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장. 상생의 길. -02
호위하듯 앞장서서 걸어가는 삼형제를 따라가며 반호진이 사마의성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장원 내의 일은 사마의성이 가장 잘 알 수밖에 없어서였다.
잠시 본가에 다녀왔던 모용척, 모용희수 남매와 달리 사마의성은 계속 장원에 있었기에 반호진은 지나가는 식으로 물었다.
“부총관이 워낙에 일을 잘해서 별일은 없었어요.”
“우리 황 부총관이 야무지기는 하지. 유화나 휘경이, 휘성이는?”
“세 사람 다 가족과 함께 지내서 그런지 별문제 없었어요. 오히려 기뻐하던걸요. 이렇게 가족 모두 건강히 새해를 맞이하는 게 처음이라고요.”
“그럴 만하지.”
자식이 가벼운 고뿔만 걸려도 하루 종일 걱정하는 게 부모였다.
그런데 보통 병도 아니고 절맥이었으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였다.
더욱이 백휘경과 백휘성 형제는 혼혈인 데다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만큼 온갖 차별과 냉대까지 받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더더욱 이번 새해가 특별하고 행복했을 것이었다.
“문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처럼 연무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대련을 하고 있던 쌍둥이 형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했다는 듯이 허리를 숙이며 소리치자 반호진은 피식 웃었다.
“너희 둘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부모님께 잘하고, 조운이에게도 잘하고.”
“문주님께도 잘하겠습니다!”
“나까지 올 필요는 없고.”
오늘도 어김없이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는 쌍둥이의 대답에 반호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보니 이제는 무덤덤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문주님께서는 저희 형제의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건 조운이고.”
반호진은 다시 한번 정정해 주었다.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직접적으로 쌍둥이들과 예유화를 치료한 건 서조운이었다.
그러니 생명의 은인이라는 호칭은 그가 아니라 서조운에게 가는 게 맞았다.
“저희는 문주님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 누나?”
“저도 그래요. 문주님이 아니었으면 조운 오빠가 살아 있지 못했을 테고, 그럼 저희들도 여전히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렸을 거예요. 그리고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지막 말만 받으마.”
쌍둥이 형제와 달리 오늘도 차분한 예유화의 말을 들으며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째 나이를 먹어 갈수록 미모는 개화하는데 표정은 똑같았다.
그래서인지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얼음여왕이라고 불렸다.
얼음공주도 있고, 얼음미녀도 있는데 하필이면 왜 얼음여왕이라 불리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할게요.”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이왕이면 그 마음가짐을 두 녀석에게도 알려 줘.”
“노력해 볼게요.”
“그래. 할 일들 해.”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연무장 말고도 갈 곳이 많아서였다.
이제는 인원도 많이 늘었기에 살펴봐야 할 것들도 많았다.
“알겠어요. 근데 조운 오빠는 언제 와요?”
“글쎄? 때가 되면 알아서 오겠지? 오는 중일 수도 있고.”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으신 모양이네요?”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었지. 나는 날아다니니까.”
“아.”
무심한 척 지나가는 투로 물었던 예유화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편해진 만큼 반호진이 어떤 존재인지 잠시 망각한 것이었다.
사람과 똑같지만 반호진은 탈인경이라 불리는 초월경에 오른 무인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동하는 방식이 보통의 무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 궁금하면 개방이나 하오문에 물어봐. 의성이나 부총관을 통하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 그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에요.”
“그래.”
예유화가 황급히 대답했다.
동시에 그녀의 양 볼이 확 붉어졌다가 가라앉았다.
거짓말처럼 창졸간에 수습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예유화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걱정되는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네!”
“그렇다면야. 아, 모용 소저. 혹시 이따가 시간 있으십니까?”
조용히 모용척과 함께 뒤따라 걷고 있던 모용희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만남을 청하자 놀란 것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빨랐다.
“네. 있어요.”
“그러면 이따가 잠시 보죠.”
“알겠어요.”
보통의 여인이라면 한 번쯤 튕기겠으나 모용희수는 그러지 않았다.
어쭙잖은 밀고 당기기가 통하지 않은 위인이 반호진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하는 모양새가 단둘이 보자는 듯했기에 모용희수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의성이도 저녁에 시간 있나?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니고 저녁 먹은 후에.”
반호진의 시선이 사마의성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 모용희수를 바라보던 눈빛과 똑같은 말투로.
“오빠가 보자고 하면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 내야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저는 언제라도 괜찮아요.”
“그건 내가 싫어. 다 큰 처자의 방을 야심한 시각에 찾아갈 수는 없으니까.”
쓸데없이 단호하게 선을 긋는 반호진의 모습에 사마의성이 옅게 웃었다.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충대충, 건성건성 하는 것 같은데 뒤돌아서 생각해 보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어떻게 보면 참 언행불일치인데 그게 또 밉거나 기분 나쁘지 않단 말이야.’
사마의성이 시선이 자기 할 말만 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반호진에게로 향했다.
정확히 목장을 향해 걸어가는 반호진의 양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주변을 경계하며 따라 걷는 삼형제가 있었다.
