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장. 느리지만 착실히. -03
사마의성의 시선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차례인 표사를 봐주고 있는 반호진에게로 향했다.
언뜻 보면 무성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원래 감정기복이 적었기에 무신경해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반호진은 알려진 것과 달리 완벽주의자에 가까워서 어떤 일이든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 내가 그걸 잊었네.”
“오빠도 모두 다 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기는 한데, 또 모르지. 이미 전례가 있으니까.”
“절정고수가 늘어나서 나쁠 건 없으니까. 세 곳 다 형님과는 호의적이기도 하고. 나름 자격도 있고.”
서조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질적으로 천사맹, 마도련과의 전쟁에서 힘을 보탠 건 표국계였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금가장과 하오문도 반호진에게 도움을 주었다.
일단 마도련, 천사맹에 합류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정천맹에 큰 도움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맞아. 그걸 다른 사람들도 아니까 별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근데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해. 당장이야 오빠가 있지만 그 후에는 어떻게 될지. 금가장과 하오문 둘 다 잠재력이 대단한 곳이니까. 그래서 백도무림이 경계했던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더욱 노력해야지.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어차피 무림은 약육강식이야. 강하지 못하면 잡아먹히는 세계지. 잡아먹히기 싫으면 강해지면 돼.”
“그렇지.”
냉정하지만 서조운의 말이 사실이었다.
피식자가 되기 싫다면 포식자가 되면 되었다.
먹이사슬 자체가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고.
“고로 우리는 죽어라 노력하면 돼. 너는 사마세가를 일으키고 나는 형님의 가신이 되고.”
“결정한 거야?”
“얼추?”
아직 확정은 아니라는 듯이 서조운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사마의성은 실소를 흘렸다.
진중함이 진짜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냐아옹!
그런 그녀를 달래 주듯 언제 다가온 건지 일흑이가 다리에 머리와 몸을 비볐다.
등잔불이 바람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사마의성의 그림자도 그녀의 복잡한 심사처럼 어지럽게 일렁였다.
똑똑똑.
말없이 찻잔에 담긴 차만 내려다보던 사마의성이 고개를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이었다.
“의성아, 나야.”
“어머니!”
“그래. 들어가도 되겠니?”
“아, 제가 열어 드릴게요!”
사마의성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헐레벌떡 달려가 문을 열었다.
“천천히 해도 돼. 뭐가 그리 급하다고. 아니면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왔나?”
“아니에요. 보통 잠자리는 자정 즈음에 들거든요.”
“너무 늦게 자는 거 아니니? 그렇게 일이 많아?”
사마의성의 안내를 받으며 정추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늦게 자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 말에 사마의성은 반달눈을 하고 웃었다.
“이것저것 할 게 많아서요. 개인적으로 공부할 것도 있고요.”
“그래도 잠은 충분히 자야지. 여자에게 피부가 얼마나 중요한데. 젊음을 맹신해서는 안 돼. 피부와 건강은 어려서부터 관리하는 거야. 나아지는 건 더디지만 망가지는 건 금방이거든. 심지어 나이 먹으면 회복도 느려져.”
“명심할게요.”
사마의성이 대답하며 정추연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런 후 자연스럽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고맙구나.”
“아니에요.”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랐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이요.”
“고민이 좀 있어 보이길래 걱정이 되어서 왔어.”
사마의성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이런 이유로 정추연이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놀란 것이었다.
“표정을 보니 대답을 들은 것 같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내 나이쯤 먹으면 딱 보면 알아. 표정은 숨길 수 있어도 눈빛은 어렵거든. 나이를 많이 먹으면 눈빛을 숨기는 것도 가능한데 의성이는 아직 그 정도 나이는 아니니까. 아, 물론 조운이보다는 나아. 조운이는 워낙에 솔직한 아이니까. 때 묻지 않은 아이라고나 할까. 근데 그게 조운이의 매력이니까.”
정추연은 결코 서조운을 무시하거나 흉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말한 것뿐이었다.
정추연에게 있어 눈앞에 있는 사마의성이나 서조운이나 똑같이 반호진의 동생이었다.
차별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인정해요. 순수하긴 해요. 순진하지는 않지만.”
“너무 착해도 좋지 않아.”
사마의성이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정추연이 빙긋 웃었다.
고민이 있어 보여서 왔지만 그렇다고 그녀는 대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자고로 모든 건 알맞은 시기가 있는 법이었기에 정추연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잡담을 나누었다.
“맞아요. 나름 요즘에 바쁘기도 하고요. 벌인 일이 있어서.”
“유화랑 휘성이, 휘경이 셋 다 착하더라. 불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아팠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화는 착한데 두 녀석은 말썽쟁이예요. 어찌나 사고뭉치들인지.”
사마의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착한 성격에는 동의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많았다.
사내아이들이 원래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건 분명히 문제였다.
그래서 예유화가 뒷수습하느라 매일 고생이었다.
“너무 철이 일찍 들어도 안 좋아. 호진이를 봐.”
“어…….”
순간 사마의성은 말끝을 흐렸다.
당연히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것 보렴.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니.”
“예전에는 몰랐는데 나이가 한 살 두 살 먹어 가면서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는 걸요.”
“맞아. 너무 철이 없어도 문제지. 뭐든지 적당히가 중요해. 이런 걸 어려운 말로 중용이라고 한다면서?”
