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장. 그토록 바라던 평화. -01
“그렇습니다. 아드님께서 직접 일궈 낸 문파입니다. 현재 강서성에서 가장 유명한 문파이기도 합니다. 강서성을 대표하는 문파이기도 하고요.”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방일석의 말에 정추연은 입을 벌렸다.
막내아들이 세운 문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다.
“진짜 대단하세요. 알려진 것이 오히려 과소평가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요?”
“네.”
방일석과 함께 청림표국에서 보표로 차출된 여표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거짓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오히려 경외심이 짙게 서린 표정에 정추연은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자신이 괜히 온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끼이익.
그때 정문이 열렸다.
마치 세 사람이 지금쯤 올 걸 예상했다는 듯이 정문이 활짝 열리며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
“호진아!”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와 주셔서 고마워요.”
“아이고.”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는 막내아들의 모습에 정추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방금 전까지 하던 고민이 눈 녹듯이 사라져서였다.
혹시나 자신이 잘나가는 아들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반호진이 따스하게 반겨 주자 정추연은 자기도 모르게 훌쩍였다.
“엄마?”
“미안해. 얼굴을 보자마자 울기나 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냥 너무 막내아들이 반가워서. 이렇게 성공한 걸 보니까 대견하기도 하고.”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만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청림표국의 대표두인 방일석이 모친을 모셔오면서 실수할 리도 없기에 반호진은 답답했다.
하지만 묻는다고 정추연이 말할 것 같지 않기에 반호진은 일단 화제를 돌렸다.
“성공까지는 아니에요. 독립할 때가 되어서 독립한 거예요. 동생들은 지난번에 봤을 테고. 아, 의성이는…….”
“애썼다. 남장하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말을 끊고서 사마의성의 양손을 붙잡는 정추연의 모습에 반호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사마의성이 가장 놀랐다.
말하는 투가 처음부터 사마의성이 여자라는 걸 알고 있는 듯해서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나 정도 나이 먹으면 딱 보면 알아. 옷이나 걸음걸이로 남자인 척을 해도 감출 수 없는 게 있어. 너희같이 어린 애들은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다들 스무 살이 넘었는데요. 방이는 결혼까지 했어요.”
반호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다 큰 남녀를 앞에 두고 어린아이 취급하는 게 어이없어서였다.
그런데 그 반응에도 정추연은 당당했다.
“너도 자식 낳아 보면 알 거야. 엄마 눈에는 여전히 아이로 보여. 그러고 보니 방이가 없구나?”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따로 전승이라도 되는 건지.”
“전승은 무슨. 그냥 그렇게 보이니까 그런 거지. 별거 없어.”
“손주를 보고도 아이 취급하시겠네요?”
“아들은 아들이고, 손주는 손주지. 근데 손주 얘기를 하는 거 보니 좋은 소식이 있나 봐?”
정추연이 눈을 반짝였다.
잘나가는 아들인 만큼 여자가 없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건너 듣기로 엄청난 가문의 여식들이 반호진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한다고 했고.
당장 이곳에만 하더라도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가 둘이나 있기에 정추연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막내아들을 쳐다봤다.
“좋은 소식이 있었다면 진즉에 연락을 했겠죠?”
“으이그. 다 컸으면 장가도 가고 그래야지. 청춘은 한순간이야. 생각이 많아지면 그만큼 후회도 많아져.”
“이제 스물셋밖에 안 됐는데요.”
“스물셋씩이나 된 거지.”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가 않아서였다.
그도 어디 가서 입심으로는 절대 꿀리지 않았는데 상대가 너무 막강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기에 반호진은 패배를 인정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방 사형. 그리고 백 소저도요.”
“에이. 고생은 무슨. 네 어머니면 내 어머님이나 마찬가지인데. 더구나 힘든 일도 아니고.”
“대표두가 할 일은 아니죠.”
“무슨 소리. 대표두도 일이 있으면 보표 일을 해야지. 더구나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도 없고.”
여표사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는 것과 달리 방일석은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
자신의 노고를 과장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호진의 시선이 여자 표사인 백자영에게로 향했다.
혼자만으로도 충분한 데도 여자인 백자영을 투입한 게 어머니를 배려하기 위해서임을 잘 알아서였다.
“말했잖아. 사제의 어머니면 내 어머니나 마찬가지라고. 당연한 걸 가지고 고맙다고 하니 조금 당황스럽네. 하하하.”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요. 더욱이 돌아가실 때도 함께 해 주실 텐데.”
“미리 밑밥을 깔아 놓는 거구만? 잘 모셔다 드리라고.”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걱정 마. 사제가 직접 모셔다 드리는 것만큼 안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방일석이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자기만 믿으라는 뜻이었다.
“방 사형과 백 표사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걱정하지 마. 국주님께 직접 허락을 받았으니까.”
대표두인 방일석과 머지않아 표두가 될 백자영 모두 고급인력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반호진에게 잘 보여야 표사들의 훈련이 이 차에서 끝나지 않고 삼 차, 사 차까지 이어질 수 있기에 이번 일은 일종의 투자였다.
“감사 편지라도 보내야겠네요.”
“그러면 진짜 좋아하실걸. 그리고 나와 백 표사도 휴식이 필요해. 너무 일만 하면 몸이 버티질 못한다고. 백 표사야 아직 젊다지만 난 아니지.”
