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장. 상생의 길. -03
사람이라는 게 나이를 먹을수록 솔직해지기가 어려웠다.
남녀사이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반호진은 모용희수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남자도 쉽게 할 수 없는 걸 모용희수가 하고 있었기에.
‘또 모르지. 내가 대신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한다면야.’
무공과 무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나 마찬가지인 게 반호진이었다.
호칭을 정리한 지금도 모용희수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여자로서 호감은 있지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모용희수의 발걸음에 맞춰 한발 나아간 것뿐이었다.
즉 첫발을 뗀 것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반호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꾸욱.
반호진이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모용희수는 남몰래 허벅지 위에 올린 두 손을 꼭 쥐었다.
호칭을 새롭게 정립한 의미를 모르지 않아서였다.
목석을 넘어 철상(鐵像)처럼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하지 않던 반호진이 처음으로 다가와 주었기에 모용희수는 그게 너무나 기뻤다.
누구는 작은 변화에 너무 기뻐하는 게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가능성이 아예 없던 것에서 희박하게나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 차이는 너무나 컸다.
‘내 시도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어.’
그중 모용희수를 특히 뿌듯하게 만든 건 바로 이것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반호진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모용희수는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침착해야 해. 너무 앞서가면 안 돼. 지금처럼만 하자.’
여전히 상념에 잠겨 있는 반호진을 힐끔거리며 모용희수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순간이지만 거기에 취해 실수를 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모용희수는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으응? 그냥 이것저것? 오빠도 길게 생각하더만.”
“뭐, 나도 이것저것. 오늘 막 도착했으니까.”
“신경 쓸 게 많기는 하겠다. 나에 대해서도 그렇고.”
“너는 간단했어. 딱히 생각이랄 게 없었지.”
여인이라기보다는 여동생을 대하듯이 반호진이 말하자 모용희수가 다시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피식 웃었다.
첫술에 배부르려고 하는 건 욕심이었다.
애초에 큰 걸 바라지도 않았고.
“좋게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
“이게 좋게 말해 주는 거야.”
“너무 막 대하는 것 같은데.”
“그럼 다시 예의를 갖춰 줄까?”
“아니.”
모용희수가 배시시 웃었다.
애써 좁힌 거리를 원래대로 벌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좁히면 모를까.
그래서 모용희수는 사소하고 작은 것들로 일단 대화의 물꼬를 텄다.
창밖으로 보이는 석양을 사마의성이 가만히 지켜봤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그럼에도 질리지 않았다.
몇 번의 전쟁을 겪었기에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아서였다.
똑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기척도 없었건만 대뜸 들리는 소리에 사마의성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방문객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들어오세요.”
“입을 열기도 전에 들어오라고 하네?”
“누구인지 아니까요.”
“소리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게 아닐 텐데.”
“지금 이 순간에는 오빠가 가장 유력하니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는 사마의성을 보며 반호진은 피식 웃었다.
말로는 이기기가 힘들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어서였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많이 지저분하죠? 치우려고 했는데…….”
반호진의 시선이 너저분한 책상 위로 향하자 사마의성이 얼굴이 붉어졌다.
나름 우선순위를 정하고서 정리를 한다고 했는데 딱히 정돈된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어질러진 건 책상만이 아니었다.
“아니. 원래 책사들의 방이 이렇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너만의 규칙이 있을 테고.”
“어떻게 아셨어요?”
“일부러 이런 거 아냐? 혹시라도 찾아온 불청객이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도록.”
사마의성이 두 눈이 살짝 커졌다.
분명 그런 의도도 없지 않아 있어서였다.
“놀라기는. 네 방을 보면 딱 나오잖아. 먼지 한 톨 없던데.”
“결벽증은 아니에요. 그냥 깨끗하고 정리정돈된 걸 좋아하는 것뿐이에요.”
“애들 생각은 다를걸.”
반호진이 키득거렸다.
극구 부인하는 모습이 웃겨서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조금 있긴 있어요. 근데 결벽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럼 초기인 걸로.”
“그것도 좀.”
자리에 앉는 반호진에게 차를 따르며 사마의성이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병적인 수준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농담이야. 더러운 것보다는 깔끔한 게 낫지.”
“그렇죠.”
“요즘 정신없지?”
“그렇기는 한데 힘들지는 않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하고요.”
“무리하지는 말고.”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한마디였으나 그럼에도 사마의성은 웃었다.
이게 반호진이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애초에 걱정을 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사마의성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요즘 고민이 많지?”
“없다고는 말 못 하겠네요.”
“언제까지 쓰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이자가 붙기는 해도 금액이 그리 크지는 않으니까. 혼자 쓴다면야 넉넉하겠지만 앞으로 가솔들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테니.”
“맞아요.”
사마의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그녀는 고민이었다.
당장은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저축해 둔 자금이 점점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농경지와 목장이 있기는 한데 수익이 생기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리지.”
