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장. 나한테 왜 이래? -04
반호진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옛말 중 틀린 말이 없음을 새삼 느낄 수 있어서였다.
과거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음을 깨달으며 반호진은 생각을 전환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현재 처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봤다.
‘나에게도 이득은 있어야지.’
반호진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그렇게 선한 사람도 아니었다.
선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선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착한 이라고 할 수 없었다.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기에 반호진은 고심했다.
“요청을 받아들이되 조건을 걸어야겠어.”
“조건이요?”
“응. 나도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세상에 공짜는 없어. 무료봉사할 마음은 더더욱 없고.”
조용히 반호진이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던 사마의성이 옅게 웃었다.
어김없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 나와서였다.
“맞아요. 무료로 해 주면 너도 나도 다 찾아올 거예요. 그러니 조건을 다는 것에는 찬성이에요. 거절할 명분이 되기도 하고요.”
“그렇지. 싫으면 내게서 공증을 받지 않으면 되니까.”
반호진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는 말처럼 떠올린 것을 바로 진행시키려는 것이었다.
자고로 업무를 빨리 끝내야 자유시간이 늘어나기에 반호진은 곧장 응접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사마의성이 자연스럽게 따랐다.
***
이른 아침부터 무상문의 가장 큰 연무장이 부산스러웠다.
예정된 손님들이 찾아와서였다.
숫자는 모두 백 명이었는데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손을 데면 베일 것 같은 예리한 기세가 백 명 전원에게서 흘러나왔다.
찌릿찌릿!
정확히 오십 명씩 이루어진 두 세력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서로가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맹렬한 적의는 한 사람의 등장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저벅저벅.
뒷짐을 지고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반호진의 모습에 얼마 전 직접 찾아왔던 중년인 두 명이 정중히 포권을 했다.
그러자 둘을 따라온 수하들 역시 반호진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해 왔다.
나이는 어려도 반호진의 위상은 천하를 진동시키기에 예의를 다한 것이었다.
“약속은 지키셨군요.”
“물론입니다.”
“무상문주님과 한 약속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지켜야지요.”
무덤덤하지만 여기 있는 백 명쯤은 손짓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무인이 반호진이었다.
그렇다 보니 두 중년인 다 언행을 조심했다.
괜한 실수 하나로 힘들게 만든 이 자리가 엎어질 수 있어서였다.
거기다 이 일을 시작으로 반호진과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 갈 수도 있었기에 두 사람은 똑같은 마음으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스윽.
반호진과의 인사를 마친 두 중년인의 시선이 연무장의 한쪽으로 자연스레 움직였다.
무려 이백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도열하듯 열 맞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상당한 숫자임에도 두 사람은 놀라지 않았다.
미리 반호진과 상의가 되어 있어서였다.
‘많긴 많군.’
‘저들이 다 증인이 되어 줄 터.’
처음에는 반호진의 조건에 두 명 다 난색을 표했다.
생사결인 만큼 무공과 초식이 상당 부분 노출될 게 분명해서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둘은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점도 있었지만 장점도 명확해서였다.
“규칙에 대해서는 저보다 두 분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테고.”
“그렇습니다.”
“준비되셨으면 바로 시작하시죠.”
“알겠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반호진의 말에 두 중년인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연무장의 가장자리 중앙에 표사들과 금가장, 하오문의 무사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 양옆으로 두 개의 문파가 포진했다.
무상문이 일종의 완충지대가 되어 준 것이었다.
“연무장을 확인해라!”
“예!”
“우리도 살펴봐라!”
“존명!”
각자 자리를 잡기 무섭게 두 중년인이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른 곳도 아닌 무상문이기에 상대방에게 유리한 조치를 해 놓지는 않았겠으나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더욱이 비무에 앞서 미리 적응해 두어서 나쁠 게 없기에 중년인들은 이번 오인비무(五人比武)에 나설 여덟 명과 함께 연무장을 꼼꼼히 살펴봤다.
“분위기가 장난 아닌데요?”
“당연하지. 이번 승부에 걸린 이권이 얼만데. 나 같아도 전심전력을 다할걸.”
“에이. 모용세가가 탐낼 정도는 아니던데요.”
바늘이라도 찾아낼 기세로 연무장을 샅샅이 살펴보는 이들을 지켜보던 서조운이 모용척을 향해 검지를 휘휘 저었다.
분명 꽤나 큰 이권이 걸려 있는 건 맞았으나 모용척이 대단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저들의 입장이었다면. 그나저나 애들이 좋은 구경을 하겠네.”
모용척의 시선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상문도들에게 향했다.
오늘의 대결을 관전하라는 반호진의 지시에 수련도 미루고 다들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서 말이다.
“정말 좋은 기회죠. 수준 차이가 너무 커서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요. 안력이 좋은 아이들은 희미하게나마 초식과 투로를 볼 수도 있을 테고요.”
“유달리 안력이 좋은 사람도 있으니까. 지금은 별다른 도움이 안 되도 나중에는 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모용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슬쩍 보기에 이번 오인비무에 나서는 이들은 제일 약한 이가 절정고수였다.
그것도 초입이 아니라 말엽에 가까운 수준이었기에 박빙의 대결이 예상되었다.
“실질적으로 정말 큰 도움이 되는 건 바로 저분들이지.”
“맞아. 그래서 운이 진짜 좋은 거고.”