“그건 그렇죠.”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냐?”
방일석이 툴툴거렸다.
자신의 나이가 적지 않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쉽게 인정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그게 어른의 덕목이기도 하고요.”
“말은 참 잘해. 방금 전에도 지금처럼 잘하지 그랬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그건 인정.”
방일석은 물론이고 옆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백자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 말로 엄마를 이기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 다 반호진이 패배를 시인해도 크게 놀라지 않은 것이었다.
“들어가시죠. 두 분께서 머무실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왕이면 조용한 곳으로.”
“훈련받고 있는 표사들과 먼 곳으로 배정했습니다.”
“어허. 그건 안 되지. 내 임무 중 하나가 훈련 성과를 확인하는 건데.”
“표사들은 원치 않을 것 같은데요.”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관이 눈에서 안 보이면 보일수록 아랫사람이 좋아한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그건 걔네들 입장이고. 내 입장은 다르지. 안 그래, 백 표사?”
“저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중립이다, 이거지? 너무하는구먼.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짐짓 서운하다는 듯이 방일석이 말했으나 백자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런 백자영의 입장을 이해했다.
표두라면 모르겠으나 당장은 일급표사였기에 표사들의 편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가시죠.”
“그래.”
여기서 더 놔두면 진짜 삐질 것 같았기에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반호진의 처소 옆에 짐을 푼 정추연은 곧바로 장원을 돌아다녔다.
막내아들의 안내를 받으며 무상문 곳곳을 구경했던 것이다.
“밖에서 봤을 때도 넓어 보였는데 안은 더 넓네.”
“무림오대세가에 비하면 그렇게 큰 건 아니에요. 오히려 작은 편이죠.”
“이게?”
“예. 소림사는 여기보다 훨씬 커요.”
정추연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촌부의 아내지만 그래도 소림사가 구대문파 중 한 곳이며 엄청나게 유명한 절이라는 걸 그녀도 알았다.
그런데 무상문보다 더 크다고 하자 정추연은 경악했다.
“훨씬?”
“예. 숭산도 중원의 명산답게 엄청 크고요. 사실 이곳에 비교하기가 좀 그럴 정도죠.”
“진짜 엄청난 모양이구나.”
“나중에 모시고 갈게요. 사부님께서도 엄마를 보시면 반가워하실 거예요.”
“바쁘신데 내가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닐까? 성승(聖僧)이라고도 불리시는 분인데.”
정추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달리 성승이라 불리는 담현을 자신이 만나도 되나 싶어서였다.
“괜찮아요. 그리고 초면도 아니잖아요. 저 데려갈 때 보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게 벌써 몇십 년 전인데.”
“엄마는 자격이 있어요. 아버지도 그렇고.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반호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친은 자신이 평범한 아낙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무림과 관계가 없는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정추연이 소림사를 방문한다면 담현은 만사를 제쳐 놓고 만날 게 분명했다.
“내가?”
“물론이죠. 만약 엄마가 찾아가면 사부님이 달려 나오실걸요.”
“에이. 그건 너무 갔다. 내가 뭐라고.”
“뭐긴요. 소림검신의 하나뿐인 어머니죠. 가끔 사부님께서도 엄마랑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말씀하세요.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오랫동안 찾아뵙지 않았다고.”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시라고 해라. 우리가 뭐라고.”
정추연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속마음은 달랐다.
천하의 소림사 방장이 자신들을 보고 싶어 하고,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자 묘하게 기분이 뿌듯했다.
“뭘 말아요. 틀린 말도 아닌데. 근데 핑계가 아니긴 해요. 바쁘시긴 엄청 바쁘시니까요.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르기도 했고.”
“내 말이. 큰일을 하시는 분은 사소한 일에 연연해서는 안 돼. 큰일을 제대로 해야 많은 이들이 평안한 법이야.”
“뭐, 그렇긴 하죠. 저는 생각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대의도 좋지만 자신과 가족, 주변의 행복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처럼 집안이 평화로워야 큰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호호호. 잘 배웠구나. 맞아. 집이 시작이지. 자기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이가 큰일을 할 수가 없지.”
정추연이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반호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하나도 너무 예쁘게 해서였다.
“또 애 취급이에요?”
“어릴 때 못 해 주었으니 지금이라도 해 주어야지. 안 그래?”
“소자는 바라지 않습니다만.”
반호진은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네 의견은 중요치 않아. 내 생각이 중요하지.”
“하아.”
“지금 엄마 앞에서 한숨 쉰 거니?”
“안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겠어요?”
“하긴. 우리 막내아들의 권위도 있는데 내가 너무 막 대했다.”
통통통.
달래는 것처럼 정추연이 반호진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하지만 말투와 달리 놀리는 기색이 완연했다.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
“우리 둘만 있으니까 이러는 거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안 그래.”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그럼 안 되지. 우리 아들이 무상문주인데. 이 엄마가 촌무지렁이지만 그래도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정도는 구분한단다.”
“알죠. 근데 엄마는 그런 것들 신경 안 쓰셔도 된다는 말이에요.”
반호진의 깊은 눈동자가 정추연에게 향했다.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던 것이다.
“고마워. 이 엄마가 해 준 것도 없는데.”
“왜 해 준 게 없어요. 엄밀히 따지면 제가 없죠.”
“잘 자라 준 것만으로도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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