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장. 비움의 미학. -04
끝내려면 진즉에 끝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반호진이 계속해서 대련을 이어 간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일 테고.
때문에 유호량은 체력이 바닥 난 상태임에도 악착같이 버텼다.
터어엉!
“큭!”
가벼운 충돌이었으나 속사정은 달랐다.
내부를 뒤흔드는 충격에 유호량은 신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버텼다.
아니, 정확하게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
텅!
반호진이 그가 쓰러지는 걸 허락하지 않아서였다.
넘어질 것 같으면 귀신같이 간격을 좁혀서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몸을 띄웠기에 유호량은 넘어지고 싶어도 넘어질 수가 없었다.
‘어?’
점차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고서 버티는데 유호량의 뇌리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반호진의 검식을 계속해서 보자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명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에 유호량은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혹시?’
유호량의 미간이 좁혀졌다.
누구보다 화려한 초식을 펼칠 수 있는 게 반호진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현란한 검세를 보여 줄 수 있음에도 정반대로 단순하고 간결한 초식만 펼쳤다.
마치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초급자처럼 말이다.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간단한 검로에 유호량은 추측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얼추 눈치채신 모양이군요.”
“기본기를 더욱 단단히 다지라는 뜻 아닌지요?”
“역시 채우려고만 하시는군요.”
“예?”
“기본기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유 호법님은 이제 채울 때가 아닙니다. 비울 때입니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던 유호량의 동공이 서서히 확대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것이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한 줄기 벼락이 몸을 관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울 때라…….”
“지금까지 유 호법님은 계속해서 부족한 걸 채웠을 겁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여겼을 테니까요. 일종의 결핍감이라고나 할까요.”
“맞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것 같은 건 어깨너머로 많이 배우고 훔쳤습니다. 애초에 가진 게 없었기에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요. 그렇다 보니 기본기를 다질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기회라는 건 제가 원하는 순간에 오지 않기에 우연히 기회가 찾아오면 기술을 훔치기 바빴습니다.”
유호량이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살아남기 급급하던 과거가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그 삶은 바로 이곳, 무상문을 찾아오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때문에 무상문은 유호량에게 있어 의미가 남달랐다.
“이해합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을 테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설픈 위로가 아닌 진심으로 공감하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유호량이 울컥했다.
어느 누구도, 어디에서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유호량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만큼 절박했을 테니까요. 아마 저도 유 호법님과 같은 처지였다면 비슷했을 겁니다. 더불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겠지요.”
“맞습니다. 대부분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거나 현실에 타협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과거를 부정하거나 틀렸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제는 그런 것들을 털어 버릴 때가 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애벌레가 번데기의 과정을 거친 후 성충이 되는 것처럼 유 호법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탈피가 필요하다고나 할까요.”
“제게 있어 탈피는 비우는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많은 것들을 습득했기에 지금의 유 호법님이 계시지만 이제는 그중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셔야 합니다. 정말 필요하고 유 호법님에게 맞는 것들로만요. 나머지는 싹 다 덜어내야 합니다.”
유호량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슨 말인지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불필요한 것들을 비워 내면…….”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부르르!
확신이 서린 반호진의 목소리에 유호량이 몸을 떨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이렇게 말하자 왠지 모르게 초절정이라는 경지가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초절정은 절정의 마지막 경지이자 초월경에 이르기 직전의 관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내심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유호량도 사람인 이상 욕심이 없을 수 없었고, 반호진이 이렇게 말해 주자 희망이 싹 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도 지고한 경지인 초월경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문주님처럼 젊은 나이에 오르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저 죽기 전에는.’
멍했던 유호량의 두 눈에 초점이 잡혀 갔다.
동시에 별빛처럼 반짝였다.
“저는 방향을 제시할 뿐입니다. 길을 찾는 건 유 호법님의 몫입니다.”
“방향도 잡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이지 않습니까. 그에 비하면 저는 행운아지요. 감사합니다, 문주님.”
“순수하게 도와드린 건 아닙니다. 고수가 많을수록 본문에는 도움이 되니까요. 더욱이 호법이시지 않습니까.”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은 지금도 충분히 하고 계시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비장한 유호량의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게으르다면 모르겠지만 유호량은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오히려 만류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무리하는 건 몸과 정신에 좋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개인 시간을 너무 빼앗으면 안 되니까요.”
한 차례 싱긋 웃은 반호진이 몸을 돌렸다.
유호량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대련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흘러 야심한 시각이 되어 있기도 했고.
이윽고 반호진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며 사라졌다.
스윽.
그러나 유호량은 반호진의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읍을 거두지 않았다.
