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장. 비움의 미학. -03
유호량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초절정고수라는 다섯 글자가 그의 가슴을 뒤흔들어서였다.
절정의 마지막 경지임과 동시에 초월경을 앞둔 경지가 바로 초절정이라는 경지였다.
초일류의 경지 때 마주하는 절정의 벽과는 비교도 하지 않는 게 초월경의 벽이지만 그 앞에 서는 무인들은 극소수였다.
“……제가 오를 수 있을까요?”
“못 오르실 것 같습니까?”
“솔직히 힘들 것 같습니다. 목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유호량이 소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괜히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속담이 있는 게 아니었다.
과욕으로 패가망신한 경우가 수두룩했기에 유호량은 목표로 하기는 하되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미리 한계를 정해 놓는 건 좋지 않습니다만.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실패할 거라고 해도 자기 자신만은 스스로를 믿어야 합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도 믿지 못합니다.”
“으음.”
유호량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였다.
“또 믿음은 때론 기적을 만들기도 합니다.”
“기적이라.”
“엄청난 일만 기적이 아닙니다. 사소한 것들 중에도 기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다만 대부분은 그걸 운이 좋다고 표현할 뿐이죠.”
“가능할까요?”
“유 호법님이 어떤 마음가짐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데 느낌이 묘했다.
부정적인 느낌보다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당사자인 유호량조차도 자신하지 못하는데 이상하게도 반호진은 믿는 듯했다.
“꿈은 무조건 크게 잡으라는 말도 있으니 한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다면 적어도 후회는 남기지 않을 테니까요. 당장 조운이만 보더라도 늘 말하고 다니지 않습니까.”
“천하제일인을 노린다고 하더군요. 허허허.”
당차다 못해 도발적이기까지 한 서조운의 발언을 떠올리며 유호량이 웃었다.
자기 딴에는 진심이라지만 제삼자가 보기에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웬만한 사람은 갖지 못할 패기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유 호법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제 꿈은…….”
순간 유호량은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막연하게 무림고수가 되어 강호를 활보하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명확하게 어떤 무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였다.
무림고수의 의미도 너무 광범위했다.
절정고수인지, 최절정고수이니, 초절정고수인지도 정하지 않았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살아남는 데 급급하지 않으셨습니까. 꿈도, 야망도 최소한의 여유가 있어야 가질 수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근데 조금 충격적이네요. 제 자신에게 실망감도 들고. 이렇게나 생각이 없었다니.”
“모두 비슷비슷합니다. 꿈과 목표를 명확하게 설계하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죠.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더더욱 드물고요. 오히려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지요. 저 역시 비슷했었고.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다음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랄까요. 그러니 너무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잘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유호량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묘하게 반호진의 말이 위안이 되어서였다.
게다가 어차피 그는 시작부터 늦었었다.
그러니 늦었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으니까요. 당장 저만 하더라도 냉혈한이라고 뒤에서 손가락질하지 않습니까.”
“문주님께서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과 비슷합니다. 남들의 평가, 오지랖 모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이라는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입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요.”
“……!”
유호량이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거를 후회하고 다른 이들의 뒷담화에 신경 쓰기보다는 차라리 앞날을 준비하는 게 훨씬 건 유익하고 건설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대련 한번 할까요?”
“저는 좋습니다!”
“몸도 적당히 풀리셨을 테니 바로 시작하죠.”
“예.”
기쁨도 잠시 유호량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무상문에 적을 두면서 반호진과 몇 번 비무를 하기는 했으나 이런 기회가 흔한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또한 반호진을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오시죠.”
“그럼, 가겠습니다.”
소천검을 천천히 뽑으며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을 보며 유호량도 애병을 뽑았다.
그러면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스윽.
이제는 제법 숙달된 호천도법의 기수식을 취함과 동시에 호천심공으로 완벽하게 전환시킨 내공이 단전에서부터 흘러나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중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은 두 발과 도를 움켜쥐고 있는 오른손이었다.
적당히 예열된 몸에 공력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 자리를 잡자 유호량은 땅을 박찼다.
쉬이이익!
호천도법, 호천심공과 함께 새로 익힌 상승절학인 비천신보(飛天神步)가 펼쳐졌다.
과거 그가 익힌 보법이나 경신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승무공답게 순간적인 가속도가 엄청났다.
그럼에도 내공소모는 얼마 안 되었고.
스하아앗!
새삼 비천신보의 대단함을 느끼며 유호량이 참격을 뿌렸다.
왼쪽 아래에서부터 사선으로 도를 휘둘렀던 것이다.
한줄기 빛살처럼 눈부신 섬광을 토해 내며 뿌려진 도강(刀罡)이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스윽.
그러나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간 도격을 반호진은 너무나 가볍게 회피했다.
옆으로 짧게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으로 피해 냈던 것이다.
절묘하게 도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반호진은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도가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에 드러난 빈틈을 놓치지 않은 것이었다.
“흡!”
휘두른 도가 회수되지 않은 상태에서 파고드는 일격에 유호량이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놀란 건 아니었다.
