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398화 (398/468)

제 129장. 더 넓게, 더 크게. -01

황매향의 앞에 앉으며 반호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전에는 숭산에서 재배한 차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중원 각지에서 선물로 보내오는 차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고급 차들도 상당수 있었다.

“제 입맛에는 늘 마시던 차가 제일 좋더라고요.”

“익숙함의 힘이 강력하기는 하지. 의외로 사람 입맛은 보수적이기도 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거든. 나도 그렇고.”

“그렇지만 문주님께서 직접 우려 주시는 차는 이 세상에서 하나뿐이니까요.”

“이제는 총관이 되고 싶은 거야? 아부가 많이 늘었는데?”

황매향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서 새삼 깨달았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반호진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사이가 되었음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호진과 맞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부총관이라는 자리도 힘든걸요.”

“약한 소리 하기는. 잘하고 있으면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어. 고마워.”

“아니에요.”

황매향이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아직 고맙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어서였다.

적응만 했을 뿐 유능하단 말을 들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처음 하는 일인데 이 정도면 엄청 잘하는 거지. 불협화음이 전혀 없잖아. 이제는 인원도 제법 되는데. 그게 다 부총관이 알게 모르게 뒤에서 잘해 준 덕분이지. 내가 마음 편히 출타할 수 있는 것도 부총관이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 준 덕분이고. 근데 요즘에는 좀 버거워 보여서 불렀어. 부총관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

“바쁜 건 사실이나 힘든 수준은 아닙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감당할 수 있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도 괜찮을 거란 보장은 없고.”

“그렇다고 사람을 더 뽑으면 나중에 잉여 인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늘 이 정도 인원이 머무는 게 아니니까요. 정 부족하면 외부에서 며칠만 잠시 고용해 오는 방법도 있습니다.”

조곤조곤한 황매향의 대답을 들으며 반호진이 탁자를 두드렸다.

인력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방법도 나쁘지는 않아서였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벌써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일 년이 훌쩍 넘었다.

그렇기에 필요한 인력은 이제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인건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내가 인건비에 허덕일 정도로 능력이 없는 건 아니고. 게다가 인원은 앞으로 계속 늘 거야. 일단 아기들이 늘고 있잖아. 내가 걱정하는 게 그거고. 아무리 문도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남자들이라 한계가 있으니까. 여자보다 아기를 더 잘 돌보는 남자가 있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남자보다는 여인들이 더 아기를 잘 보니까.”

반호진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가뜩이나 적지 않은 업무를 소화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아기를 돌보는 일까지 추가됐다.

많은 이들의 우려대로 무상문 인근에 아기를 버리는 일이 점점 늘고 있었다.

“그래서 저희들끼리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해결책까지는 아니고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는 정도입니다만.”

“말해 봐. 솔직히 나는 힘만 세지 이런 쪽은 잘 모르는 거 알지? 나도 초보야. 그러니까 함께 고민해 보자고.”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황매향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원래부터 존경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황매향은 자신이 선택을 정말 잘했음을 느꼈다.

“시전에 객점이나 어육점(魚肉店)을 여는 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장사를 하겠다고?”

반호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객점과 어육점을 말하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란 반호진과 달리 황매향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예. 목장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는 건 문주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은 다행히 훈련받는 인원이 있어 감당이 되지만 이백 명이 떠나면 상당한 양이 남게 될 겁니다. 그러니 외부에 판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안정적인 수입원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장사를 말씀드린 이유가 두 가지 더 있습니다.”

“쭉쭉 말해.”

두 개나 더 있다는 말에 한 번 더 놀랐으나 반호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다 들은 다음에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말할 계획이었다.

“하나는 인력 수급이 용이하다는 점입니다. 필요할 때 인력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혹은 음식을 만들어서 가져오게 할 수도 있고요. 다른 하나는 일자리 창출입니다. 지금의 아이들이, 문도들이 자라서 다 무인이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그때를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요.”

“맞아. 언젠가는 다 장성해서 독립하겠지. 표사가 되는 이도 있을 테고. 혹은 자신만의 문파를 세울 수도 있겠지.”

반호진이 수긍했다.

무공수련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모두가 고수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심지어 재능을 보고 문도로 받아들인 게 아닌 만큼 무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 아이들도 있을 터였다.

그러므로 황매향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한 번 정도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야. 유비무환이라고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그런 의미에서 부총관은 어육점과 객점 중 어느 쪽이 나을 것 같아?”

“어육점이 상대적으로 운영하기 수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객점은 기본적으로 요리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그 정도 실력자를 굳이 밖으로 돌릴 필요는 없으므로 우선은 어육점부터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나와 생각이 같네.”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굳이 고급 인력을 외부로 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또 객점에는 한 가지 큰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객점을 운영해 본 사람이 현재 무상문에 없다는 점이었다.

객잔에서 점소이로 일해 본 아이들은 제법 있었으나 운영하는 것과 업무는 많이 달랐다.

반면에 장사는 경험 있는 이들이 많았기에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았다.

