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장. 봉문(封門). -02
당당히 정문을 향해 걸어가던 팽만철이 환하게 웃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상상만 했었던 일을 직접 벌이게 되자 너무나 흥분되었던 것이다.
구천문과 포달랍궁을 때려 부수는 것도 즐거웠지만 역시 남자라면 당당하게 정문부터 부수고 들어가는 게 최고였다.
그런데 그건 남궁호와 당우혁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두 사람 다 살짝 들뜬 표정이었다.
“적이다!”
“습격이다!”
“정문으로 모여라!”
뎅뎅뎅뎅!
뒤늦게 반호진 일행을 발견한 북해빙궁도들이 악을 썼다.
휘몰아치는 눈 폭풍에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평소보다 더욱 크게 소리친 것이었다.
그 덕분인지 우왕좌왕하던 북해빙궁도들이 빠르게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와 주면 나야 고맙지.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 주니.”
“우웨액!”
“도, 독이다……!”
다급히 모여드는 북해빙궁도들을 보며 당우혁이 씨익 웃었다.
이번이 세 번째지만 복수의 시간은 늘 달콤했다.
더구나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당우혁은 너무나 편했다.
사천당가의 가주로서가 아닌 한 명의 무인으로서만 싸우면 되어서였다.
“크하하하! 이 몸이 바로 도왕이니라! 저승에 가거든 도왕이 보냈다고 하거라!”
순식간에 수백 명의 적들이 모여들었지만 팽만철은 눈곱만큼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거패도를 휘둘렀다.
아군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에 정말 마음껏 혼원벽력도를 펼쳤다.
뻐어어엉!
반면에 남궁호와 운왕, 운상은 소리 없이 강했다.
야단법석을 떠는 팽만철과 다르게 조용히 달려드는 북해빙궁도들을 도륙했다.
그들의 검격이 뻗어 나갈 때마다 수십 명의 육신이 절단 났다.
퍼퍼펑! 퍼퍼퍼펑!
그리고 담현과 개왕도 놀고 있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는 듯이 거침없이 살수를 뿌렸다.
“길을 열어라!”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반각이 채 되기도 전에 이백여 명이 시체로 화하자 후방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한데 평궁도들이 열어 준 길을 걸어 나오는 이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눈보라가 몰아친다고 하나 습격한 여덟 명의 얼굴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다들 안면이 경직되어 있었다.
“새로운 육존(六尊)인가.”
“천하십대고수가 여기까지 올 줄이야.”
전대의 육존과 비교하면 확연히 젊은 여섯 명의 강자들을 보며 반호진이 무심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놀랐다.
여섯 명 중 무려 네 명이 초월경에 올라 있어서였다.
저벅저벅.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일행들 역시 육존을 은연중에 샅샅이 살펴보고 있을 때 평이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북해빙궁도들이 다시 한번 좌우로 벌어졌다.
심지어 육존마저도 말이다.
잠시 후 백호(白虎)를 연상케 하는 백발의 장년인이 부리부리한 안광을 번뜩이며 걸어 나왔다.
“신임 북해빙궁주로군.”
“……소림검신.”
“나를 아나?”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군.”
한눈에 자신을 알아보는 북해빙궁주의 모습에 잠시 놀랐던 반호진이 이내 수긍했다.
북해빙궁주 입장에서는 부친을 죽인 원수나 다름없는 게 그였다.
그러니 단박에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언제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확실하게 해 둘 게 있는데, 억울한 건 우리야. 먼저 중원을 침공한 건 북해빙궁이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복수할 권리가 있어.”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명분은 중요하니까.”
“백도인답군.”
북해빙궁주가 대놓고 콧방귀를 끼었다.
역시나 전형적인 백도인의 모습이어서였다.
쓸데없이 명분을 중시하는 모습에 북해빙궁주는 혀를 찼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갑자기 나타난 여덟 명으로 인해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법왕, 검왕, 개왕, 염왕, 독왕, 도왕, 운왕에 이어 검신이라.’
북해빙궁주의 움켜쥔 손바닥 안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그 정도로 긴장한 것이었다.
일곱 명만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중원제일인이라 할 수 있는 반호진까지 함께 있자 그는 암담해졌다.
그러나 막막하다고 해서 꼬리를 말 수는 없었다.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니고 북해였다.
그렇기에 상대하기 버겁다고 해서 물러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죽더라도 싸워야 해. 도망은 있을 수 없어.’
북해빙궁주가 이를 악물었다.
만약 북해가 아니라면, 이곳이 아니었다면 그는 퇴각이라는 선택지를 골랐을 터였다.
굳이 불리한 상황에서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는 것밖에 없었다.
‘승산이 없는 건 아냐.’
여덟 명은 분명 강했다.
눈앞에 있는 여덟 명이 중원무림 전력의 반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겠지만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결단을 내린 모양이야.”
“어느 집주인도 집을 버리지는 않지. 더욱이 그쪽에는 갚아야 할 빚도 있고.”
쿵! 쿵! 쿵! 쿵!
북해빙궁주의 말에 세 방위를 포위하고 있던 북해빙궁도들이 일부러 발을 굴렀다.
다수인 점을 강요해 심리적으로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쳐들어온 여덟 명이 엄청난 고수란 걸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이곳은 그들의 영역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하는 곳이었기에 다들 결연한 표정과 눈빛으로 반호진 일행을 노려봤다.
“빚이라니. 전대 북해빙궁주는 자폭했는데.”
“아버지를 죽게 만든 건 네놈이니까.”
