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장. 그토록 바라던 평화. -03
조우삼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상문을 위해서라면, 반호진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듯이.
그런데 정작 반호진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더욱 노력해야겠는걸.”
“이미 넘치도록 잘해 주시고 계십니다. 오히려 저희들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요.”
“뭘 갚아. 힘들 땐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거지. 그게 인생이고.”
반호진이 별거 없다는 듯이 말했다.
실제로 그가 겪은 삶이 그러했기도 했고.
치열하게 살았으나 남는 건 후회뿐이었다.
그러니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게 중요했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게 과연 있을까 하고요.”
“충분히 잘 도와주고 있어. 지금 남창 시전을 돌아다니고 계시는 엄마의 호위도 하고 있잖아. 인원이 꽤 많이 차출된 걸로 아는데.”
“문주님의 어머니이시니까요. 전원이 다 나서려는 걸 막느라 힘들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 희주의 호위대도 있고, 희수의 호위무사도 계신데. 솔직히 지금도 많아.”
“저희는 비밀호위도 할 수 있으니까요.”
살방에서 제일 집중적으로 배운 게 바로 은신술이었다.
거기에 반호진이 자신의 깨달음을 추가해 새로운 무공을 창안했기에 수준이 더욱 높아졌다.
그렇다 보니 조우삼의 자신감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내 말은 남창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거지. 멀리 나간 것도 아니고 코앞이나 마찬가지인 저잣거리에 나간 것뿐인데.”
“혹시 모르니까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해는 하는데 엄마와 함께 있는 세 명이 희주와 희수, 의성이야. 모용세가, 하오문, 사마세가가 함께 있다고. 근데 별일이 있을까?”
조우삼을 비롯해서 천영각의 충성심은 고마웠다.
다만 반호진이 말하고 싶은 건 그게 과하다는 것이었다.
정추연 혼자서 나간 거라면 반호진도 천영각에서 꽤 많은 인원을 차출했을 터였다.
하지만 현재 정추연의 곁에는 난희주와 모용희수, 사마의성이 함께 있었기에 굳이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뭐,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미 배는 떠났는데. 모두 잘 즐기다 오면 좋겠네.”
“꼭 그렇게 만들 겁니다.”
“천영각주가 되니까 어때?”
반호진이 낚싯대를 휙휙 휘저으며 슬쩍 물었다.
천영각주가 된 지 이제는 좀 시간이 지났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을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덜렁댔는데 지금은 어찌어찌 제 몫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저하고 똑같습니다.”
조우삼이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좋게 말하려고 해도 잘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다 그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실수도 하고 이런저런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일이 손과 몸에 익어 가는 거지. 초식이랑 똑같아. 몸이 내 뜻대로 안 움직이지. 일머리도 그래.”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아직도 일문을 운영하는 게 어려워. 뭐가 이렇게 결재할 것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은지. 눈치 보고 신경 쓸 것도 많아. 차라리 전쟁이 더 속 편한 것 같아.”
“하하하.”
진심이 담긴 반호진의 말에 조우삼이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냥 시키는 일만 하는 게 얼마나 편했는지 절절히 느껴서였다.
임무를 지시하는 것과 수행하는 것의 괴리감이 의외로 엄청나게 컸다.
“천영각주도 그런 모양이네?”
“너무 공감합니다.”
“근데 어쩔 수 없어. 적응해야 해. 사임은 절대 허락할 수 없어.”
“문주님께서 자를 때까지는 이 자리를 지킬 생각입니다.”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마음에 쏙 드는 대답에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붙잡고만 있던 낚싯대를 슬쩍 움직였다.
무언가를 낚아채듯이 경쾌하게 잡아당겼는데 놀랍게도 미끼 하나 없던 바늘에 큼지막한 물고기가 꿰어 있었다.
미끼 대신에 엄청난 공력으로 대물을 낚은 것이었다.
“월척이네요.”
