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장. 그토록 바라던 평화. -02
정추연이 따뜻하게 웃었다.
큰 탈 없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 준 것만으로도 반호진은 제 몫을 다 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정추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막내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그럼 이제부터는 진짜 효도하고 살아야겠네요.”
“내가 바라는 건 하나야.”
“안 들을게요.”
무언가를 느낀 듯 반호진이 말을 돌렸다.
본능적으로 이다음에 이어질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어쭈?”
그 모습에 정추연이 두 눈을 새치름하게 떴다.
방금 전의 따스한 미소는 사라지고 반호진을 노려봤던 것이다.
그러나 뾰족해진 모친의 눈빛에도 반호진은 흔들리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저기가 목장이에요. 옆에는 조그마한 연못도 있어서 오리들이 물놀이를 하기도 해요.”
“말 돌리기는.”
“무슨 말 할지 아니까 그냥 넘어가죠?”
“흐음.”
정추연이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넘어가 줄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었다.
모른다면 말하는 게 맞았지만 아는데 굳이 말하면 잔소리밖에 안 되었기에 정추연은 이쯤에서 멈추기로 결정했다.
월! 월!
“어머. 개도 키우니?”
“예. 어쩌다 보니 키우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잘 선택한 것 같아요. 애들이 똘똘해서 목장을 잘 지키더라고요. 아무래도 산이 있어 밤에 산짐승들이 내려오거든요.”
“개가 있으면 좋기는 하지.”
반호진의 냄새를 맡고 헐레벌떡 뛰어온 세 마리를 정추연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인데도 반호진이 있어서 그런지 낯도 안 가리고 손을 핥는 모습에 정추연이 소녀처럼 웃었다.
“차례대로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에요.”
“겨울에 만났구나?”
“예.”
“그래도 너무했다.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가 뭐니. 너무 건성이잖아.”
연신 꼬리를 흔들며 몸을 비비거나 아예 드러눕는 세 마리를 보며 정추연이 혀를 찼다.
예쁘고 좋은 이름도 많은데 너무 대충 지은 것 같아서였다.
“어미 젖도 떼지 않아서 살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거든요. 부모가 다른 맹수들과 싸우고 죽어 갈 때 만나서.”
“에구.”
“근데 걱정과 달리 진짜 건강하게 자라더라고요. 이미 새끼도 한 번 낳았고요. 지금은 너무 건강해서 탈이죠.”
“다행이구나.”
부모를 잃었다는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던 정추연이 이내 밝게 웃으며 다시 한번 세 마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시작으로 목과 배를 살살 긁어 주자 삼형제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번에 새끼를 낳으면 보내 드릴까요? 낳을 때 보니까 꽤 많이 낳더라고요.”
“좋지. 안 그래도 집안에 사내놈들만 있어서 적적했는데. 두 놈 다 장가가면 나하고 서방밖에 없으니 좋을 것 같구나.”
“형들은 좋은 소식 없어요?”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걸 보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영 소식이 없네.”
“슬슬 갈 때가 되기는 했죠. 혼기가 꽉 찼으니.”
안 그래도 그게 고민이라는 듯이 정추연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지 멀쩡한 녀석들이 좀처럼 장가를 가지 않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은 못 하고 홀로 속앓이를 하던 차였다.
그런데 반호진이 말을 꺼내 주자 정추연은 묘하게 속이 시원했다.
“내 말이. 꽉 차다 못해 넘치는 중인데 왜 안 가는지 모르겠어.”
“중매는 안 들어와요?”
“오긴 하는데, 이놈들이 다 까. 제 주제도 모르고. 우리 막내아들은 이해라도 하겠는데 이놈들은 이해가 안 가.”
“아직 늦은 건 아니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죠. 제가 강아지 드리러 갈 때 형들이랑 얘기 좀 해 볼게요.”
“네가 직접 오게?”
