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장. 느리지만 착실히. -01
싫은 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호위무사들의 모습에 정추연이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반호진이 미리 챙겨 준 전낭을 꺼냈다.
뒤늦게 구입한 옷값을 지불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묵직한 전낭을 펼친 정추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금원보?”
“역시 오빠네요. 금원보로 전낭을 꽉꽉 채울 줄이야.”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금광에 화들짝 놀란 정추연과 달리 난희주는 담담했다.
금원보는 그녀도 많이 봐서였다.
반면에 전낭의 실소유주인 정추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금원보는커녕 금자도 본 적이 없기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신 거 같은데요.”
어느새 초점이 사라진 정추연의 모습에 사마의성과 모용희수가 황급히 다가가 손을 하나씩 붙잡았다.
그러자 두 여인의 온기 때문인지 정추연이 금방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그만. 금원보는 난생처음 봐서.”
“그럴 수 있죠. 저도 처음에 봤을 때는 놀랐는걸요. 근데 몇 번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익숙해질까?”
“그럼요.”
사마의성의 말에도 정추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얘는 왜 쓸데없이 금원보를 챙겨 줘서.”
“어머니 기 살려 드리려고 그런 것 같아요.”
“내 기를 살려 줘서 뭐 하려고.”
부드럽게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사마의성과 눈을 마주하며 정추연이 투덜거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짓 같아서였다.
“오빠가 은연중에 부모님께 해 드린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시간을 소림사에서 보냈기에 함께한 시간도 적고요. 그래서 더 잘해 드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되는데.”
정추연의 표정이 처연해졌다.
막내아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싶어서였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지는 알지만 진심으로 그녀는 서운한 게 없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걸 받기도 했고.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 게 부모 마음이듯이 자식도 똑같은 거죠. 효도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아.”
정추연이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 사마의성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서였다.
“저는 괜찮아요. 부모님은 안 계셨지만 대신 할머니한테서 정말 큰 사랑을 받았거든요. 호진 오빠도 만났고요. 사실 지금도 신기하기는 해요. 대체 뭘 보고 무작정 찾아온 저를 받아 준 건지가요.”
“안목이 있는 게지. 근데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아이기는 한데 신기하긴 해. 어찌 그리 신통방통한지.”
“그러니까요.”
사마의성과 대화하면서 정추연은 포목점 주인에게 옷값을 지불했다.
금원보까지 쓸 필요는 없어서 은원보로 계산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포목점을 나섰다.
“확실히 오후가 되니까 사람들이 많아졌네요.”
“지금이 한창 장을 볼 시간이니까. 근데 의성아.”
“네, 어머니.”
“네가 남장한 거 아무도 몰랐니?”
찰싹 달라붙어 있는 난희주, 모용희수와 나란히 걸으며 정추연이 슬쩍 물었다.
정말 아무도 몰랐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였다.
사마의성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감안하면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사마의성의 나이를 생각하면 빈틈이 없을 수가 없기에 정추연은 궁금하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 드러냈다.
“딱 한 명만 눈치챘어요. 처음부터 알았는지, 나중에 알아차린 건지는 저도 모르지만요.”
“누구?”
물어 본 사람은 정추연이었으나 궁금한 기색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난희주와 모용희수도 귀를 쫑긋거리며 사마의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호진 오빠요.”
“정말?”
“네.”
정추연은 물론이고 모용희수와 난희주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어서였다.
내심 동갑내기 친구인 서조운이나 속이 깊은 정이륭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반호진만이 유일하게 간파했다고 하자 세 여인은 입을 쩍 벌렸다.
“우리 아들이 눈치가 그렇게 빠른 편은 아닌데?”
“선택적 빠른 눈치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관심 없는 곳에는 아예 눈치가 없고요.”
“그건 그냥 시치미를 떼는 거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빠가 아니라고 잡아떼니까요. 결국 본인만 알고 있겠죠.”
사마의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도 정추연과 같은 생각이지만 반호진이 잡아떼니 별수 없었다.
“어머니. 이것 한번 드셔 보세요. 이 가게에서 파는 양꼬치가 진짜 별미예요.”
그때 강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정추연의 코를 관통했다.
동시에 모용희수가 그녀의 팔을 잡아서 이끌었다.
정확히 자극적인 냄새가 풍겨 오는 노점상으로 말이다.
그런데 주변의 다른 노점상들과는 달리 유달리 사람이 많았다.
“양고기 꼬치구이?”
“네. 특제 양념을 발라서 주는데 기가 막혀요.”
“냄새는 정말 좋구나.”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허름해 보였으나 냄새는 진짜였다.
배가 불러도 허기를 자극할 것 같은 맛있는 냄새에 정추연은 눈을 반짝였다.
게다가 줄 서서 사 먹는다는 건 그만큼 맛을 보장한다는 뜻이었기에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드셔 보세요, 어머니. 두 분도요.”
“고마워.”
“잘 먹을게요.”
“저도요.”
줄이 있기는 했으나 그리 길지는 않았기에 네 사람은 양고기 꼬치구이를 금방 받을 수 있었다.
모용희수가 값을 지불하는 사이 세 여인은 양고기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머?”
“와.”
“진짜 맛있네요.”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이내 목구멍을 지나가는 양고기에 세 사람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정도로 야들야들한 고기가 천하일품이었다.
이런 저잣거리에서 파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맛있죠?”
“여긴 어떻게 알았니?”
“부총관과 장을 보러 나왔다가 알게 되었어요. 시전에 나올 때마다 줄이 있길래 한번 사서 먹어 봤는데 맛이 기가 막히더라고요.”
“태어나서 이런 양고기는 처음이야.”