“엄마가 여기까지 오셨는데 크고 맛있는 걸로 대접해야지. 이왕이면 신선한 걸로. 안 그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기어검도 펼치는 반호진에게 강물 깊숙한 곳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잡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잡지 않았던 것은 굳이 많이 잡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불필요한 살생을 할 이유가 없기에 반호진은 딱 필요한 만큼만, 그것도 새끼가 아닌 다 자란 것들로만 잡아서 따로 챙겨 온 낚싯줄에 대물들의 주둥이를 줄줄이 꿰었다.
“가자.”
“제가 들겠습니다.”
“됐어. 정 귀찮으면 허공섭물을 펼치면 되는데.”
반호진의 말에 조우삼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웬만한 공력으로는 감히 펼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바로 허공섭물이었다.
한데 그런 허공섭물을 반호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조우삼은 헛웃음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천영각주는 장원에 도착하면 엄마에 대해서 알아봐 줘. 잘 구경하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예.”
팔딱거리는 열댓 마리를 한 손에 들고서 반호진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뒤를 조우삼이 묵묵히 따랐다.
정추연은 지금의 상황이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무뚝뚝하고 말수 없는 사내 세 명과 살다가 딸처럼 살갑게 구는 여자 셋과 함께 있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같이 있는 세 명 모두 막내아들인 반호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정추연은 더더욱 기꺼웠다.
물론 둘은 아닌 척하고 있었으나 정추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머니. 이거 한번 입어 보세요. 색감이 아주 예뻐요.”
“아니야. 내가 이런 걸 입을 일이 어디 있다고.”
“왜 없어요? 평소에 입으시면 되죠.”
“논밭에서 일하면 금세 버려. 아까운 돈만 날리는 거지.”
난희주가 내미는 노란색 궁장을 보며 정추연이 고개를 저었다.
곧 다가올 봄에 입기에 딱 좋은 색깔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돈도 돈이지만 집에서는 입을 일이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사 놓고 보기만 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기에 정추연은 아쉬운 표정으로 거절했다.
“오빠가 얼마나 돈이 많은데요. 금가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개인 재산이 상당해요. 무상문 인근의 전답도 다 오빠 거고요. 그러니 이런 궁장은 수십 벌 사도 돼요.”
“아니야. 돈은 아낄 수 있을 때 아껴야 해. 조금 여유롭다고 흥청망청 쓰면 금세 바닥나는 게 돈이야.”
근검절약이 생활화된 정추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반호진이 모아 놓은 재산이 제법 된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막내아들의 돈이었다.
또한 낭비는 한번 시작하면 도중에 멈출 수가 없기에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아야 했다.
“어머니 말씀도 맞아요. 근데 반대로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오빠의 입장에서요. 만약 어머니가 오셨는데 아들이 선물 하나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
정추연의 두 눈이 흔들렸다.
난희주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검소한 것도 좋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반호진의 평판이었다.
그걸 자신이 깎아먹을 수는 없었기에 정추연은 고집을 내려놓았다.
“정 불편하시면 제가 선물로 사 드릴게요.”
“저도 사 드릴 수 있어요.”
“그럼 제가 사 드릴게요. 저도 이번에 돈을 제법 벌었거든요.”
난희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잠자코 대화를 듣기만 하던 모용희수와 사마의성이 입을 열었다.
고급 옷감으로 만든 궁장도 아니기에 두 여인에게는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아서였다.
수십, 수백 벌까지는 힘들지 몰라도 몇 벌 정도는 둘 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아니야. 내가 너희들을 사 주면 모를까 어떻게 선물을 받겠니. 우리 아들 체면도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할 말이 없기는 하죠.”
“맞아요.”
반호진을 거론하자 난희주와 사마의성이 작게 웃었다.
여기서 더 억지를 부릴 수는 없어서였다.
“그럼 서로 잘 어울릴 법한 것을 골라서 선물해 주는 건 어떨까요, 어머님?”