또르륵.
아직 해가 떠 있었지만 차를 따르는 모용희수는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 단둘이, 그것도 자신이 원해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라 반호진이 먼저 청한 자리였기에 모용희수가는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여기,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조금 어색하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문주님께서 이렇게 직접 만남을 청하신 건 처음이니까요.”
반호진에게 찻잔을 밀며 모용희수가 솔직하게 말했다.
돌려서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게 그녀의 성격에 맞기도 하고.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고마운걸요. 조금 걱정도 되고요.”
“걱정이요?”
“예. 혹시나 떠나라고 하지는 않을까 해서요.”
기쁨과 동시에 든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모용희수는 대화를 나누는 지금도 조마조마했다.
“가주님께서는 별말씀 없으셨습니까? 걱정이 많으실 텐데.”
“제 고집을 알아서 그런지 별말 안 하시더라고요. 짐작하실지 모르겠는데 제 고집도 오빠 못지않거든요. 그리고 그 고집은 바로 아빠에게서 왔고요.”
“어머니한테서 물려받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엄마보다는 아빠가 더 쇠고집이더라고요.”
모용희수가 살포시 웃었다.
자신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모용궁 말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의 고집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엄마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의외네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고요. 근데 가족만이 아는 게 있으니까요.”
“하긴.”
고개를 갸웃거리던 반호진이 이내 수긍했다.
대외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집안에서 보이는 모습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어서였다.
거기다 모용궁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반호진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응원해 주시더라고요.”
“좋은 아버지네요.”
“제 성격을 아니까 포기하신 거죠.”
모용희수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그녀가 도도하거나 새침할 거라 생각하지만 반호진이 직접 겪어 본 모용희수는 꽤 왈가닥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지만 모용척에게는 그대로 드러냈기에 반호진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만큼 모용 소저를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믿음으로는 그렇게 하기 힘드니까요. 여느 아버지와는 다르게 모용세가를 이끄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에 가서 직접 말씀드리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건 저도 의외인데 걱정했던 것보다 파장이 그리 크지 않더라고요.”
“파장이라 하심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혼삿길이 막히지 않았더라고요.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혼담이 줄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확 줄지는 않았더라고요.”
모용희수가 고개를 숙인 채로 양손을 꼼지락거렸다.
어찌 보면 자랑이라고도 할 수 있었기에 민망해서였다.
“원래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다고 저희가 특별한 관계인 것도 아니고. 한 집에서 단둘이 산다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그건 아니니까요. 척이도 있고.”
“그래서 좋게 보는 것 같아요.”
“모용 소저가 싫은 사람은 그냥 싫을 겁니다. 뭘 해도 싫어할 거고요.”
“그렇죠.”
“사설이 길었네요. 오늘 모용 소저께 시간을 내 달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이 말을 꺼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던 모용희수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는 건가요?”
“예. 저번에 저에게 물어보셨죠.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네에.”
“이제부터는 호칭을 편하게 하죠.”
“정말요?”
가뜩이나 컸던 모용희수의 눈이 더 이상 커지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그 정도로 놀란 것이었다.
상상도 못 한 반호진의 말에 모용희수는 놀람 반, 기쁨 반의 표정으로 반호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싫으시다면 안 하고요.”
“아니에요! 저는 좋아요!”
“그래.”
대답하기 무섭게 곧바로 말을 놓는 반호진의 모습에 모용희수는 환하게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오빠.”
“왜?”
“그냥 불러 봤어요.”
조심스럽게 부르자 곧바로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모용희수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라 부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이게 그렇게 감격할 일인가?”
“그럼요. 저를 포함해서 오빠를 오빠라 부르는 사람이 셋밖에 없잖아요. 사마 소저도 최근에서야 부르기 시작했고. 사마 소저를 제외하면 제가 두 번째잖아요.”
“너무 의미를 두는 것 같은데.”
반호진이 그답지 않게 머쓱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차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왜 허락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용기의 대가라고나 할까. 여인의 몸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니까. 나는 솔직히 이번에 가면 안 올 줄 알았거든. 너도 알겠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영원하지가 않으니까. 그렇다고 네가 인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지금도 모셔 가려는 곳은 많잖아?”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모용희수가 씨익 웃었다.
예전에 자주 보여 주던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그러니 그에 맞게 대우해 줘야 하지 않겠어?”
“오빠는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요. 종잡을 수 없는 게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너도 참 솔직해.”
“제 매력이에요. 알고 있죠?”
“글쎄다. 매력인지는 잘 모르겠네.”
의문이 짙게 서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모용희수가 새치름한 표정으로 지그시 노려봤다.
불만이 선명하게 담긴 시선이었으나 그 눈빛에도 반호진은 담담하게 차를 들이켰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이건 내 생각이잖아. 네 생각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지. 또한 다른 사람들과도.”
“치잇!”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이 대꾸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모용희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행동이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런 모용희수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호칭이 편해지니 행동도 덩달아 편해진 거라 생각해서였다.
‘나 역시 편해지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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