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장. 상생의 길. -01
생사고락을 거의 함께하다시피 한 일행들을 향해 반호진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성과는 결코 혼자서만 이룩한 게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그 공을 모두에게 돌렸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오히려 나를 빼놓고 갔으면 서운했을 걸세.”
남궁호가 빙그레 웃었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번 일정은 그에게도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늘 당하기만 했던 남궁세가가 처음으로 새외무림에 제대로 된 복수를 했기에 남궁호는 그 어느 때보다 뿌듯했다.
죽어서 조상들을 뵐 면목이 섰다고나 할까.
“나도 마찬가지네. 그보다 오 년씩 분담하게 한 거, 이간질시키려고 한 거 아닌가?”
“맞습니다.”
소림사까지 오는 내내 이 공자와 함께했기에 당우혁은 묻고 싶어도 물을 수가 없었다.
일행들에 비해 수준이 낮다고 하나 이 공자 역시 절정고수였다.
때문에 조심한다고 궁금증을 꾹꾹 눌러 놓고 있다가 이제야 물었다.
“그 짧은 사이에 거기까지 생각한 건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북해빙궁 입장에서는 소궁주라고 하나 대체자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둘 다 죽더라도 북해빙궁주가 건재한 이상 자식을 새로 볼 수도 있고요.”
“나이가 육십이 넘은 걸로 아는데.”
“신체 나이는 젊지 않습니까. 겉보기에는 마흔 정도로만 보이니까요.”
“하긴.”
당우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냥 고수도 아니고 초월경에 오른 무인이 북해빙궁주였다.
마음만 먹으면 새로 자식을 낳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실제로 무인들 중에 일흔이 넘은 나이에 자식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저희도 대비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자식을 포기한다면 소궁주보다는 이곳에 있는 이 공자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승산이 없다는 걸 뻔히 아는데 과연 말을 바꾸겠나?”
“모르죠. 측간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가 다른 게 사람 마음이지 않습니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요.”
“흐음.”
당우혁을 시작으로 남궁호와 팽만철, 개왕이 턱을 쓰다듬었다.
마지막 말이 묘하게 뇌리에 남아서였다.
“가장 좋은 건 자중지란이지만요. 아마 소궁주도 그 나름대로 불만이 있을 겁니다.”
“오 년 후에는 자신이 이곳에 와야 하니까.”
당우혁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북해빙궁이 어떤 결단을 내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대비만 한다면 적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십 년 뒤에도 걱정이 없었고.
“든든하구먼.”
“너무 부담을 주시는 거 아닙니까?”
“흘흘! 반 문주는 모를 걸세. 반 문주가 이렇게 떡 하니 있어 주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말일세. 북해빙궁의 봉문이 끝난 십 년 후에도 서른셋밖에 되지 않으니.”
잠시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다시 가벼워졌다.
다른 이들은 십 년 뒤에 나이를 먹고 전성기에서 내려오겠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할 것이기에 긴장이 풀어졌다.
개왕의 경우 십 년 후에 살아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고.
“이왕이면 새로운 강자들이 계속 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저 못지않은 무인이요.”
“글쎄. 그건 좀 힘들지 않겠나?”
개왕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된다면야 중원무림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냉정하게 그런 이가 또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당장 반호진에 견줄 만한 무인은 무림의 역사에서도 단둘밖에는 떠오르지 않았기에 개왕은 물론이고 다들 회의적이었다.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만약 또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개방에서 나왔으면 좋겠네.”
“하북팽가에서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남궁세가도 한 발 걸치겠습니다.”
“사천당가라고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대놓고 욕심을 숨기지 않는 팽만철, 남궁호, 당우혁의 발언에 개왕은 물론이고 운왕과 운상이 웃음을 터트렸다.
반면에 이미 반호진을 제자로 둔 담현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이제는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장문인.”
“허허허. 고생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다시 청해성까지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마무리를 짓는 자리인데 당연히 빈도도 함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호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쳐다봤으나 운왕은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하남성에서 청해성까지의 거리는 상당했으나 그렇다고 오고 가지 못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묘강, 서장, 북해까지 다녀왔기에 오히려 소림사에서 곤륜파까지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졌다.
게다가 돌아다닌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았기에 운왕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약속하신 겁니다?”
“예. 약속드리겠습니다.”
“허허허허.”
운왕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기뻐하는 것이었다.
“흠흠! 나는 뭐 없나?”
“우리도 나름 고생했는데 말일세.”
기쁨의 웃음을 터트리는 운왕의 모습에 팽만철과 당우혁이 슬그머니 한 발을 걸쳤다.
운왕만 고생한 게 아니라 그들도 고생을 했기에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두 분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한도는 있습니다. 말이 안 되거나 허황된 부탁은 안 됩니다. 제 능력 밖은 저도 힘듭니다.”
“에잉!”
“크흠! 역시 그런가.”
첫마디에 잔뜩 기대한 표정을 짓던 팽만철과 당우혁이 매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하지 않는 모습에 둘은 물론이고 남궁호도 입맛을 다셨다.
“욕심이 과하면 안 되지요.”
“맞습니다, 운상 진인.”
“그래도 마음은 가볍습니다. 소림검신에게 빚을 하나 지워 두었으니. 허허허.”
시끌벅적한 네 사람과 달리 운상과 담현은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불가와 도가의 제자였기에 딱히 욕심이 없어서였다.
