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장. 상생의 길. -04
남장하고 지낼 때의 습관이 남아 있는 모양인지 사마의성이 중성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뒤늦게 자신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왜? 개성 있고 좋구만.”
“개성이요?”
“응. 독특하잖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것보다는 낫지. 일단 다른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은 확실하게 될 거 아냐. 네가 일개 여식으로 남을 거면 모를까 사마세가주가 될 몸인데 이왕이면 유명해지고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게 낫지.”
“그래도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지 않을까요?”
“뭐, 선택은 네가 하는 거지. 여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사마세가주가 될 것인지.”
사마의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언뜻 보기에는 사소한 것 같지만 깊게 파고들면 절대 그렇지 않아서였다.
“아니면 둘 다 가져도 되고. 제삼의 선택지는 늘 있는 법이니까.”
“맞아요. 꼭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지요.”
“그러니까.”
사마의성이 씨익 웃었다.
안 그래도 그녀 역시 그걸 떠올렸었다.
굳이 하나만 골라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상황이나 능력이 여의치 않다면 하나밖에 고를 수 없겠지만 반대로 모든 게 가능하다면 굳이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청림표국이 원래 알고 있는 합격진을 개량시켜 주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공개하기를 꺼려 할 수도 있겠지만요.”
“공개가 불가한 것과 가능한 것들이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꼭 청림표국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아마 네가 한다고 하면 금가장과 하오문에서도 입질이 올 거야.”
“그렇겠네요.”
사마의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 역시 반호진과 같은 생각이어서였다.
게다가 두 곳은 반호진이 굳이 다리를 놓아주지 않아도 사마의성 혼자서도 가능했다.
“무리하지는 말고. 다른 곳은 몰라도 눈은 한 번 망가지면 온전히 회복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 알지? 특히 너한테 시각은 더더욱 중요하니까.”
“명심할게요.”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우 의원에게 가.”
“네.”
맑고 고운 사마의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반호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을 다 했으니 이만 나가려는 것이었다.
아직 서산에 해가 걸려 있다고 하나 늦은 시각에 사마의성과 단둘이 있어서 좋을 게 없기에 반호진은 눈치껏 자리를 파했다.
“그럼 고생해.”
“보통은 반대 아닌가요? 고생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한다고 들을 네가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그러니 응원할 수밖에.”
사마의성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응원이라는 두 글자가 가슴에 화인처럼 박혀서였다.
별거 아닌 한마디였으나 사마의성에게는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근데 자기관리도 능력인 거 알고 있지?”
장난기 섞인 반호진의 말에 사마의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난 간다.”
“조심히 가세요.”
“오냐.”
사마의성의 깍듯한 배웅을 받으며 반호진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예의 기척 없는 걸음걸이로 말이다.
잠시 후 반호진의 모습이 계단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터가 좋아.”
오랜만에 무상문을 찾은 금호연이 흐뭇하게 웃었다.
점점 커져 가는 무상문의 모습이 아이가 자라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물론 무상문이 그의 자식은 아니었으나 원래 아이는 남의 아이가 더 귀여운 법이었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자기 자식은 사랑스럽지만 남의 아이는 귀여웠기에 금호연은 웃으며 반호진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똑.
호위대를 건물 밖에 대기시킨 채로 금호연은 홀로 집무실 앞에 섰다.
이제는 몇 번 찾아와서 그런지 호위대주도 굳이 이곳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접니다, 무상문주님.”
“들어오세요, 소장주님.”
“예.”
습관적으로 황의무복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금호연이 짤막한 대답과 함께 반듯한 느낌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담담한 얼굴로 서 있는 반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라니요.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왔습니다. 하하하.”
“보내 주신 정보 덕분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정보를 구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고요. 감사 인사를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금호연이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정보를 구하느라 상당히 노력한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대단한 기밀을 알아낸 건 아니었다.
약간의 발품을 팔면 누구나 알아낼 수 있는 정도였기에 금호연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까요.”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알아내고도 걱정을 좀 했습니다. 제 쪽에서 나름 확실한 것들만 선별해서 보냈는데 맞지 않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오문과 교차확인을 하셨을 테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앉으시죠.”
짧지 않은 인사를 마친 후 반호진이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차호를 들어 미리 데워 두었던 차를 찻잔에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우선 몸부터 녹이시지요. 어젯밤에 눈도 왔는데.”
“눈이 온 무상문의 풍경은 또 다르더라고요. 묘하게 운치가 있는 게 위치를 잘 잡으신 것 같습니다.”
“풍수지리를 잘 아는 동생이 있는 덕분에 운 좋게 구했습니다. 그 녀석 때문에 소장주님께 드릴 말씀도 있고요.”