친구인 정이륭이 눈짓으로 금가장과 하오문의 무사들, 그리고 표사들을 가리키자 모용척은 물론이고 서조운과 사마의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뭐래도 이번에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바로 저 이백 명이었다.
그걸 이백 명도 잘 알았기에 눈빛이 하나같이 뜨거웠다.
“근데 백검문(白劍門)과 손가장도 손해는 아니에요. 보는 눈이 많아서 비겁한 술수를 쓰기 힘들 테니까요.”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나 있을까. 저들이랑 우리야 크게 신경 안 쓰겠지만 공증인이 형님이신데.”
사마의성의 말에 모용척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일당백을 넘어 일당천, 일당만의 역량을 지닌 게 바로 반호진이었다.
애초에 반호진을 믿기에 공증인이 되어 달라고 한 것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다른 이들은 솔직히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심리적인 안도감은 충분히 있을 테니까요. 사람 심리가 은근히 보이는 걸 무시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인정.”
“저희는 준비 다 되었습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백검문주와 손가장주가 입을 열었다.
연무장 확인 작업을 다 마친 것이었다.
더불어 두 사람 곁에는 오인비무에 나설 여덟 명이 결연한 표정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조운아.”
“예, 형님! 비무의 시작은 제 호각 소리로 알릴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호각을 부르기만 할 뿐 승패의 판단은 각자 하는 것입니다. 혹은 두 분께서 하시거나. 두 분 모두 동의하십니까?”
반호진의 부름에 목에 호각을 걸고 있던 서조운이 나섰다.
그러나 심판은 아니었다.
“동의하네.”
“나 역시.”
“그럼 첫 번째로 나설 분들은 나와 주시죠.”
서조운이 호각을 입에 가져가며 말하자 양측에서 한 명씩 앞으로 나왔다.
연무장의 끝과 끝에서 걸어 나왔는데 따로 상의를 하지 않았음에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 멈춰 섰다.
삐이익!
서로를 노려보는 둘을 잠시 지켜보던 서조운이 호각을 불었다.
이 정도면 두 사람에게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시작을 알리는 호각을 불었음에도 두 명의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똑같이 매섭고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방을 뚫어져라 주시하기만 했다.
휘이이잉.
아주 작은 대화도 두 사람의 비무에 방해가 될 수 있었기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헛기침 소리조차 없어 널찍한 연무장에는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대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육성만 나오지 않았을 뿐 전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흐음.’
물론 반호진은 누구하고도 전음을 주고받지 않았다.
유일한 공증인이니만큼 비무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박빙이겠는데.’
괜히 전쟁을 하니 마니 했던 게 아님을 반호진은 두 무문(武門)의 전력을 보고 알았다.
고르고 고른 오십 명일 텐데 전력은 놀랍게도 비등비등했다.
두 곳 다 서로를 보며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반호진도 섣불리 승패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
‘이런 대결은 보통 운이 좋은 쪽이 이기기 마련인데.’
전력이 비슷하다면 좀 더 운이 따르는 쪽이 승기를 잡기 마련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운이라는 게 누구도 짐작하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천하의 반호진도 누구에게 운이 갈지는 알 수 없었다.
‘뭐, 나야 잘 보기만 하면 되니까.’
공증인을 서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긴장하지는 않았다.
결국 반호진이 해야 할 일은 비무를 하는 이들이 비겁한 술수를 사용했는지, 사용하지 않았는지만 확인하면 되었다.
비무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되었기에 반호진은 뒷짐을 지고서 무심한 눈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결을 주시했다.
‘호오?’
두 번째 대결을 지나 세 번째 대결로 향해 갈 때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 나오는 이를 본 반호진이 눈을 빛냈다.
최절정의 경지에 오른 여고수가 나서서였다.
안 그래도 여인이 펼치는 초식과 투로에 대해 연구하는 중이었는데 상당한 실력가 등장하자 반호진은 반색하며 집중했다.
건성으로 살펴보던 조금 전과 달리 여고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확실히 남자보다 유연해. 힘이 부족하기는 하나 그건 기술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신체적인 차이에서 오는 부족함은 제아무리 고수라도 별수 없었다.
그러나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남자와 달리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도 있었다.
반호진은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봤다.
꿀꺽!
한편 반호진 못지않게 손가장과 백검문의 대결에 집중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서조운과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이었다.
사마의성을 제외한 세 명은 자신들과 엇비슷한 수준의 고수들이 목숨을 걸고 생사결을 벌이자 눈을 한시도 떼지 않고 마른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떻게 공방을 주고받을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이었다.
“아…….”
그러는 사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어졌다.
전력이 비슷하기에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싱겁게 결판이 났다.
작은 실수 하나가 점점 커지더니 결국 승패를 갈랐다.
그 결과 승자는 함성을, 패자는 장탄식을 흘렸다.
***
“우와.”
낡은 황의경장을 입은 중년여인이 연신 탄성을 터트렸다.
난생처음 방문한 강서성의 성도 남창의 모습에 감탄한 것이었다.
거의 평생을 살다시피 한 복건성 복주와는 비교도 안 되게 번화한 모습에 중년여인은 소녀처럼 눈을 반짝였다.
“저기가 바로 무상문입니다.”
“어머.”
비슷한 또래의 두 남녀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던 중년여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듣던 것보다 훨씬 큰 장원의 모습에 놀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중년여인은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반 사제가 있는 곳이지요.”
“……정말요?”
중년여인, 정추연이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규모에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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