정추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아랫사람을 시킬 줄 알았는데 직접 오겠다고 하자 놀란 것이었다.
“제가 가는 게 빨라요. 겸사겸사 아버지랑 형들도 보고.”
“와 주면 정말 좋지. 근데 바쁘지 않아?”
“날아가면 금방이에요.”
“…….”
정추연이 입을 쩍 벌렸다.
상상도 못 한 이동 방식에 경악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하늘을 나는 건 새들밖에 없는데 사람이 난다고 하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많지는 않지만 무림고수 중에 하늘을 날 수 있는 이들이 꽤 있어요. 저도 그중 한 명이고.”
“어어어?!”
정추연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갑자기 자신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자 대경한 것이었다.
높이 뜬 건 아니지만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진 건 분명했기에 정추연이 팔다리를 파닥였다.
“내공을 이용한 건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들어 올리는 것도 가능해요.”
“우와.”
처음에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댔지만 이게 반호진이 한 일이라는 걸 알고는 즐기기 시작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서였다.
“더 높이 올려 드릴까요?”
“아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더 높으면 무서울 거 같아.”
이제는 편안히 즐기던 정추연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정도가 딱 좋아서였다.
“엄마.”
“응.”
“아예 이곳으로 오시는 건 어떠세요?”
완전히 적응해서 허공을 유영하는 정추연을 보며 반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난번에는 거절했지만 지금은 또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어서였다.
“또 그 소리 한다. 나나 아버지나 못 떠나. 그곳이 우리가 죽을 곳이야.”
“역시 그런가요.”
“아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이 정도가 딱 좋아. 서로가 있을 자리에서 사는 게. 그렇다고 거리가 엄청 먼 것도 아니고. 가끔 농한기 때 우리가 놀러 오거나 아들이 놀러 오면 되지.”
“알겠어요.”
반호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말을 꺼내면 부담스러워할 게 분명하기에 목장을 지나 다른 곳들을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
장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다시 처소로 돌아가는데 정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낭랑한 인사와 함께 해맑게 웃으며 사뿐사뿐 걸어오는 난희주의 모습에 반호진의 두 눈이 커졌다.
난데없이 등장한 난희주에 살짝 당황한 것이었다.
“호진 오빠의 친한 동생 난희주라고 합니다!”
“친한 동생?”
“네!”
눈이 번쩍 뜨이는 미모도 미모지만 반호진하고 친하다고 하자 정추연이 환하게 웃었다.
여자는 여자가 알아본다는 말처럼 그녀도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하지만 절대 그러한 티를 내지 않았다.
“정말이야?”
“친한 동생이기는 해요. 근데 말도 없이 어쩐 일이야?”
“남창 근처에 있었는데 우연히 어머니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올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래도 인사는 드리는 게 예의일 거 같아서 온 거야.”
반호진의 미심쩍은 눈빛에도 난희주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다는 듯이 툭툭 내뱉었는데 반호진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우연히?”
“응. 진짜로. 원래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었거든. 그 볼일을 다 보고 오빠 얼굴 보려고 했었고. 증인이 필요하다면 백설이한테 물어봐도 돼. 그럼 내 최근 일정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해 줄 거야.”
“됐어. 구질구질하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마음먹고 설계를 했다면 무슨 짓을 해도 꼬투리 잡기가 어려울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조금 얄밉기는 해도 이럴 때는 그냥 모른 척 넘어가는 게 나았다.
“되게 편하게 대하네?”
“네. 알고 지낸 시간이 제법 되거든요. 제가 제일 먼저 오빠 동생 하기도 했고요.”
“대단하네. 우리 호진이가 되게 무뚝뚝해서 친해지기 힘들었을 텐데.”
“맞아요. 어찌나 매정한지. 검객 아니랄까 봐 아주 인간관계도 칼이에요. 근데 또 착해요. 은근히 배려심도 깊고.”
난희주의 맞장구에 정추연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치 딸처럼 살갑게 대하자 녹아내린 것이었다.
