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장. 나한테 왜 이래? -03
소림사의 산문에 버려진 아이가 나중에 소림사의 제자가 되듯이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모용희수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자연스레 무상문의 제자가 될 터였다.
재능이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까지 반호진이 보여 준 행보로 생각하면 무재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반호진이 제일 우선적으로 보는 건 바로 신의였다.
‘그게 맞는 것이기도 하고.’
가장 좋은 건 재능과 신의를 다 갖춘 인재였다.
하지만 문제는 둘을 모두 갖춘 인재가 드물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둘 중 하나를 정해서 고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믿을 수 없는 이와 미래를 함께 걸어갈 수는 없어.’
사마의성은 반호진을 따르면서 많은 걸 배웠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믿음이 없는 사이는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어떻게 파국이 오는지도 두 눈으로 직접 봤기에 그녀가 사람을 거둘 때 최우선적으로 보는 게 바로 신의와 인성이었다.
‘나에게도 나쁘지 않아.’
사마의성이 두 눈을 반짝였다.
아이를 키우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인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삶 역시 하루하루를 사는 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
“대비를 해 놓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부총관.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을 거야. 우리 애들도 아기를 돌보는 데는 일가견이 있을 테니까.”
“그렇겠네요.”
황매향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나 다른 여인들은 갓난아이를 키워 본 적이 전무했지만 곽춘을 비롯한 아이들은 달랐다.
애기들을 많이 돌봐 주었을 것이었기에 황매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숙달된 경력자도 있습니다, 형님. 유화랑 쌍둥이 형제 부모님들이요.”
“아.”
두 사람의 대화에 서조운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경력자가 세 명이나 더 있어서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셋의 등장에 황매향이 반색했다.
“춘이랑 아이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른들을 도와주는 것과 자식을 진짜 키워 본 건 다르니까요.”
“맞아. 왜 그걸 생각해 내지 못했지.”
“이것저것 신경 쓰실 게 많으셨잖아요. 부총관과 유 호법이 있다고 하나 최종 결재는 형님이 하셔야 하니까요. 거기다 이런 일까지 겪었으니 미처 떠올리지 못할 법도 하죠.”
“그런가.”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일이 많지는 않아서였다.
서조운의 말대로 최종 결재는 무조건 그가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업무가 많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일에 파묻힐 생각도 없었고.
“근데 저도 살짝 두렵기는 하네요. 이 결정이 어떤 사태를 초래할지.”
“걱정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많지는 않을 거야. 소림사만 보더라도 산문 앞에 버려지는 아이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 꾸준히 버려지기는 하지만.”
“책임지지도 못할 거 애는 왜 낳아서.”
서조운이 혀를 끌끌 찼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 피치 못할 사정이라던가.”
“나중에 다 자라면 찾으러 오는 거 아니에요? 자기 늙고 병들었으니 책임져 달라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요.”
“그땐 아이의 선택에 맡겨야지. 그나저나 아기에게 먹일 젖이 문제네.”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얼마 전에 아이를 출산한 분이 계신데 그분한테 부탁해 볼게요.”
“양이 넉넉할지 모르겠네. 사람마다 차이가 좀 있다고 들었는데.”
“정 부족하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되니까요.”
“젖동냥을 다니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에 반호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씁쓸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기가 얼마나 굶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만큼 가급적이면 서둘러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대가는 확실하게 지불하고.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네.”
“이번에는 천영각주가 함께 가.”
반호진의 시선이 조우삼에게로 향했다.
그동안 황매향이 열심히 수련을 했다고 하나 아직 무인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때문에 반호진은 호위무사로 조우삼을 붙였다.
“알겠습니다.”
-겸사겸사 남창 저잣거리의 분위기도 살펴보고. 특히 부총관과 아기를 유심히 쳐다보는 이들을 잘 살펴봐.
-그리하겠습니다.
귓전으로 파고드는 전음에 조우삼이 은밀히 눈을 빛냈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반호진이 무엇을 말하는지 단박에 알아들은 것이었다.
“우 각주는 애기에 대해서 좀 아나?”
“……공부하겠습니다.”
“같이 공부해야겠구만.”
갑작스럽게 물었으나 우송덕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대답했다.
“이름도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겠네.”
모용희수가 손을 살짝 들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름 없이 부를 수는 없어서였다.
“형님이 지어 주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데. 내가 작명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자고. 이왕 지어 주는 거 좋은 이름으로 지어 줘야지.”
서조운을 필두로 모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 명의 인간에게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다들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반호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아이니까. 근데 여자가 익힐 만한 무공이 없지 않나?’
반호진이 눈을 껌뻑였다.
기본공은 상관이 없지만 상승의 경지로 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여자의 몸에 맞는 내공심법과 검법 등등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준비된 게 단 하나도 없었기에 반호진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졌다.