이번 일도 대의를 위해서 나선 것이었지 따로 욕심이 있어서 움직인 게 아니었다.
그래도 공짜로 준다는 걸 마다할 마음은 없었다.
“호진이가 사정이 안 된다면 제가 대신 갚겠습니다.”
“그것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방장.”
“예.”
운상의 대답을 들으며 담현이 빙긋 웃었다.
대부분의 공을 그에게 넘겼으나 담현을 비롯해서 일행들은 알고 있었다.
이번 여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게 반호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반호진이 있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고, 성공할 수 있었다.
“북해빙궁의 이 공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정 구역을 벗어나지는 못하겠으나 그 안에서는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줄 생각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쌍한 아이니까요.”
“최소한의 자유는 보장을 받겠군요.”
“몰래 도주하지만 않는다면요.”
“그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중원은 처음이라 길도 모를 테고. 거의 날다시피 오지 않았습니까.”
담현은 만약의 사태를 거론했으나 운상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북해빙궁의 이 공자는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친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한 상태였기에 향수병이 생기지 않는 한 북해빙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지는 않을 터였다.
“다른 의도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요.”
느릿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던 운상이 움찔거렸다.
소림사에서 도망친다고 해서 꼭 북해빙궁으로 돌아갈 거라는 보장은 없어서였다.
오히려 복수하기 위해 북해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숭산에서 빠져나가기가 쉽지는 않겠지만요.”
“설사 빠져나간다고 해도 개방의 눈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거외다. 개방에서도 예의주시할 계획이라.”
잠자코 대화를 듣고만 있던 개왕이 끼어들었다.
모든 책임을 소림사에만 전가할 생각이 그에게는 없었다.
북해빙궁주는 소림사에 둘째 아들을 맡겼으나 주시하는 건 상관없었다.
또한 이 역시 북해빙궁주도 알고 있을 테고.
“든든합니다.”
“흘흘흘! 방장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구려. 소림의 옆에는 개방이 늘 함께하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제는 개방의 방주도 아니고 늘 말하던 대로 뒷방 늙은이가 되었으나 개왕의 영향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약해진 건 사실이나 볼모로 붙잡혀 있는 북해빙궁의 이 공자를 지켜보는 것 정도는 충분했기에 개왕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개인적으로 그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고.
늘 두들겨 맞기만 했었기에 이번의 복수는 너무나 통쾌했다.
‘우리야 좋지만 같은 세대들은 힘들겠어. 향후 최소 오십 년은 전성기를 구가할 테니.’
미지근한 차를 술처럼 들이켜며 개왕이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고만 있는 반호진을 힐끔 쳐다봤다.
자신들 세대야 미래가 걱정되지 않아 좋지만 반호진과 동세대들은 절망할 게 분명해서였다.
하지만 어느 세대건 빛과 어둠은 공존했었다.
고난과 시련 없이 탄생하는 영웅은 없었고.
월! 월! 월!
숭산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무상문의 상징 아닌 상징이 된 삼형제가 달려 나와 반겨 주었다.
장원 안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운 좋게 반호진이 딱 도착했을 때 마주친 것이었다.
“녀석들.”
얼마나 반가운지 꼬리로 날 수 있을 것처럼 미친 듯이 흔드는 모습에 반호진이 타박하듯 말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해도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진심으로 반겨 주니 기분이 안 좋으려야 안 좋을 수가 없어서였다.
너무나 열정적인 환대에 반호진은 어쩔 수 없이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의 머리와 목을 차례대로 만져 주었다.
헥헥헥!
오랜만에 느끼는 주인의 손길이라서 그런지 삼형제 모두 두 눈을 감으며 손길을 음미했다.
물론 꼬리는 여전히 한쪽 방향으로 쉴 새 없이 돌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오빠.”
“형님!”
애교를 넘어 질척이는 삼형제를 적당히 쓰다듬어 주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반호진이 도착한 걸 알고서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세 사람만 있는 걸 보니 조운이와 이륭이는 아직 안 온 모양이네?”
“예. 이륭이야 방천문주님과 함께 움직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조운이 이 녀석은 개념이 없습니다. 아무리 새해라지만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다니.”
“오랜만이니까.”
“큰형이 장가갈 때 가지 않았습니까.”
“너야말로 왜 이렇게 일찍 복귀한 거야?”
불만을 토로하는 모용척의 모습에 반호진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사마의성이야 갈 곳이 없다지만 모용척과 모용희수는 달라서였다.
심지어 모용척은 소가주이고 모용희수는 하나뿐인 금지옥엽인데 다른 이들과 달리 일찍 돌아와 있자 반호진은 의아했다.
“의성이 혼자만 남겨 두기가 좀 그래서요.”
“호오. 그래?”
“아,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남매끼리는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는 반호진의 시선에 모용척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절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어서였다.
남매간의 우애라면 모를까 사랑은 전혀 없었다.
“부정이 너무 격렬한데? 과한 부정은 긍정과 같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절대, 절대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코 절대 아닙니다!”
“고생하셨어요.”
극구 부인하는 모용척을 도와주기 위해 모용희수가 입을 열었다.
늘 그렇듯이 다소곳한 자세로 화사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조심스레 건넨 인사를 정중하게 받아 주는 반호진의 모습에 모용희수는 내심 서운했다.
사마의성과 모용척에게 대하는 것과는 너무 달라서였다.
알고 있었고, 처음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모용희수는 못내 씁쓸했다.
“별일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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