“그럴까?”
“네. 저희들도 어머니께 선물을 해 드리고 싶거든요. 어머니께서 저희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으신 것처럼요. 그러니 서로 해 주는 게 어떠세요?”
“괜찮겠다.”
모용희수의 타협안에 정추연이 눈을 빛냈다.
이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근검절약이 아무리 몸에 배었다고 하나 그녀도 여자였다.
예쁜 옷을 싫어할 리가 없었기에 웃으며 세 여인에게 어울릴 것 같은 옷을 골랐다.
“이건 어떠세요?”
“너무 화려하지 않니?”
“이런 옷도 한 벌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죠.”
“내 나이에는 안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럼 한번 입어 보세요. 대 보는 것하고 직접 입어 보는 것하고는 차이가 크니까요.”
난희주가 새롭게 골라 준 옷을 보며 정추연이 난감하게 웃었다.
시골에서 입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요?”
“어머. 색감이 좋다.”
모용희수가 고른 자색의 경장을 본 정추연이 눈을 반짝였다.
색깔이 그녀의 취향을 저격해서였다.
거기에 사마의성이 합세했다.
“이것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연한 파란색도 예쁘지. 호진이가 파란색이 의외로 잘 받는 얼굴인데.”
“맞아요.”
“근데 애가 검은색만 좋아해. 때를 덜 탄다고.”
방긋 웃던 정추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남자들의 미적 감각은 무뎌도 너무 무뎠다.
가끔은 예쁜 옷도 입어야 하는데 대부분은 오직 실용성만 따졌다.
특히 그녀의 집안 남자들은 같은 피가 흘러서 그런지 취향도 너무나 똑닮았다.
“확실히 흑의무복이 편하기는 해요. 당장 호진 오빠랑 이륭 오빠, 척이 오빠랑 조운이도 흑의무복을 주로 입으니까요.”
“이참에 넉넉히 사 갈까?”
사마의성의 말을 들으며 정추연이 턱을 만졌다.
자신에게는 아끼지만 아들과 아이들에게 옹색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사마의성과 모용희수, 난희주에게 옷을 사 주는데 다른 아이들의 것을 안 사 주는 것도 좀 그랬다.
“저는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요.”
“저도요.”
“그럼 사자. 돈 많이 벌었으면 이런 데 써야지.”
모용희수와 난희주가 동조하자 정추연은 결단을 내렸다.
이왕 사는 거 모두 다 사 주기로 말이다.
정추연도 쓸 때는 쓰는 화끈한 여자였기에 결정을 내리자마자 반호진과 동생들에게 어울릴 법한 옷들을 꼼꼼하게 고른 후 구입했다.
“고르고 나니 양이 꽤 되네요.”
“저희들 것도 있으니까요.”
곱게 포장되어 쌓여 있는 옷들의 양을 본 모용희수와 사마의성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를 때는 몰랐는데 막상 사서 한곳에 모아 놓으니 양이 생각보다 많아서였다.
“무슨 걱정이에요. 들어 줄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산 건데 그래도 되나 싶구나.”
“괜찮아요, 어머니. 포목점에 온 순간 다들 각오했을걸요? 그렇다고 이대로 장원으로 돌아가기도 그렇잖아요.”
난희주가 싱긋 웃으며 정추연의 팔짱을 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난희주의 말에 호위무사들이 전부 다 고개를 주억거린다는 것이었다.
“이미 다 예상했다고?”
“그럼요. 저희는 어머니 옷은 무조건 사 드린다는 생각으로 포목점에 들어왔으니까요.”
“그래도 미안한데.”
“괜찮아요. 안 그래?”
“맞습니다!”
난희주의 말에 비천대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다른 이라면 속으로 불평을 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 난희주가 팔짱을 낀 사람은 반호진의 친모였다.
그렇기에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나서서 들면 들었지.
“보세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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