반호진과의 대련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이런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었다.
그렇다 보니 이 정도로는 당황하지 않았다.
타아앗!
그 사실을 증명하듯 유호량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이미 뻗을 대로 뻗은 도를 회수하기보다는 땅을 박차서 뒤로 이동하는 걸 택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도도 회수되기에 유호량으로서는 일거양득이었다.
스윽.
다만 문제는 유호량의 움직임이 반호진의 눈에는 훤히 보인다는 것이었다.
유호량도 나름 무림에서 구르고 구른 노련한 무인이었으나 반호진이 쌓은 경험에 비하면 일천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 유호량이 익히고 있는 세 가지 무공 다 반호진이 창안한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딱 한 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잠시나마 벌어졌던 간격을 원래대로 만들었다.
쉬이익!
도강이 서린 유호량의 애병과 달리 반호진의 소천검에는 흔한 검기 하나 서리지 않았다.
그러나 평범해 보이는 장검이 유호량에게는 너무나 두렵게 다가왔다.
제아무리 강철을 두부 가르듯 자를 수 있는 도강도 상대방에게 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반대로 검기 하나 서리지 않은 검이라도 심장이나 머리가 꿰뚫리면 죽었다.
“크읍!”
때문에 유호량은 반호진의 일검을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보여도 내강(內罡)이 서려 있을 수도 있기에 맨몸으로는 절대 받아 낼 마음이 없었다.
도로 막을 수 없다면 무조건 피해야 했다.
스윽. 스으윽!
아주 미세한 소성과 함께 반호진의 검세가 가장 취약한 점을 노리고서 파고들었다.
유호량이 가장 막기 힘들고 까다로운 부분만 집요하게 노렸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호량의 이마는 물론이고 목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하나하나가 모두 치명타였기에 유호량의 체력과 심력이 빠르게 소모되었다.
‘……반전이 필요해.’
유호량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황이야 늘 벌어졌기에 익숙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승부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반호진이 아무리 비교불가의 존재라고 해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건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기에 유호량은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꽈아아앙!
지금까지 반호진은 간결하고 깔끔한 검놀림으로 유호량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했다.
굳이 충돌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 굳이 부딪쳐서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기에 반호진은 일부러 충돌을 피했다.
그런데 그걸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이 유호량이 우직하게 밀고 들어왔다.
“차합!”
유호량으로서는 나름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이대로 방어만 하다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못 한 채 제풀에 지쳐 쓰러져서 패배를 시인할 게 분명했기에 유호량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를 휘둘렀다.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다.
까아아앙!
그런 유호량의 노력이 하늘에 닿은 모양인지 처음으로 충돌음이 들려왔다.
더불어 거대한 반탄력이 오른손 손목에서 느껴졌다.
단 한 번의 충돌에 어마어마한 부하가 손목에 걸린 것이었다.
“큭!”
순간적으로 손목이 부러진 것 같은 고통에 유호량의 입술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비집고 흘러나왔다.
나름 참아보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호량의 고통은 시작일 뿐이었다.
끄그그긍!
여전히 맞닿아 있는 검과 도에서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유호량의 도가 무기력하게 밀리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힘으로 반호진이 유호량의 도를 밀어낸 것이었다.
터엉!
소천검을 이용해 천천히 도를 밀어내던 반호진이 이내 팔을 가볍게 튕겼다.
반동을 이용해 유호량을 날려 버린 것이었다.
물론 유호량도 순순히 밀려날 수 없다는 듯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굳건히 버티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특유의 완급조절로 몸의 중심을 비틀어 버렸기에 유호량은 속수무책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따앙! 땅!
힘겹게 물러나는 유호량을 반호진은 무자비하게 두들겼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반호진은 반격할 틈을 일절 주지 않았다.
단순히 힘과 기세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유호량이 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마치 유호량의 움직임을 조종하듯이 말이다.
“집중하세요.”
“……예!”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느리지만 이상하게도 반호진의 검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유호량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한데 그 순간 반호진의 나지막한 한마디가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잘 보세요.”
유호량이 두 눈을 부릅떴다.
반호진이 괜한 말을 할 리가 없기에 검로와 초식을 제대로 보려는 것이었다.
더해서 지금까지 반호진이 보여 주었던 검격들을 떠올렸다.
스으윽.
‘느리다? 아냐. 간결해. 불필요한 움직임이 전혀 없어. 그래서 느리지만 빠르게 느껴진 건가? 하지만 맥을 끊는 방식이라면 굳이 검속이 빠를 필요가 없어. 후발선제의 핵심이 그거이니까. 근데 그건 지금 내 수준에서는 절대 펼칠 수 없고. 대체 무얼 보라고 하시는 거지?’
유호량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의도가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보여 주기만 했다.
깡! 깡! 깡! 깡!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단순해서 더욱 밋밋하게 느껴지는 검격을 받아 내며 유호량이 눈썹에 힘을 줬다.
억지로 두 눈을 부릅뜨니 자연스레 눈썹에 힘이 쏠린 것이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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