‘……할 일이 더 있었네.’
반호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째 일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반호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여인의 체형에 맞게 초식들을 가다듬었다.
창밖에서 기합소리인지 곡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기괴한 포효 소리가 들려올 때 반호진은 응접실에서 앉아 삐딱한 자세로 방문객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이다.
“그러니까 두 분께서는 저더러 비무의 공증인을 맡아 달라는 것이죠?”
“예.”
“그렇습니다.”
일면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 그대로 스치듯이 마주쳤던 이들이 앞에 앉은 두 사람이었다.
짧게 인사만 주고받은 게 전부인 사이라고나 할까.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공증을 부탁하자 반호진은 골치가 아파 왔다.
“공증인이 꼭 저일 필요가 있습니까?”
“무상문주님이라면 공명정대하게 판정을 내려 주실 것 같아서요.”
“맞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상문주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서는 날을 바짝 세우는 두 사람이 쓸데없는 부분에서는 뜻을 같이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대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반면에 이런 상황이 생소한 사마의성은 눈을 반짝이며 구경했다.
“두 분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저만 있는 건 아닙니다만.”
“현재 남창을 대표하는 무인이 무상문주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흐음.”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이번 대답에서 무슨 말을 해도 이들이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어서였다.
더불어 둘의 행동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전면전 대신 소수의 비무로 결판을 내는 경우는 의외로 많았다.
나름 평화적인 방식이기도 했고.
다만 문제는 이런 류의 일이 자신에게 닥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반호진은 당혹스러웠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간청드립니다.”
전혀 다른 인상의 두 중년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반호진의 마음이 아주 조금 약해졌다.
한참이나 어린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게 쉽지 않은 결정임을 잘 알아서였다.
“대답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타협은 힘드시겠습니까?”
“그건…….”
“…….”
두 명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말 대신 표정으로 대답하는 모습에 반호진은 쓴웃음을 흘렸다.
얼굴을 보아하니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찾아와 부탁하는 걸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당장은 대답하기가 곤란할 것 같습니다. 두 분께서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셔서. 그러니 오늘은 이만 여독을 푸시고 내일 아침에 다시 대화하죠.”
“……알겠습니다.”
“늦었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두 중년인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흥분한 나머지 자신들이 너무 무례하게 찾아왔음을 깨달아서였다.
그래서 둘은 민망한 얼굴로 정중하게 사과했다.
“두 분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부총관.”
“예, 문주님.”
“두 분께서 머무실 방으로 안내해 줘.”
“네.”
반호진의 축객령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의 주인은 반호진이었기에 지시를 순순히 따른 것이었다.
끼이익.
황매향을 따라 두 사람이 응접실을 나가자 반호진이 몸을 축 늘어뜨렸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진이 빠진 느낌이었다.
“확실히 위기를 견디면 기회가 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문파들이 세력을 넓히려는 걸 보면요.”
“욕심이 과한 게지.”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반호진이 혀를 찼다.
굳이 하오문이나 금가장까지 갈 거 없이 개방을 통해서 무림정세에 대해서는 주기적으로 정보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관심은 없지만 흘러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얼추 알았다.
“근데 이해는 가요.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으니까요. 오빠 말씀대로 욕심이 과한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요. 그래도 나름 평화적인 방법을 찾았잖아요. 예전이었으면 중재는커녕 일단 치고받고 혈투부터 벌였을 텐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가 도태되는 건 자연의 섭리이지만, 우리는 짐승이 아니잖아. 근데 애초에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으면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았겠지.”
반호진도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 역시 없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예의는 아는 사람들이네요. 태도가 시건방졌으면 바로 내쫓았을 텐데.”
“내 성격을 아는 거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긴 해요.”
사마의성이 곱게 웃었다.
이제는 워낙에 유명인사가 되어서 반호진에 대해서 모르는 무림인은 드물 터였다.
얼굴은 몰라도 성격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기에 두 사람의 공손한 태도가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너무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오신 것 같아요.”
“알아. 그래서 이렇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잖아.”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마음 같아서는 지네들끼리 알아서 하게 놔두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지.”
반호진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성격 같아서는 둘이서 지지고 볶든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반호진은 더 이상 일개 무인이 아니었다.
소림사의 속가장문인이었기에 대외적인 평판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오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속으로야 불만을 갖겠지만 감히 그걸 밖으로 표출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흐음.”
툭. 툭. 툭.
반호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지만 문제는 이게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계속 거절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반호진이 싫어한다는 걸 알고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대신 평판을 잃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무상문을 시작으로 소림사와 주변으로 확대될 것이기에 반호진의 고민이 깊어졌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책임과 의무도 같이 높아진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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