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장. 봉문(封門). -03
“싸움을 잠시 멈추고 대화를 했으면 하오.”
“대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일존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한데 그 말에 팽만철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사생결단을 낼 기세로 싸우다가 뜬금없이 대화를 하자고 하자 의아한 걸 넘어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심지어 담현과 운상조차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던 일존의 시선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북해빙궁주에게 향했다.
부친인 전대 북해빙궁주만큼이나 천재로 이름 높았던 현 북해빙궁주이지만 아직 덜 여물었다.
그래서 일존으로서는 전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전에 죽은 전대 북해빙궁주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북해빙궁주 역시 죽을 게 뻔해서였다.
비참하지만 북해빙궁의 미래를 위해서 그로서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라니! 다 이긴 싸움을 우리가 왜 포기해야……!”
툭.
헛소리를 지껄이는 일존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던 팽만철의 입이 다물어졌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였다.
옆으로 다가 온 남궁호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강하게 찔렀기에 팽만철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결정권이 없다고.
-끄응!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귓전으로 파고드는 남궁호의 전음에 팽만철이 입을 다물었다.
친절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한마디였으나 말귀를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팽만철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굳이 끝까지 갈 필요는 없지 않겠소.”
“……대장로.”
팽만철을 일별한 일존의 시선이 담현을 지나 반호진에게로 향하자 북해빙궁주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일존이 무슨 의도로 싸움을 중지한 건지 알았기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쳐다봤다.
“북해빙궁주는 끝까지 갈 생각인 것 같소만.”
“그렇다면 따라야 하겠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소.”
전음을 주고받는 모양인지 일존과 북해빙궁주의 시선이 강렬하게 교차했다.
그런데 무슨 대화를 주고받은 것인지 북해빙궁주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근데 이제 와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공멸을 원한다면 피할 생각이 없소이다.”
“공멸이라.”
담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속절없이 당한 주제에 공멸을 말하자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심지어 반호진은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다.
적진의 한복판이고 수적으로 확연하게 밀린다고 하나 담현은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소이다. 끝까지 간다면 우리가 패배한다는 걸. 하지만 장담컨대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오. 본궁을 멸문시키는 것도 불가능할 테고.”
서로 흥분해서 좋을 게 없기에 일존은 차분한 어조로 끝까지 갔을 경우에 대해서 말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으로 말했기에 담현이나 운상, 개왕도 부정하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 싸운다면 승리할 수는 있겠으나 북해빙궁을 지우는 건 힘들 터였다.
더욱이 북해는 북해빙궁의 영역이기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담현과 일행들에게 불리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이제야 대화할 생각이 들었나 보오.”
“칼자루는 이쪽이 들고 있으니까 말이오.”
담현의 말에 일존이 쓴웃음을 지었다.
씁쓸하지만 사실이었기에 일존은 부정하지 못했다.
대신 지금의 감정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쯤에서 싸움을 멈췄으면 하외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봉문(封門)을 하겠소.”
“봉문?”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담현의 두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모두가 놀랐다.
다만 담현만은 빠르게 신색을 회복하고는 북해빙궁주를 쳐다봤다.
일존이 대장로라고 하나 북해빙궁의 수장은 그였다.
결국 최종결정권자는 북해빙궁주였기에 담현은 북해빙궁주를 지그시 바라봤다.
“……대장로의 뜻이 나의 뜻이오.”
“호오. 작은아버지에게 다 맡긴다는 것이오?”
“…….”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 인척 관계였기에 북해빙궁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저 분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좋소이다. 시주와 대화를 나누겠소.”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오?”
“그 전에 확실하게 해 둘 게 있지 않소이까? 봉문을 하겠다고는 했으나 기간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안 하지 않았소.”
“어느 정도를 원하시오?”
“십 년. 여기에 북해빙궁주의 아들을 볼모로 데려가겠소.”
일존이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전형적인 조건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일존에게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싸움이 잠시 멈췄을 뿐 승자와 패자는 명백했다.
그러나 패자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수용을 할 마음은 없었다.
“십 년은 너무 길다고 생각하오.”
“잊은 것 같은데, 시작은 북해빙궁이 했소이다.”
“…….”
일존의 입이 다물어졌다.
더불어 북해빙궁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한번 명분을 짚자 할 말이 없어서였다.
명분에서도 힘에서도 밀리자 일존은 암담해졌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했다.
“또한 불모를 포기할 생각도 없소. 우리가 원하는 건 딱 이 두 가지뿐이오.”
“딱 두 가지라고 하기에는 전부 다인 것 같소만.”
“수용할 수 없다면 다시 시작하면 되오. 우리는 아쉬울 것이 없소이다.”
담현이 강하게 나갔다.
말한 대로 칼자루는 이쪽이 쥐고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천하제일인은 아닐지 몰라도 천하제일검이라 할 수 있는 반호진이 있었기에 강하게 요구하는 게 가능했다.
막말로 거부하면 원래 계획대로 끝장을 보면 될 일이었다.
“으음!”
그걸 일존 역시 모르지 않았기에 섣불리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전투가 다시 시작될 테니까.
하지만 십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십 년 후라고 해 봤자 서른셋이로군.’
슬쩍 반호진을 쳐다본 일존이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새삼 반호진의 나이가 얼마나 사기적인지 느낄 수 있어서였다.
역대 북해빙궁주 중 가장 천재라던 전대 북해빙궁주도 스물셋일 때는 반호진의 반의반도 되지 못했었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소이다.”