“그건 부정하지 못하겠군. 근데 네 상대는 내가 아냐.”
온몸에서 투기(鬪氣)를 발산하던 북해빙궁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말이냐고 표정으로 묻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나름 적장인데 그만한 대우는 해 줘야 하는 게 맞으니까.”
고요한 전장을 가르는 불호에 북해빙궁주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낯선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간 것이었다.
“법왕?”
“나는 아무래도 막내라서 말이지.”
“……나를 무시하는 건가?”
“귀가 막혔나? 대우해 주는 거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까드득!
북해빙궁주가 이를 가는 소리가 눈보라를 가르며 선명하게 들렸으나 반호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조롱으로 받아들이든 말든 그에게는 중요치 않아서였다.
애초에 북해빙궁주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사부가 죽고도 지금처럼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궁금하군.”
“가능하겠어?”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호언장담하는 북해빙궁주가 우스워서였다.
전대 북해빙궁주라면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으나 지금의 북해빙궁주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법왕이 죽은 뒤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나 지켜보겠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아미타불.”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현이 움직였다.
나지막한 불호와 함께 북해빙궁주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더불어 육존과 장로들도 움직였다.
각자 만만하다 생각하는 이들로 상대를 정한 것이었다.
스스슥!
그중 가장 많은 인원이 배치된 곳은 바로 반호진의 앞이었다.
나이는 가장 어릴지 몰라도 여덟 명 중 제일 강한 인물이 반호진이었다.
가장 위험한 존재가 반호진인 만큼 장로들을 비롯해서 서열 높은 실력자들이 대거 포위망을 구축했다.
포달랍궁과 마찬가지로 인해전술과 차륜전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인원수로 밀어붙이기라. 어쩜 이리 똑같은지. 아니, 별수 없나.”
“공격해라!”
반호진이 중얼거리는 순간 장로들이 지시와 함께 일제히 달려들었다.
죽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자신들만으로는 힘들다는 걸 알기에 장로들은 최대한 힘을 빼는 데 집중했다.
다른 이들과 싸우는 육존들이 합류할 때까지 버티는 게 장로들의 계획이었다.
“전대 궁주님의 복수를 하는 거다!”
“으아아아!”
두려움을 없애고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장로 한 명이 전대 북해빙궁주를 거론했다.
가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복수심을 끌어낸 것이었다.
그러자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은연중에 주눅 들어 있던 북해빙궁도들이 살기를 줄기줄기 뿌려 대며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스극.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반호진은 몸소 보여 주었다.
덤벼드는 북해빙궁도들을 무참하게 베어 버렸던 것이다.
모두 북해빙궁 내에서 고르고 고른 고수들이었으나 반호진의 일검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했다.
“큭!”
“젠장!”
그나마 북해빙궁에서 서열 백 위 안에 들어가는 이들 정도만이 반호진의 검격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반호진이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지 않아서였다.
이번에 새로 창안한 검술을 시험 삼아 펼치고 있었기에 그나마 받아 내는 것이었다.
만약 반호진이 처음부터 달마삼검을 펼쳤다면 진즉에 반 이상이 썰려 나갔을 터였다.
‘확실히 이론과 실전은 괴리가 조금 있네.’
달마삼검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차기 무상문주가 익힐 무상검법 역시 따로 손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문도들이 익힐 호천검법(護天劍法)은 달랐다.
정한 기준에 맞게 수준을 맞추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기에 반호진은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간극을 좁혔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북해빙궁도들은 버거워했지만.
‘다른 곳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네.’
여유롭게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반호진은 주변을 살폈다.
다른 이들의 상황이 어떤지 확인했던 것이다.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으나 북해빙궁의 본진인 만큼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에 반호진은 그 부분에 중점을 두고서 일행들을 살펴봤다.
‘초월경의 고수들도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고.’
북해빙궁답게 구천문이나 포달랍궁보다 보유하고 있는 초월경의 숫자가 많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갓 초월경에 오른 수준이었기에 반호진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부터 강했던 이들이 수많은 전장을 겪으며 백전노장이 되었기에 어찌 보면 걱정하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콰앙! 꽈과과광!
그 생각을 증명하듯 여기저기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초월경의 고수이기에 즉사는 면했으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초월경에 오르지 못한 이들은 상황이 더 안 좋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이들을 일별하며 반호진은 검을 재차 휘둘렀다.
뻐어어엉!
찬란하게 빛나는 금광과 함께 검강이 쭉쭉 뻗어 나갔다.
휩쓸고 지나간 곳에 피분수를 일으키면서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검강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무리는 감히 북해빙궁도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장로들조차 제대로 막지 못해 각혈하며 주저앉았다.
“궁주님!”
“커헉!”
그때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익숙한 느낌의 신음 소리가 반호진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모두 물러나라! 명령이다!”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능히 짐작 가는 목소리에 반호진이 재차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대장로의 신분을 가진 일존(一尊)이 피를 토하듯이 소리쳤다.
뜬금없이 북해빙궁도들을 물렸던 것이다.
그런데 죽기 살기로 반호진을 붙들어 놓기 위해 달려들던 장로들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격을 멈추고 뒷걸음질쳤다.
“뭐야?”
“무슨 꿍꿍이속이지?”
한참 신나게 거패도를 휘두르던 팽만철이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물러나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사지 중 하나를 자를 수 있었는데 더 이상 싸우지 않고 거리를 벌리자 팽만철은 물론이고 남궁호도 의아한 얼굴로 일존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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