‘끝났네.’
말은 하지 않았으나 표정으로 모든 걸 알려 주고 있었기에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몰랐다.
여우는 난희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머, 호진이가 그랬니?”
“네.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요.”
초면인데도 죽이 척척 맞는 두 여인의 대화에 반호진은 자연스레 소외되었다.
근데 그게 싫지는 않았다.
딸이 없는 정추연이기에 지금의 시간이 꽤나 즐거울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여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희주가 눈치 빠르기도 했고.
‘시간은 많으니까.’
반호진의 시선이 맑은 하늘로 향했다.
이제는 급한 일이 전혀 없었기에 여유를 부려도 되었다.
솔직히 이만큼 무림을 위해서 움직였으면 쉴 자격은 충분했다.
***
퐁.
강서성의 거대한 호수인 포양호와 연결된 강에서 반호진이 낚싯대를 휘둘렀다.
인적 드문 허름한 나루터에서 홀로 낚시를 시작했던 것이다.
근데 정작 낚싯바늘에는 미끼가 꿰어 있지 않았다.
“평화롭네.”
폭이 넓어서 그런지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반호진이 텅 빈 나루터에 편히 앉아 중얼거렸다.
애초에 낚시를 온 게 아니었기에 낚싯대를 잡고 있기는 해도 물고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푸른 하늘과 우거진 숲, 그리고 적당히 맑은 강물만 느릿하게 번갈아 보며 구경했다.
“한적하니 좋은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여기를 별로 이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낡긴 했어도 아직 쓸 만해 보이는데 말이지.”
“효용 가치가 별로 없어서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나저나 천영각주가 따라 나올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두 팔을 엉덩이 뒤로 보내 상반신을 반쯤 눕히다시피 한 반호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뒤에 시립하듯 서 있던 조우삼이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림자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주인의 곁에 있어야지요.”
“그런 의미로 천영(天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닌데 말이지.”
“본문에 있어 하늘은 주군이시지 않습니까.”
“주군이라.”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문주님이라는 호칭도 이제 겨우 적응이 될까 말까 하는데 주군이라고 불리자 낯설었다.
좋고, 싫음을 떠나 적응이 안 된다고나 할까.
그런데 조우삼은 낯설지도 않은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주군이십니다.”
“아무렇지 않게 주군이라고 말하기에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지 않아?”
“그, 그렇긴 합니다만.”
“한 사람을 섬기는 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해. 그러니 좀 더 고민하도록 해. 대체할 수 있는 호칭이 없는 것도 아닌데.”
반호진이라고 조우삼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성급해서 좋을 건 없기에 반호진은 조우삼을 비롯해서 천영각의 각원들이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하기를 바랐다.
“알겠습니다.”
“일하는 건 어때?”
“다 좋습니다. 일단 남을 죽이는 일보다는 지키는 일이라 마음에 듭니다.”
“그림자라고 해서 꼭 호위만 하는 건 아닌데 말이지.”
“적어도 살인에만 특화되지는 않으니까요.”
조우삼이 이게 가장 마음에 든다는 투로 말했다.
남들이 보면 살방에서 훈련받은 것과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조우삼의 생각은 달랐다.
근본적인 바탕이 완전히 달랐기에 절대 똑같지 않았다.
“언젠가는 손에 피를 묻히게 될 거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동생들 모두가요. 그리고 그걸 꺼려 하는 천영각원은 없습니다. 조직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집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르는 살행이니까요.”
“집이라.”
“무상문은 저희에게 그런 의미입니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낚싯바늘을 보며 반호진이 옅게 웃었다.
조우삼의 말을 들으니 초보치고는 무상문을 나름 잘 이끌어 온 것 같아서였다.
“약속할게. 너희들의 손에 무의미한 피가 묻지는 않을 거야.”
“무의미해도 괜찮습니다. 저희들은 무상문도이니까요.”
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