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장. 나한테 왜 이래? -02
모용척의 말은 정론이었다.
그러나 전부 다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애초에 반호진이 직접 물어보기도 했고.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기도 하고요.”
“모용세가에서는 드물지?”
“예. 제가 알기로 단 한 번도 정문 앞에 아이를 버리고 간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꺼내는 모용척을 일별한 반호진이 이번에는 서조운을 바라봤다.
서가장의 경우를 듣고 싶어서였다.
“본가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찢어지게 가난하기도 했고요. 아, 그래서 안 그랬나?”
서조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서가장의 형편을 따지고 그런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이름 난 문파나 무림세가에 갓난아이를 버려두고 가는 경우가 드물기는 하지만 없지는 않다고 들었어요.”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든 서조운을 대신해서 사마의성이 입을 열었다.
어려서부터 무림정세에 대해 관심이 많았었기에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건너 건너 들은 게 있었다.
“맞아. 소림사도 마찬가지고. 내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꽤 있어.”
반호진이 턱을 긁었다.
굳이 멀리 갈 것 없이 예로 소림사의 정현이 있어서였다.
여기 있는 갓난아이와 마찬가지로 정현 역시 소림사의 산문에 버려졌었다.
그리고 소림사의 제자가 되어 잘 살고 있었다.
“제가 보기에는 오빠가 소림사 출신인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생각해요. 생명의 존귀함을 아는 게 불제자이니까요.”
“괘씸하네.”
사마의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용척이 입을 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을 이용하려 했다는 게 너무나 가증스러워서였다.
근데 그건 모용척만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닌지 원탁에 앉아 있던 이들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요. 물론 저도 괘씸하다고 생각해요. 어쨌거나 호진 오빠와 무상문을 이용하려 한 건 사실이니까요.”
“우으응.”
목소리가 점점 커져서인지 잘 자고 있던 아이가 눈을 떴다.
정말 한순간에 두 눈을 번쩍 떴던 것이다.
그 모습에 서조운을 비롯해서 모용척과 모용희수가 긴장했다.
혹시나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스윽.
그때 황매향이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주변 눈치를 살피듯 똘망똘망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힐끔거리는 아기를 안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가 방긋방긋 웃었다.
보통은 엄마가 아닌 사람은 낯을 가리기 마련인데 황매향을 보고 오히려 해맑게 웃자 모두가 살짝 놀랐다.
“애기가 순하네요.”
“그러게. 보통 그 시기 때는 아빠도 낯가리지 않나? 매일 붙어 있지 않는 한.”
“대개는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아빠보다는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으니까요.”
“희한한 녀석이네.”
부드러운 흔들림이 기분 좋은 모양인지 울기는커녕 연신 방긋방긋 웃는 아기의 모습에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표정만 보면 부모한테 버려진 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서였다.
“가끔 있어요. 유별나게 순한 아이가요.”
“순해서 다행이긴 한데, 지금 중요한 건 아이의 성격이 아니야.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이냐지. 그래서 말인데 부총관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
“문주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저는 따를 거예요.”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만약 부총관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아이를 어떻게 하고 싶어?”
황매향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 질문은 그녀도 선뜻 대답할 수가 없어서였다.
만약 홀몸이었다면 오히려 고민을 안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엄연히 무상문 소속이었고, 그것도 평범한 문도가 아닌 현재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부총관이었다.
“……고민을 길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정이 들면? 그때는 더 못 보내지 않을까?”
“…….”
황매향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반호진의 말이 맞아서였다.
“그럼 의평각주는?”
“예?”
가만있다가 봉변을 당한 것처럼 우송덕이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자신에게 묻자 당황한 것이었다.
“의평각주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어?”
“어……. 저는……. 그러니까…….”
우송덕이 말을 더듬었다.
이제는 살방의 노예 의원이 아닌 의평각이라는 조직을 이끄는 이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급격하게 신분이 상승한 건 아니었다.
의평각주가 되었다고 해서 거들먹거릴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 보니 우송덕으로서는 좌중의 분위기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편하게 말해. 이제는 의평각주잖아? 나름 무상문의 간부라고.”
“저는 어느 쪽이든 다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담점이 다 있다라. 그럼 천영각주는?”
“어, 저도…….”
우송덕에게 물었기에 당연히 자신에게도 물을 거라 조우삼도 예상했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 대답했던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반호진이야 간접적으로라도 겪어 봤다지만 조우삼은 아니었다.
게다가 천진난만한 아기의 눈을 보고 있으면 돌려보내야 한다는 말이 도무지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형님.”
“말해 봐.”
“이게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시작이라.”
“형님께서 아기를 받아 주시면 사정이 어떠했든 많은 이들이 정문 앞에 아이를 버릴 겁니다.”
오늘만큼은 자신이 나쁜 놈이 되겠다는 듯이 모용척은 다른 이들이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한 번 정도는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 역시 아이는 불쌍하지만 그렇다고 무상문이나 반호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보초를 세우는 건 의미가, 없겠군요.”