“그럼 적당한 자리로 알아보겠습니다.”

“급할 건 없으니까 천천히 알아봐도 돼. 당장 시작하려는 게 아니니까.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정 인력이 부족하면 금가장과 하오문에 도움을 청해. 아니다, 내가 말해야겠다.”

“아니에요. 제 선에서 해결할게요. 이 정도는 저도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그게 편하다면야.”

반호진은 반대하지 않았다.

무상문의 부총관이라면 자격은 충분했다.

그리고 성장해야 하는 건 황매향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는 황매향 역시 지금보다 더욱더 성장해야 했기에 반호진은 그녀를 믿었다.

“감사합니다.”

“고마울 것까지야. 근데 벅차다 싶으면 언제라도 말해. 괜히 혼자 감내하지 말고. 이건 명령이야.”

“알겠습니다.”

황매향이 자신감 서린 얼굴로 대답했다.

무상문이 예전의 무상문이 아니듯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소한 일은 황매향의 선에서 얼마든지 가능했다.

천영각이 남창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 가는 중이기도 했고.

“건의 사항 같은 건 없어? 아니면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다든가. 혼자서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도 괜찮고.”

“없습……. 아, 하나 있습니다.”

“뭔데?”

“네. 간혹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상문도를 언제 더 뽑을 건지에 대해서요.”

황매향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사감은 전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남창에서 생활한 지 이제 꽤 되었기에 알게 모르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 텐데도 황매향은 사적인 감정을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다들 관심이 많은 모양이네.”

“현재까지 무상문 소속 중 불만을 가진 이가 아무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타 문파나 무가와 비교하면 만족도가 훨씬 높습니다. 충성도는 두말할 필요가 없고요.”

“그 정도인가?”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금칠을 하는 것 같아서였다.

챙겨 주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엄청 신경 쓰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만족도가 높다는 게 조금 의아했다.

“간단한 예로 나가고 싶어 하는 이가 아직 단 한 명도 없지 않습니까. 파문한 일도 없고요.”

“그거야 개파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렇지. 역사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시간이 짧으니까. 당연히 파문제자가 없을 수밖에 없지.”

“현재까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외부의 인식은 상당히 우호적입니다.”

“뭐, 좋아서 나쁠 건 없지. 근데 따로 추가해서 받을 계획은 없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문도로 들이면 모를까.”

“제자를 들이실 계획도 없으신 거죠?”

황매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 사안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이게 본론이구만?”

“궁금해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당장은 없어. 인연이 닿으면 또 모르지만.”

“알겠습니다.”

황매향은 다시 묻지 않았다.

반호진의 성격을 알기에 더는 물어보지 않은 것이었다.

“아,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 건데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굳이 나에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어. 부총관의 판단하에 결정하고 나중에 보고하면 돼. 알겠지?”

“제……자요?”

“응. 꼭 무인만 제자를 두는 건 아니니까. 화공과 도공 같은 기술을 가진 이들도 제자를 두잖아? 가깝게는 의평각주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봐.”

“네.”

처음의 당혹감은 빠르게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묘한 감정이 차지했다.

그 변화를 반호진은 알아차렸지만 딱히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황매향이 말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그녀가 나가고 꽤 오랫동안 말이다.

사위에 어둠이 내려앉은 야심한 시각에 반호진은 처소를 나섰다.

그러나 멀리 가지는 않았다.

바로 옆방의 문 앞에 서서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똑.

“저예요, 엄마.”

“들어오렴.”

“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정추연의 음성에 반호진은 느릿하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살짝 두꺼운 침의를 입고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정추연의 모습이 보였다.

“이리 앉으렴. 차 한잔 줄까? 아, 너무 많이 마셨으려나?”

“차야 늘 많이 마시지만 엄마가 우려 주는 차는 다르죠. 자주 마실 수 없으니.”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말을 참 예쁘게 하네?”

정추연이 곱게 미소 지었다.

촌부의 아내로 살았기에 눈가에는 풍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반호진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아름다울 미소이기도 했고.

“꼭 예쁘게 말하려고 한 건 아닌데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

“그러니까 더 예쁜 거야. 우리 막내가 잘 자랐다는 뜻이니까. 근데 그래서 좀 아쉽고 섭섭하기도 해.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달라질 거예요. 저도 가급적이면 시간을 낼 생각이고요. 이제는 진짜 급한 일이 사라져서요.”

“문파가 점점 커지는데 가능할까?”

정추연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무상문의 변천사를 보면 여유가 생길 가능성이 그리 커 보이지 않아서였다.

“꼭 제가 다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악덕하네.”

“아랫사람을 막 부리면 악덕문주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아직은 규모를 확 키울 계획도 없고요.”

반호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만은 인정할 수가 없어서였다.

문도들을 엄청 잘 챙긴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막 부려 먹는 건 절대 아니었다.

“농담이야. 아들은 잘하고 있어. 예상보다 더. 근데 궁금한 게 있어. 셋 중에 누구니?”

“컥!”

40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