“칠 년은…….”
“거절하오.”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담현이 말했다.
흥정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서였다.
일존과 북해빙궁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단 두 개뿐이었다.
그의 제안을 수용하든가, 거절하든가.
그 외에는 없었다.
담현은 그 기색을 표정과 분위기로 드러냈다.
“숙부님……!”
그걸 읽은 북해빙궁주가 일존을 불렀다.
흥정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느껴서였다.
“아들이 두 명 있던데.”
“음?”
무거운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질 때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그쳐 가고 있었기에 반호진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십 년이 길면 두 명이서 번갈아 볼모로 있으면 되지 않나? 오 년씩. 겸사겸사 서로 얼굴도 보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일존은 물론이고 북해빙궁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이어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의 제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둘 다 사로잡으려는 계획 아닌가?”
“잊은 모양인데,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두 아들을 잡을 수 있어. 아니, 잡는 걸 넘어 죽일 수 있지. 못 할 거 같아?”
“으음!”
북해빙궁주를 지난 반호진의 시선이 먼 후방으로 향했다.
정확히 두 아들이 있는 곳을 쳐다봤던 것이다.
그 시선에 북해빙궁주가 침음을 흘렸다.
“강요는 아니야. 다만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말해 준 것뿐. 싫으면 한 명만 보내면 돼. 이 정도 선택권은 줄 수 있어. 안 그렇습니까?”
“맞아.”
담현이 흔쾌히 대답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오직 담현만은 반호진의 저의를 알고 있었기에 고민하지 않았다.
반대로 북해빙궁주의 두 아들들은 잔뜩 긴장했다.
특히 둘째 아들은 가뜩이나 새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만약 한 명만 보내야 한다면 형이 아닌 그가 볼모로 갈 확률이 높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반호진의 제안이 선택되길 바랐다.
혼자 죽는 것보다는 둘이 같이 죽는 게 나아서였다.
“들었지?”
“받아들이겠다. 대신, 우리도 한 가지 요구조건이 있다.”
“요구조건이라. 단어가 마음에 안 드는데.”
반호진이 인상을 쓰자 북해빙궁주는 물론이고 일존도 움찔거렸다.
담현이나 다른 이들이 강하기는 하나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당대의 중원제일인이라 할 수 있었기에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그쪽의 제안을 모두 수용하는 만큼 하나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일단 들어 보지.”
“내 아들이 머무는 곳은 소림사였으면 한다.”
반호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말한 대로 큰 요구는 아니어서였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요구에 반호진은 담현을 쳐다봤다.
“받아들이겠소.”
“후우.”
순순히 수용하는 담현의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이지만 그는 담현을 인정했다.
소림사의 방장일뿐더러 인덕으로도 유명한 이가 담현이어서였다.
“순서는 어찌하시겠소?”
“둘째부터 보내겠……소.”
북해빙궁주가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말이라도 편하게 하고 싶었으나 반호진을 자극할 수도 있었기에 북해빙궁주는 담현과 마찬가지로 반존대를 했다.
“알겠소이다.”
“정확히 오 년 후 중립지역에서 교대를 했으면 하오만.”
“나쁘지 않구려. 받아들이겠소.”
조율이 빠르게 타결되자 북해빙궁주는 둘째 아들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초반이 가장 위험했기에 소궁주인 첫째보다는 둘째를 택한 것이었다.
그걸 둘째 아들도 모르지 않기에 똥 씹은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마지막 인사 정도는 나눌 시간을 드리겠소.”
“괜찮소.”
“……괜찮습니다.”
지금 이별하면 오 년 뒤에야 다시 볼 수 있기에 담현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주려고 했지만 두 사람 다 거절했다.
북해빙궁주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둘째 아들은 서운함에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알겠소이다.”
담현도 그러한 기색을 읽었기에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대신 허공섭물로 근처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튼튼한 밧줄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적당한 길이로 사등분한 다음 이 공자의 사지에 하나씩 묶었다.
“왜 이걸…….”
“자, 하나씩 받으시구려.”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사지에 밧줄이 하나씩 묶이게 된 이 공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포박이라면 차라리 이해를 하겠는데 그게 아니었기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담현을 쳐다봤다.
그러나 담현은 설명 대신 남궁호와 팽만철, 당우혁에게 밧줄을 하나씩 건넸다.
“마지막 하나는 제가 잡겠습니다.”
“내가 잡아도 되는데.”
“어찌 사부님께서 들게 만들겠습니까.”
“그렇다면야.”
담현이 들고 있던 밧줄을 반호진이 건네받았다.
그와 동시에 이 공자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서였다.
작별 인사가 필요 없다고 말해서인지 반호진과 세 사람은 별다른 말도 없이 그대로 몸을 띄웠고, 이 공자도 덩달아 남쪽으로 날아갔다.
***
“후우. 좋구나. 이 평범한 차가 어찌나 생각나던지.”
“그 말에는 나도 동감.”
후르릅!
숭산에 도착한 팽만철은 고급 차도 아닌 평범한 차 한 잔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중원에서야 흔하디흔한 차였으나 새외에서는 달랐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팽만철은 감동한 표정으로 차를 연신 들이켰고, 그건 남궁호와 당우혁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을 하긴 했는데, 힘들지는 않았어. 아주 즐거웠다고나 할까.”
“보람찬 일정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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