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장. 나한테 왜 이래? -01
“왜 그렇게 긴장했어?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으려고 부른 줄 알겠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차? 물?”
착석하자마자 이마가 책상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는 청년의 모습에 반호진이 무형지기를 움직였다.
말로 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강제로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그럼 차로. 물보다는 차가 차분해지는 데 좀 더 도움이 될 테니까.”
“감사합니다.”
청년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반호진이 건네주는 찻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러고는 바로 입에 가져갔다.
“뭘 그렇게 얼어 있어? 늘 마시는 차랑 똑같으면서.”
“이곳에서 마시는 차는 이상하게도 맛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똑같은 찻잎이라도 누가 우려내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니까. 아마 의성이가 우려내면 이것보다 더 맛있을 거야.”
“확실히 다르기는 합니다.”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청년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반호진이 우려낸 차도 괜찮았지만 사마의성과는 비교할 수 없어서였다.
다도에 사마의성이 진심이기도 했고.
“별일은 없지?”
“문주님 덕분에 모두 감사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집이나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은 더 없대?”
“예.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지만 다들 이곳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워서 그런지 떠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청년의 대답을 들으며 반호진은 차를 들이켰다.
미지근한 차가 몸 안으로 들어가자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따로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다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새로 익히는 무공은 어때? 부작용이 있다거나 혹은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건 없나?”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증상이 있다면 바로 문주님께 보고해야 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나라고 해서 실수를 안 하는 건 아니니까.”
반호진이 당부하듯 말했다.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의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은 비슷하면서 달랐다.
즉 변수가 있었기에 이상한 게 있다면 즉시 조치해야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우삼이 널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알려 줄 게 하나 있어서야. 일종의 조직 개편이라고나 할까. 똑같은 무상문도지만 너를 비롯해서 살방에서 살수 훈련을 받은 아이들을 따로 모아서 하나의 조직을 만들 생각이야. 이름은 천영각(天影閣)이고.”
“천영.”
“하늘의 그림자라는 뜻이지. 살수보다는 그림자가 낫잖아?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어. 천영각 소속이 되기 싫다면 지금처럼 일반 문도로 지내도 돼.”
천영이라는 두 글자를 곱씹는 조우삼을 바라보며 반호진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따라 주면 좋겠지만 거절하더라도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저는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른 녀석들도 거부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저희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아서요.”
“주로 하는 임무는 정보 수집일 거야. 현재 본문에 가장 필요한 게 정보력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처음부터 크게 일을 벌일 생각은 없어. 사람을 더 충원할 계획도 없고. 지금 있는 이들로만 소소하게 운영할 거야. 일단은 이곳 남창을 중심으로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삼이 넌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선택지가 없었어. 왜냐하면 초대 천영각주는 너거든.”
“예에?!”
우송덕과 마찬가지로 조우삼 역시 해연히 놀랐다.
살방 출신 아이들 중 그가 가장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천영각주로 내정이 되어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놀라기는. 너 말고 천영각주를 맡을 사람이 누가 있어?”
“저는 실력이…….”
“지금은 세 번째 정도 되나? 대신 너에게는 두 명에게 없는 포용력이 있잖아. 동생들을 잘 챙기기도 하고.”
“으음.”
조우삼은 부정하지 못했다.
확실히 동생들이 그를 가장 잘 따르기는 했기 때문이다.
원래 성격이 좀 살가운 편이기도 했고.
살방이었다면 실력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앞으로 조우삼이 살아갈 곳은 무상문이었다.
“여기는 살방이 아니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리고 지금은 세 번째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수도 있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우삼이 눈을 반짝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또 그라고 승부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천영각주인 만큼 네가 아이들의 의견과 생각을 대변해야 해. 또한 본문에 대해서도 좀 더 신경 써야 하고. 그렇다고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너도 처음이지만 나도 문주는 처음이니까. 서투른 게 당연해.”
“하하하.”
조우삼이 어색하게 웃었다.
늘 거대한 산처럼 존재해서 그렇지 반호진도 문주직에 앉은 건 처음이었다.
그걸 새삼 깨달았기에 조우삼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 배워 간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면 돼. 벌써부터 괜히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우선은 자리를 잡고 기반을 잡아 간다는 느낌으로.”
“예.”
“안 되는 걸 혼자서 붙잡고 끙끙대지 말고. 자신의 역량 부족을 인정하는 것도 능력이야. 혼자서 안 되면 다른 곳과 힘을 합치면 되니까.”
“금가장과 하오문을 말씀하시는 거죠?”
“개방도 있고, 소림사도 있고. 잊은 것 같은데 나 소림사 출신이야.”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소림사 출신이건만 금가장과 하오문이 먼저 나오는 게 웃겼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그게 이해가 안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 그렇죠.”
“이상하게 다들 그 사실을 깜빡깜빡한단 말이지.”
