당장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일단은? 그럼 나중에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네?”
“남녀사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섣부른 장담은 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는 하지. 매일 싸우던 녀석들이 어느 날 갑자기 혼인하겠다고 하기도 하니까. 또 오래 만난 연인이 뜬금없이 헤어져서 각자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도 하고.”
“아직 다들 젊지 않습니까.”
후르릅.
반호진이 차분한 신색으로 다시 차를 들이켰다.
이번에는 절대 사레에 걸리지 않으려는 듯이 천천히 마셨다.
“그런데 말이야. 난 누구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아들은 세 명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지. 그 말은 아들도 셋의 마음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네?”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요?”
짐짓 예리하게 바라보며 묻는 정추연의 시선을 마주 보며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놓고 티를 내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모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흐음. 곰 같은데 의외로 여우란 말이지. 그래서 누가 가장 앞서 있어? 엄마로서 이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지 않아?”
“엄마는 누가 가장 마음에 드는데요?”
“셋 다 좋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사실 여전히 믿기지 않기도 하고. 세 명 다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아이들이 아니잖니? 저런 아이들 진짜 없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추연의 극찬에 반호진도 동의했다.
그가 보기에도 세 사람 같은 여자는 없어서였다.
“자, 이제 아들 차례야. 누구야?”
“글쎄요.”
“어쭈?”
정추연이 도끼눈을 떴다.
자신의 대답만 쏙 듣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하자 그녀가 매서운 눈으로 반호진을 노려봤다.
하지만 반호진도 만만치 않았다.
따가운 눈총에도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새치름한 표정으로 정추연이 반호진을 흘겨봤다.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것임을 알아차려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어찌어찌 대답은 하겠지만 만족스러운 내용은 없을 것이기에 정추연은 표정을 풀었다.
“너무 좋았어. 상상 이상이라 많이 놀라기도 했고.”
“남창 구석의 작은 무관을 예상했죠?”
“응. 네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한창 소림사에서 무공을 연마해야 하는 나이인데 일문을 개파했다고 하니 믿기지가 않을 수밖에.”
“이해해요.”
반호진은 곧바로 수긍했다.
상식적으로 정추연의 생각이 맞아서였다.
“그런데 이렇게나 크고 번듯하게 운영하고 있을 줄이야. 표국들이랑 금가장에서 너에게 훈련을 받으러 찾아오기까지 하고. 정말 놀랐어. 대견하기도 하고. 혼자 알아서 큰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뭐가 미안해요.”
“너는 몰라. 부모의 마음을. 네가 자식을 낳아 봐야 지금의 내 감정을 이해할 거야.”
“얼추 알 거 같은데요.”
“그럴 리가.”
정추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이해심이 깊다고 해도 자식을 낳지 않은 이가 부모의 마음을 아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말을 조금 바꾸죠. 엄마의 마음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안다고요. 저 역시 부모님과 형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기도 하고. 생신도 제대로 챙겨 드린 적이 없으니까요.”
“우린 뭐 챙겨 줬나. 그리고 이유도 똑같지.”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걸로 하죠. 이곳에 오시고 싶으면 언제라도 마음 편히 오세요. 농사일은 형들도 있고, 손이 부족하면 사람을 써도 되니까요. 막내아들이 그 정도 능력은 있어요.”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반호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추연이 이곳에서의 생활을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늘 기뻐하고 행복해했기에 반호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었다.
오랜만에 정추연이 직접 만들어 주는 음식도 먹어서 즐거웠고.
“알지. 우리 막내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렇지만 사람마다 천직이라는 게 있잖아. 그게 우리는 농사야. 우리 집안일을 남에게 맡기는 것도 조금 그렇고. 대신 다음에는 아빠와 같이 찾아올게.”
“미리 연락해 주시면 제가 데리러 가거나 사람을 보낼게요. 꼭 연락 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엇갈릴 수가 있어서요.”
“왜? 또 바빠질 것 같아?”
“제가 나름 속가장문인이라 신경 쓸 게 많거든요.”
정추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말은 처음이었기에 놀란 것이었다.
특히 속가장문인이라는 다섯 글자가 그녀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소, 속가장문인? 호진이 네가? 소림사의?”
“예. 제가 나이는 좀 어려도 배분은 대사형과 같으니까요. 사부님의 둘째제자이기도 하고.”
“어머머.”
“자격은 충분하죠. 그리고 속가장문인이라는 직위는 제가 원해서 받은 게 아니에요. 별생각 없는 저에게 사부님이 떠넘긴 거라.”
정추연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기에 그녀는 입을 쩍 벌렸다.
“우리 아들이 속가장문인이라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신분은 아니에요. 소림사의 속가제자들을 대표하는 자리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게 왜 대단하지 않아. 속가제자들의 대표인데. 소림사에서 유일한 신분 아니야.”
“그렇기는 하죠.”
“겸손해야 해. 교만하지 않고, 자만하지 말고.”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정추연은 혹시 몰라 한마디를 했다.