“그것도 그렇지만 두 개 다 제 재산이 아니니까요. 당장 저만 해도 얹혀살고 있는 처지고요.”
“일을 안 하는 건 아니잖아? 경계도 서고, 이것저것 자잘한 일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솔들을 먹이고 재우는 비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이건 어때?”
반호진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마치 이게 본론이라는 듯이 목소리를 낮게 깔자 사마의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반호진은 그런 사마의성의 두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너에게 중요한 건 안정적인 수익 구조잖아. 이건 뭐, 나도 마찬가지긴 한데.”
“무상문은 체계가 어느 정도 잡혔죠. 심하게 낭비하지 않는 이상 재정에 무리가 가지 않는 상태이니까요. 처음에 비하면 규모가 커지기는 했으나 솔직히 오빠의 위상에 비하면 아직 작은 편이고요.”
인원이 많이 늘기는 했으나 여전히 규모가 큰 편은 절대 아니었다.
현재의 규모도 어쩌다 보니 하나둘 늘어나서 지금의 상태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사마의성은 나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따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니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내실이야. 근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다시 돌아가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묘안이 있으세요?”
“거창하게 묘안까지는 아니고, 조금 응용을 하자는 거지. 이왕이면 의성이 네가 가장 잘하는 것으로.”
“제가 잘하는 것이라면…….”
“기문진법이지.”
사마의성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예상했던 말이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의아했다.
“기문진법이요?”
“응. 사마세가의 기문진법은 제갈세가와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으니까. 더구나 지금도 꾸준히 연구하고 있잖아? 경험과 자료들이 계속해서 쌓이고 있고. 그걸 십분 활용하는 거지. 얼마 뒤에 청림표국에서 표사들이 오는 거 알고 있지? 거기에 한 가지 과정을 더 추가하는 거야. 방식은 네가 편한 걸로. 다양한 기문진법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거나 혹은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합격진을 판매하거나.”
사마의성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런 식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크게 놀란 것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방법이 꽤나 솔깃하다는 점이었다.
사마세가의 비전은 공개하거나 판매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지만 다른 것들은 달랐다.
“으음.”
“네가 알고 있는 것들도 많을 테고, 혹은 이번 기회에 새롭게 만든 것들을 실험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경우들에 대한 자료들도 수집하는 거지. 다양한 실험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맞아요.”
사마의성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단점보다는 장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물론 가뜩이나 하고 있는 일이 많았기에 이렇게 할 경우 업무가 더욱 늘어나겠지만 적어도 사마의성에게 있어 손해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조건 이득이었다.
“강요하는 건 아냐. 난 그저 이런 방법도 있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거야. 즉 결정은 네가 하는 거지.”
“당연하지요. 근데 이건 어떻게 떠올리신 거예요?”
“그냥 갑자기?”
“오빠는 이런 쪽으로도 천재인 것 같아요. 영감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팍팍 떠오르는 거예요?”
“영감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사마의성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하며 반호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따로 시간을 내서 궁리한 적도 없었고.
그냥 어쩌다 보니 우연히 걸린 것에 불과했다.
“대단한 거 맞아요. 저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찾아냈으니까요. 진짜 상상도 못 한 방법이에요.”
“너도 언젠가는 떠올렸을 거야. 지금은 생각이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어서 떠올리지 못한 걸 수도 있고. 누가 뭐래도 나보다는 네가 똑똑하잖아?”
“언제나 그렇듯 늘 중요한 건 시기죠. 시간은 그 어떤 가치보다 위에 있으니까요.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무슨 수를 써도 되돌아오지 않죠.”
“맞아. 내 마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탈인경이라 불리는 경지에 오른 무인도 어찌할 수 없는 게 바로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즉 저는 엄청난 시간을 번 거죠. 오빠 덕분에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근데 너무 공치사하지는 마. 이것도 다 네가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 반대로 청림표국에서 원치 않을 수도 있어. 혹은 가격이 맞지 않거나. 이 조율은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해. 사마세가의 일이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딱 다리를 놓는 것까지야.”
“그 정도만 해 주셔도 저로서는 감지덕지죠. 성사시키지 못하면 제 능력이 부족한 거고요.”
어찌 보면 냉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마의성은 절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반호진이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일부러 이런 환경을 만드는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또한 이제 그녀의 나이 약관이었다.
스물이 된 만큼 이제부터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해야 했다.
“내가 보기에 거절할 것 같지는 않지만. 네가 가진 패가 워낙에 좋아서 말이지.”
“사실 그런 자신감도 없지 않아 있기는 있어요.”
“없지 않아?”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너무 겸양을 떠는 것 같아서였다.
비록 규모로 따지면 제갈세가와 비교할 수 없지만 능력적으로는 크게 뒤떨어진다고 반호진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제갈세가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니까요. 이건 객관적인 사실이고요.”
“가문의 규모로 따지면 그렇지. 근데 현재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가능성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네가 꿀릴 게 없지.”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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