“문주님의 위명이 워낙에 대단해서 그런 것 같아요. 지금도 문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기억 못 했을 것 같아요.”
“내 업이란 말인가.”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앞으로도 빈번하게 일어날 것 같아서였다.
“저라도 늘 머리에 새겨 놓겠습니다.”
“퍽이나.”
“또 아이들, 아니지. 이제는 천영각원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 입에 착 달라붙지는 않네요. 어쨌든 각원들에게도 주지시키겠습니다.”
“글쎄다.”
회의적인 반호진의 표정에도 조우삼은 결연했다.
처음부터 잘될 거라고는 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꾸준히 말한다면 언젠가는 적응할 것이었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꼭 보고 싶은 건 아니니까 너무 괴롭히지는 마. 그냥 알고만 있으면 되니까. 적어도 자기가 소속된 곳의 뿌리는 알고 있어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가 봐. 부각주도 논의해야 하고 조를 어떻게 짤 건지도 상의해야 하니까. 앞으로는 정신없이 바쁠 거야.”
말만 들어도 기가 질린다는 듯이 조우삼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못 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그는 천영각주였고, 그 자리에 맞게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더해서 조우삼은 반호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찾아오고.”
“예.”
자리에서 일어난 조우삼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생겨서 그런지 표정이 복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기에 반호진이 해 줄 수 있는 건 응원뿐이었다.
“이제 얼추 체계가 잡혀 가는 건가. 확실히 점점 커져 가네.”
조우삼이 나가고 고요해진 집무실 안에서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시간이 흐른 만큼,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무상문이 점차 커져 가는 게 보여서였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고.
마치 아이가 점점 성장하는 것 같은 모습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에 내려앉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벌어진 상상도 못 한 일에 모두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이 사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흐음.”
그리고 그건 반호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새근새근 잘만 자는 갓난아이의 모습이 반호진은 실소가 절로 나왔다.
“부모를 찾아볼까요? 천영각의 첫 번째 임무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할 때 서조운이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마음먹고 찾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남창이 넓기는 하나 천영각을 동원하면 찾지 못할 것도 없었다.
천영각만으로 부족하다면 개방이나 하오문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고.
“나쁘지 않네.”
“그치? 오늘 아침에 아이를 놓고 갔으니까 서두르면 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친구인 사마의성이 동조해 주자 서조운의 얼굴이 밝아졌다.
천영각과 함께 자신들이 나선다면 찾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문제는 부모를 찾는 게 아냐.”
“예?”
“자식을 버린 부모가 아이를 찾아 주었다고 고마워할까?”
“어?”
차가운 모용척의 한마디에 서조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모용척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더불어 사마의성의 얼굴 역시 어두워졌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 또한 모용척과 같아서였다.
“애초에 아이를 금쪽같이 여겼다면 버리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부모를 찾는 건 무의미한 짓이야.”
“으음!”
서조운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아직 기지도 못하는 아이가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퍼서였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형제도 아니고 자신의 자식을 스스로 버렸다는 게 서조운으로서는 혐오스러웠다.
“척이의 말이 맞아. 부모를 찾을 필요는 없어. 찾아줘 봤자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결국 다시 버릴 거야. 자식을 한 번 버렸는데 두 번 버리지 못할 건 없으니까.”
나지막한 반호진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곳곳에서는 신음과도 같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만약 다른 곳에 버려진다면 아이의 미래는 너무나 뻔했다.
“문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이 자리는 사석이니까 편하게 해.”
“그럴까요?”
사마의성이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그와 동시에 슬쩍 황매향과 우송덕, 조우삼을 힐끔거렸다.
부총관과 의평각주, 천영각주가 함께 있었기에 순수하게 사석이라고 생각하기가 애매해서였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사안이 좀 커서 그런 거니까. 이런 일은 처음이기도 하고. 모두가 초보자라면 다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게 가장 낫지 않겠어?”
“그렇긴 하죠.”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반호진의 시선이 잘 자고 있는 갓난아이에게로 향했다.
태어났던 집의 형편을 말해 주듯 아이를 감싸고 있는 천은 상당히 낡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잘 빨아서 더러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지금껏 입을 열지 않았던,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직은 낯선 모용희수가 입을 열어서였다.
특히 오빠라는 호칭에 많은 이들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저도 형님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최종결정권자는 형님이시니까요.”
“책임을 전가하는 거 아니에요?”
“절대 그런 게 아냐. 우리가 이 자리에 참석해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나나 너, 의성이, 이륭이는 외부인이야. 무상문의 행보에 이래라저래라할 자격이 없어.”
단호한 모용척의 말에 서조운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어서였다.
반호진과 가까운 사이지만 그렇다고 따로 권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솔직히 발언권이 있는 건 황매향과 조우삼, 우송덕 세 사람이었다.
“외부인이라도 의견은 말할 수 있지. 나도 쉽게 결정할 수가 없어서 다들 모이라고 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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