정추연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양고기 특유의 향을 부담스럽지 않게 조절하면서 풍미는 극대화시켰기에 그녀는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죠?”
“호위무사분들에게도 사 드리자. 우리 호위하신다고 고생하시는데.”
“제가 살게요.”
“그럴 수는 없지. 이런 건 원래 어른이 사는 거야. 그리고 희수 너도 알잖아. 나 돈 많은 거.”
정추연이 씨익 웃으며 전낭을 꺼냈다.
바로 반호진이 챙겨 준, 금원보와 은원보가 가득한 전낭이었다.
그 모습에 모용희수는 물론이고 난희주와 사마의성도 미소 지었다.
정추연의 허세가 귀엽게 느껴져서였다.
“바로 주문할게요.”
“그래. 근데 이런 가게를 많이 알고 있니?”
“많이는 아니고 몇 군데 알고 있어요.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환하게 웃으며 노점상 주인에게 주문을 하는 모용희수를 보며 정추연은 내심 신기했다.
모자랄 것 없는 명문세가의 여식이, 아니 남자를 골라서 만날 수 있는 모용희수가 반호진에게 일편단심을 보이는 게 그녀는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미모면 미모, 성격이면 성격.
거기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까지 배우고 있었다.
오직 반호진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심지어 그냥 미녀도 아니고 중원무림에서 가장 예쁘다는 세 명 중 한 명인데도 모용희수는 솔직하고 과감하게 마음을 드러냈다.
지금의 선택이 추후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올지 알면서도 말이다.
‘나였으면, 절대 못 했어.’
정추연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몇 번이고 고민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근데 그래서 더 모용희수가 예뻐 보였다.
모든 걸 버리는 게 쉽지 않은데 모용희수는 그렇게 했기에 정추연은 그녀가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다른 두 아이도 마찬가지고.’
일개 촌부의 부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이렇게 살갑게 구는 이유가 반호진 때문이라는 건 정추연도 잘 알았다.
그러나 그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들을 잘 둔 것 같아 뿌듯했다.
비록 그녀가 키우지는 않았으나 직접 낳은 건 사실이었기에 미소가 절로 맺혔다.
‘그나저나 걱정이네. 눈이 너무 높아지면 안 되는데…….’
동시에 정추연은 걱정도 되었다.
사마의성, 모용희수, 난희주 모두 절세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미녀들이었다.
거기다 배경 역시 대단했다.
‘첫째와 둘째의 며느리들과 너무 비교될 텐데.’
소림검신이라 불리며 무림에서 추앙받는 반호진과 달리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평범한 농부였다.
그렇기에 정추연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눈이 높아지는 것도 문제지만 첫째와 둘째 며느리들이 막내 며느리의 눈치를 볼 게 뻔했다.
“어머니?”
“응? 아, 잠깐 다른 것 좀 생각하느라고. 호위무사분들에게 다 드렸니?”
“네. 모두 받았어요.”
“고생했다.”
“다른 곳도 있어요. 거기는 소면이 기가 막혀요.”
모용희수가 정추연의 팔을 이끌었다.
저잣거리에 나온 김에 맛있는 음식을 전부 맛보여 주겠다는 듯이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다음 장소로 안내했다.
“소면은 나도 잘하는데.”
“정말요?”
“응. 호진이도 잘 먹어. 저번에 본가에 왔을 때도 몇 그릇이나 먹었지.”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배울 수 있을까요?”
“희수 네가?”
정추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것이었다.
“네. 이래 봬도 간단한 음식은 할 줄 알아요.”
“아니 귀하게 자란 아이가 어떻게 요리를 할 줄 안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요. 아이도 마찬가지고요.”
모용희수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혼례도 안 올린 처자가 아기 운운하는 게 민망해서였다.
“완전 일등 신붓감이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갔었는데.”
이제는 기억조차 거의 안 나는, 희미한 과거를 회상하며 정추연은 싱긋 웃었다.
싱그러웠던 그 시설이 떠올라서였다.
***
새벽안개가 은은하게 남아 있는 이른 시간임에도 연무장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표사들은 물론이고 하오문과 금가장의 무사들 모두가 집결해 있어서였다.
그런데 묘한 긴장감이 세 무리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모두 모이셨군요.”
“예!”
반호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뒤로 서조운과 사마의성이 보필하듯 따랐다.
“그럼 한 명씩 시작해 볼까요.”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아직까지 절정의 벽을 넘은 사람은 없었다.
훈련에 충실히 임했음에도 성과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반호진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덤덤했다.
“가장자리로 물러나 주십시오.”
반호진이 운을 떼기 무섭게 서조운이 목소리에 내력을 담아 소리쳤다.
현재 연무장에 모인 인원이 이백 명이니만큼 육성만으로는 모두에게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다들 절정을 눈앞에 둔 무인들이었으나 반호진은 등장만으로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기에 서조운은 확실하게 지시를 내렸다.
“예!”
“알겠습니다!”
표사들 중에는 나이가 지긋한 이들도 상당했으나 누구 하나 서조운의 지시에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나이는 한참 어려도 무경이나 명성은 그들이 감히 비벼 볼 수 없는 이가 서조운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군말 없이 연무장의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누구부터 하시겠습니까?”
“저부터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나오시죠.”
“예!”
비장한 얼굴로 청림표국의 표사가 걸어 나왔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는데 표정은 물론이고 걸음걸이에 긴장이 가득했다.
반호진과 비무도 여러 번 했었지만 그럼에도 중년인에게는 어려운 존재가 반호진이었다.
“오늘은 대련하는 자리가 아니니 몸에 힘을 빼셔도 됩니다.”
“일대일 비무를 하는 게 아닙니까?”
“예. 그렇다고 몸을 안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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