이런 말은 수없이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동시에 뿌듯하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두 형들과는 신분적인 차이가 너무 극심했기에 정추연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형들이 걱정되세요?”
“독심술이라도 익혔니?”
“그건 익히고 싶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은 표정 보고 알았고요.”
“난 독심술을 익힌 줄 알았어. 검신이라 불리는 사람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에요.”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서였다.
“역시 그런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할게요. 미래의 제 부인도 잘할 테고요.”
“너희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문제지. 막내가 잘나도 너무 잘났으니까.”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서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적당히 차이가 나야지, 격차가 너무 컸기에 정추연으로서는 자연스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가 없는 집안이 어디 있어요. 명문세가도 문제가 많아요. 후계다툼부터 시작해서. 그런 것들에 비하면 저희는 오히려 사소한 거죠.”
“……그 말을 들으니까 또 그러네?”
“화목한 가정이 드무니까 화목함을 중시하는 겁니다.”
정추연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색다른 견해인데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가정이 화목했다면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은 애초에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허어.”
“그러니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순리에 맡기죠. 또 너무 앞서가기도 했고요.”
“진짜 그러네.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막내아들을 앞에 두고.”
정추연이 실소를 흘렸다.
며느릿감들이 있다고 자신이 너무 앞서 생각한 것 같아서였다.
정작 혼인을 약속한 이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걱정은 없잖아요. 형들은 장가를 가네 마네 하는데 저는 일단 며느릿감은 있으니까요.”
“아주 그냥 엄마를 쥐락펴락하네. 다 컸다 이거지?”
“걱정시키지 않고 잘살고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누구 말대로 입심은 진짜 좋네.”
정추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득 들은 말이 떠올라서였다.
“구공(口功)도 무인에게 있어 꽤나 중요하거든요.”
“말 잘해서 나쁠 건 없지. 어쨌든 이번에 와서 너무너무 좋았어. 남 같은 남편과 말을 더럽게 안 듣는 아들들이 없어서. 거기다 예비 며느리들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며느리‘들’이라니요.”
반호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여러 명을 거론하는 게 그는 어이가 없었다.
“왜? 부인을 꼭 한 명만 둬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네가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사랑해서 혼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변의 상황, 예를 들면 평화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어. 꼭 여자를 밝혀서만 삼처사첩을 두는 게 아니란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엄마.”
“근데 나는 이런 것들보다 막내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게 더 자랑스러워. 특히 갓난아기들을 포기하지 않은 게.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른 생명을 거둔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거든. 단순히 거두는 걸 넘어 다 자랄 때까지 책임을 진다는 거니까.”
언제 장난을 쳤냐는 듯이 정추연이 반호진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검객의 손이라는 걸 알려 주듯 손바닥은 물론이고 손등과 손가락 사이에도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다.
그런 반호진의 양손을 정추연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른으로서 당연히 할 도리를 한 것뿐이에요. 여유가 있기에 내린 결정이기도 하고요.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거예요.”
“너에게 여력이 없었다면 아기의 부모들이 애초에 찾아오지 않았겠지?”
정추연이 빙그레 웃었다.
막내아들의 가정은 쓸데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네요.”
“원래 사람은 비빌 구석이 있는 곳에 몸을 비비기 마련이거든. 그리고 그 말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너에 대한 신뢰가 깊다는 뜻이기도 하고. 생명을 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변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했으면 좋겠다. 덕을 쌓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알았어요.”
“힘들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시간이 나면 가끔씩이라도 본가에 와 주면 더 좋고.”
농담에 진담을 담아 정추연이 말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아지가 태어나면 두 마리를 안고 찾아갈게요. 물론 젖을 떼어야겠지만.”
“그 날이 기대되는구나.”
똘똘하던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를 떠올리며 정추연이 활짝 웃었다.
강아지들이 아빠를 닮았다면 애고도 많고 똑똑할 게 분명했기에 그녀는 기대가 되었다.
***
“오구오구! 그렇지! 잘했어!”
서늘했던 바람이 선선해진 걸 느끼며 반호진이 서조운과 아이들을 바라봤다.
아기가 처음으로 뒤집기에 성공하자 다들 기뻐하는 것이었다.
“많이 컸죠?”
“그러게. 하루하루가 다르다고 하더니 진짜 그러네. 주먹만 한 시절이 있었는데.”
“조금 있으면 엄청 기어 다닐 걸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모용희수가 곱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애정 가득한 시선에 반호진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때부터가 육아의 진짜 시작이라고 하던데.”
“아기 성격마다 달라서 장담하기에는 일러요. 그때 가 봐야 아는 거라.”
“너무 힘들게 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우아! 우아!”
반호진의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계속 뒤집기를 하던 아기가 고개를 들어 방긋방긋 웃었다.
마치 안아 달라는 듯이 양손을 뻗는 모습에 서조운이 눈치껏 아기를 안아서 반호진에게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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