“저에게요?”
금호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들은 게 일절 없어서였다.
“예. 우선 본래 하려던 이야기부터 할까요?”
“저는 좋습니다. 소소한 담소도 좋고요.”
금호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설사 얻는 게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무의미하지 않아서였다.
누구는 앉고 싶어도 앉지 못하는 자리가 지금 이 자리였다.
그렇기에 금호연은 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많이 바쁘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문주님과 대화할 시간은 늘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잠을 줄이면 되는 일이니까요.”
“역시 사는 게 가장 힘든 것 같습니다.”
“그렇죠. 다 각자의 고충이 있으니까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적어도 소장주님은 관심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반호진이 물었다.
이미 마음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거래는 명확해야지 대충해서는 절대 안 되었다.
“물론입니다. 사실 몇 번이고 말을 꺼내고 싶었는데 혹 주제넘지는 않을까 싶어 주저했습니다. 괜히 미운털이 박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너무 많이 가신 것 같습니다.”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으나 너무 심하게 조심하는 듯해서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게 장주님의 지론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고요.”
“명언이네요.”
“다들 알고는 있지만 지키기가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소장주님은 좋은 금가장주가 되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금호연이 옅게 웃었다.
사실 아직도 그는 자신이 금가장의 소장주라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걱정이 되기도 했고.
이 공자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금은 보였기에 부담감이 상당했다.
“서신에 간단하게 적은 것처럼 이번에 규모를 조금 더 키울 예정입니다. 소장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가 빚을 지고는 편히 못 자는 성격이기도 하고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결코 이런 걸 노리고 새외무림의 정보를 넘겨 드린 게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선의로 도와주신 것을요. 그래서 더더욱 빨리 갚고 싶은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짜로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도 이제는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가 있어서요.”
“저는 이렇게 제안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막말로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인원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밝은 얼굴로 금호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림표국도 일정 인원 이상은 받지 않았던 만큼 금가장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기준은 지난번 청림표국 때와 같습니다. 효율을 따져 보았을 때 그때가 가장 효과적이더라고요. 그리고 인원은 오십 명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십 명이나요?”
금호연이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인원이 많아서였다.
그의 정보망에 의하면 이번에 청림표국을 비롯해서 여러 표국들이 합동으로 표사들을 무상문에 보내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 만큼 금호연은 반호진이 허락할 인원이 소수일 거라고 추측했는데 오십 명이나 받아 준다고 하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적습니까?”
“그럴 리가요.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많아서 놀랐습니다. 저는 본장에 할당될 인원이 열 명 안팎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혼자였다면 소장주님께서 생각하신 정도였을 겁니다. 근데 도와주는 사람이 늘어서요. 또 한 번 해 봤다고 요령이 생기기도 했고요.”
“그렇겠네요. 일단 저로서는 무조건 좋습니다.”
혹시라도 반호진이 말을 바꿀까 싶어 금호연이 빠르게 대답했다.
반호진의 성격상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계약서를 쓰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 오십 명으로 하죠.”
“감사합니다!”
확정하듯 말하는 반호진의 두 손을 금호연이 덥석 붙잡았다.
그 정도로 그는 현재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아직 반호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소장주님께 한 가지 더 제안할 게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안은 아니고 다리를 놓아주는 겁니다만.”
“경청하겠습니다.”
반호진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모습에 금호연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한 것이었다.
“혹시 기문진법에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있기는 합니다만…….”
금호연이 말을 끌었다.
너무 광범위했기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어서였다.
“의성이가 현재 두 가지 과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마세가만의 독문적인 기문진법을 경험해 보는 것. 다른 하나는 본래 익히고 있던 합격진을 개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숙달시키는 과정까지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혹시 둘 다 가능한지요?”
금호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방금 전보다 더욱 뜨거운 눈빛으로 말이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권유만 할 수 있습니다. 조율은 의성이와 하셔야 합니다.”
“아!”
“다만 첨언을 하자면 조율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소장주님께 제일 먼저 말한 거거든요.”
금호연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눈치 빠른 그답게 반호진의 말을 단박에 이해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이릅니다. 아직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저는 그저 다리를 놓아줬을 뿐입니다.”
“문주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도 없었겠지요.”
“잘 조율되면 그때 감사 인사를 받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웃으며 대답한 금호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고받은 대화에서 사마의성이 기다리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었기에 바로 움직이려는 것이었다.
“서로에게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예.”
반호진은 직접 문을 열어 주며 금호연을 배웅했다.
한데 얼마 후 황매향이 그를 찾아왔다.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바로 데려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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