고마움을 가득 담아 오랫동안 읍을 했다.
***
똑똑똑.
“문주님. 소인 우송덕입니다.”
“들어와.”
“예.”
집무실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작성하던 반호진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낡은 백의경장을 입은 우송덕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소인이라는 말을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소인은 이게 편합니다. 막말로 문주님께서 거두어 주시지 않았다면 죽었을 목숨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는 않을걸. 우 의원도 강제로 붙잡혀 온 거잖아?”
“끌려왔다고 하나 지은 죄가 사라지는 아니니까요.”
우송덕이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해서 지은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죽을 때까지 속죄하며 살 생각이었다.
“우 의원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고마워할 거야. 지금 함께 있는 이들도 그렇고.”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글쎄. 조금이 아닐 텐데.”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도울 생각입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내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고. 거기에 대해서 뭐라 할 마음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내가 부른 건 인력이 모자라지는 않나 궁금해서야.”
반호진의 말에 우송덕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부상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맞아. 철저하게 관리해서 중상자는 없지만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이는 꽤 되지?”
“오늘 중식을 먹기 전까지 세 군데를 다 합쳐서 총 아홉 명이 진료를 받았습니다. 내상을 입은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경상이라고는 해도 거동에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닙니다. 격렬한 훈련은 당분간 무리지만 간단하게 움직이는 건 가능합니다.”
“우 의원은 어때? 감당하기 벅차지는 않아? 의술을 공부하는 아이들이 도와주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건 우 의원뿐이잖아.”
“아직은 괜찮습니다. 부상이 심각한 것도 아닌지라.”
우송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떤 부분을 걱정하는 건지 알지만 정말로 괜찮아서였다.
아홉 명 전부 다 중상자라면 손이 부족할 테지만 지금은 문제없었다.
“개인적으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잠이 없는 편이라 시간은 충분합니다. 오히려 부상자들이 있어 도움이 되는 편입니다.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치료하는 걸 보여 주는 게 가장 좋거든요.”
“그렇긴 하겠네.”
“부상자들에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먼저 말을 하고 치료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무상문의 위상을 생각하면 무시하고 진행해도 아무 문제 없었으니까.
그러나 갈등이라는 건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기에 반호진은 우송덕의 결정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잘했네. 오해는 미연에 방지하는 게 제일 좋으니까.”
“또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는 걸 아이들에게도 주지시키고 싶었습니다. 지금 먹고 자는 것, 배우는 것 모두 문주님이 지원해 주시기에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건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자칫 잘못하면 충성심을 강요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어.”
반호진이 평소답지 않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감사하고 믿어 주는 건 고맙지만 때론 그게 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랬기에 반호진은 냉정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건 없고. 적당히 하자고, 적당히. 못하고 있다면 내가 한 소리 하겠지만 우 의원이나 아이들이나 잘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너무 과하게만 하지 마. 어쨌든 크게 힘들지는 않다는 뜻이네?”
“예.”
우송덕이 반호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야 무상문주인 반호진을 위해서 그리 행동했다지만 당사자가 싫어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기에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의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받아. 선 조치 후 보고 해도 괜찮으니까. 다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알겠습니다.”
한마디로 독자적인 권한을 주겠다는 말에 우송덕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그를 믿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 의원을 비롯해서 의술을 배우는 아이들은 모두 의평각(醫平閣) 소속이 될 거야. 의평각주는 당연히 우 의원이고.”
“제, 제가 말씀이십니까?”
“그럼 누가 해? 본문에서 우 각주보다 의술이 더 뛰어난 사람이 있나?”
꿀꺽!
우송덕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상상도 못 한 직위에 크게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의평이라는 이름에서 우 각주도 짐작했겠지만 난 적어도 의술만큼은 모두에게 평등했으면 좋겠어. 우 각주도 알잖아? 아프면 얼마나 서러운지. 치료비가 엄청나게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앓는 병은 대부분 작은 것들이니까.”
“소인이 좀 더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그렇다고 우 각주의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하지는 말고. 적당히, 알지?”
“예.”
“이 말을 하려고 보자고 한 거야. 거창하지는 않아도 나름 임명식인데 얼굴은 보면서 해야지?”
우송덕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송덕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격려와 더불어 잘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창가에 서서 뒷짐을 지고 있던 반호진의 고개가 집무실의 출입문으로 향했다.
미세한 기척이 느껴져서였다.
똑똑.
“들어와.”
“예.”
시선이 닿기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반호진이 상대방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끼이익.
짧은 대답과 함께 문이 열리며 흑의무복을 입은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외모였는데 갑자기 불려 와서 그런지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앉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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