“그래. 꼭 정문에만 버려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말을 잇던 서조운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정문을 막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님을 말하던 도중에 깨달은 것이었다.
아이를 버리려고 마음먹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상문 인근에 버릴 터였다.
“사실 이미 결정은 내렸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은 거지. 척이가 말한 부분에서 가장 길게 고민했었지만. 내 결정에 앞서 부총관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혹시 조금 전에 물었던 것에 대한 대답인가요?”
“아니. 다른 거야. 만약 내가 그 아이를 거두겠다면 일이 많이 늘어나나? 아기에 대해서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얼핏 듣기로 거의 한 시진 주기로 젖을 주고 대소변을 확인해야 한다고 들었거든. 잠도 짧게 여러 번 자고.”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은 늘어나겠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아이 하나가 늘어났다고 해서 업무가 엄청나게 느는 건 아니니까요.”
잠시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던 황매향이 대답했다.
분명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현재 무상문 소속 중에 아이를 키워 본 이는 없었다.
경력자와 비경력자의 차이는 크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 걱정이 많지만 그래도 하다 보면 어찌어찌 될 거라고 황매향은 생각했다.
“척이의 말대로 한 명에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어서 그래.”
“그 말씀은.”
“맞아. 아이의 부모가 후회하며 다시 데려가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아기를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 보면 이 또한 인연이니까. 그리고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 물론 부총관과 시비들에게만 전부 맡기지는 않을 거야. 나도 직접 돌볼 생각이야.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좋습니다. 이 핏덩이를 버리고 싶지 않거든요. 이미 한 번 버림받았는데 또 버림을 받는다면 너무 서글프지 않을까요.”
“맞아.”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그 역시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렸었다.
버림받은 날 또다시 버림을 받는다는 게 어떤 심정일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기에 차마 그만은 아이를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라고 하나 그럼에도 사람으로서 할 짓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사정이라면 다르겠으나 지금의 반호진은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우송덕의 말처럼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에에!”
“문주님께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녀석인데.”
결정을 내리기 무섭게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아기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멋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절묘했기에 다들 삼촌 미소, 이모 미소를 지었다.
“아직 목에 힘이 없어 머리를 꼭 받쳐 줘야 합니다.”
“알았어.”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갓난아기를 반호진은 조심스럽게 받았다.
황매향의 조언을 십분 받아들여 팔로 아기의 뒤통수를 받치며 품에 안았다.
“으히!”
“이 녀석 참.”
분명 불편할 텐데도 안기 무섭게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반호진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기를 따라 웃은 것이었다.
근데 그런 반호진의 미소에 아이가 두 팔을 크게 휘저었다.
“우우우!”
“그래. 나도 만나서 반갑다. 울지 않아서 고맙고.”
“아부! 아부!”
“그렇지만 아빠는 아니고.”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묘하게 아빠처럼 들리는 단어에 반호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아기라도 아닌 걸 맞다고 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아빠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죠.”
“너랑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
“저는 아빠라고 해도 순순히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형님.”
“그래. 너 잘났다.”
기분 나빠 하기는커녕 당당하게 대답하는 모용척의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식으로 나오면 그로서는 이길 방법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갓난아기였기에 남자한테는 다 아빠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진짜 순하네요. 낯선 사람들이 잔뜩 있으면 보통은 울기 마련인데.”
“그러게.”
“저도 안아 볼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반호진의 곁으로 모용희수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았다.
한데 모용희수에게 건너가서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대신 신기한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안녕?”
“으히!”
“너도 반갑다고? 호호.”
나이는 어려도 반호진이나 황매향보다 아기를 많이 안아 본 게 모용희수였다.
일 년에 가문에서 태어나는 아기만 해도 상당하기에 모용희수는 능숙하게 아이를 안고서 눈을 맞췄다.
중간중간 그네를 태우듯이 두 팔을 흔들어 주면서 말이다.
“우아!”
“그래그래. 나도 반가워.”
차갑고 도도했던 생김새와 달리 모용희수가 의외로 싹싹한 성격이라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까지 잘 보자 다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외다. 모용 소저에게 저런 면모가 있을 줄은.”
“그러게.”
“근데 반응이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지 않아? 아기들도 어른 외모를 본다는 말이 있던데 그게 사실인가.”
“야.”
사마의성이 서조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입 밖에 꺼내서였다.
“한번 실험해 볼래? 너랑 나한테 어떻게 반응하는지. 넌 안 궁금해?”
“별로.”
가끔 눈치 없는 행동을 하는 서조운을 살짝 흘겨본 후 사마의성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모용희수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에게로.
‘의평각주님 말대로 장단점이 있어. 분명히 이번 일을 계기로 악용하는 이들이 있을 거야. 그렇지만 무상문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맹목적인 문도들을 가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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