“네.”
사마의성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정추연이 말했으나 사마의성에게는 큰 울림을 주었다.
그녀의 고민과 묘하게 일맥상통하는 게 있어서였다.
“답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단다.”
“네?”
“너무 멀리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어쩌면 이미 답을 알고 있을 수도 있고.”
“……!”
사마의성의 두 눈이 살짝 흔들렸다.
분명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건만 마치 그녀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정곡을 찌르는 정추연의 한마디에 사마의성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혼란스러울 때는 근원으로 돌아가 봐. 내가 왜 고민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때론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도 괜찮아. 의외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거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더 신경 쓰기도 하고.”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의성이 넌 처녀지만 난 가정을 이룬 사람이야. 이제 막 시작한 너와 달리 나는 이미 끝에 다다라 있지.”
“하하하.”
사마의성이 머쓱하게 웃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제천대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사실 좀 이해가 안 되기도 해. 너나 희주, 희수가 뭐가 아쉬워서 우리 막내아들에게 매달리는지. 무공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그것 말고는 볼 게 없잖니? 인물이 훤하기를 하니 그렇다고 성격이 좋아? 키는 길쭉하니 크기는 한데 그것 말고는 딱히 장점이 없잖아.”
“대신 여기저기 끼를 안 부리잖아요. 그렇다고 여자를 밝히는 것도 아니고요. 막말로 화화공자처럼 살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않고 무공에 매진하잖아요.”
“근면성실하기는 하지. 근데 대신 재미가 없잖아.”
“좋아하는 부분은 각기 다르니까요.”
“호진이가 그 부분을 제대로 가격한 모양이야?”
사마의성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훅 들어오는 한마디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그럼 지금까지 모른 척하신 거예요?”
“당연하지. 나 그렇게 주제넘은 사람이 아니야. 지금 이 자리도 진짜 고민 많이 하고 찾아온 거란다. 내가 괜히 나서는 건 아닐까 하고. 어차피 나는 곧 떠날 사람인데.”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감사한걸요. 저는 부모님이 안 계셔서.”
사마의성이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하늘에 맹세컨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다행이네. 나도 사람인지라 미움받는 건 싫거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의성이에게는 더더욱 싫고.”
“고민이라기보다는 조금 혼란스러워요. 제가 순수하게 오빠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오빠를 이용하려는 건 아닌지. 솔직히 속물적인 생각이긴 한데 오빠의 도움을 받으면 사마세가를 재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아니, 재건을 넘어 멸문하기 전보다 더 강성하게 일구는 것도 가능해요.”
“그 정도니?”
정추연이 두 눈을 껌뻑였다.
다들 말은 반호진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녀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는 정도라고나 할까.
때문에 정추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 지금 오빠의 위상을 생각하면요. 무림 역사상 신(神)이라는 호칭을 받은 무인은 몇 안 돼요. 심지어 호진 오빠의 나이에서는 최초이고요.”
“진짜 대단한 거구나.”
“전무후무라는 네 글자로 표현할 수 있어요.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 거예요. 이걸 잘 아니까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요. 저도 사람인지라 이기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거든요.”
사마의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호감은 분명히 있었다.
좋아하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사랑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겁이 났다.
어중간한 감정 때문에 지금까지 쌓아 온 신뢰가 무너지진 않을까 싶어서.
“똑똑해서 그런가. 되게 깊게 파고드는구나.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하기 힘들 정도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아. 남편은 물론이고 자식들에게도. 근데 말이야. 그게 과연 이기적인 걸까? 다 따져 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가볍게 만나는 거라면 과한 게 맞지만 그럴 생각이 아니니까 이렇게 고민하는 거겠지? 그리고 이용 좀 하면 어때? 능력이 있는데 안 쓰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난 그게 더 미련한 것 같은데.”
“……!”
“호진이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는 것 같은데, 네가 이용하지 않으면 멍청하다고 욕할걸. 어떤 선택을 하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똑같아. 그렇다면 이런 부분들은 제외하고 근본적인 것부터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머리가 맑아졌어요.”
“다행이다. 도움이 되었다니. 나 지금 좀 민망해. 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오호호호.”
정추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조언을 한답시고 쓸데없이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사마의성은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 충분히 되어서였다.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됐어. 자,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른 걸로 넘어가자. 언제까지 어머니라고 부를 거야? 저번에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엄마라고 했잖니.”
“어, 그건요…….”
사마의성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정추연에게는 너무나 깜찍하게 다가왔다.
새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정추연은 사마의성의 손을 붙잡았다.
“왜 그랬는지 알아. 근데 지금은 우리 단둘만 있잖아? 아니면 이제는 부담스럽니?”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때는 난 소저와 모용 소저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알지. 그러니까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엄마라고 불러. 아들만 셋이라서 그런지 굵은 목소리로 부르는 엄마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정추연이 말했다.
그 모습에 사마의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똑.
“문주님.”
“들어와.”
입을 열기 무섭게 안에서 들려오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황매향이 옅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공손한 자세로 업무를 보고 있는 반호진에게 다가갔다.
“앉아. 차는 어떤 걸로 줄까?”
“문주님과 똑같은 걸로 마실게요.”
“이제는 비싼 차도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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