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장. 봉문(封門). -01
거패도에 묻은 시뻘건 피를 호쾌하게 털어 내며 팽만철이 다가왔다.
히죽 웃으며 걸어왔는데 그 모습이 산적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이라면 괜찮죠.”
“내가 지치면 버리고 갈 거지?”
“버리지는 않고 숙영지에서 기다릴 겁니다.”
“그 말이 그 말이지.”
팽만철이 두꺼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서운하다는 뜻을 얼굴 전체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팽만철이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속도였기에 내공 분배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대신 힘을 합치면 부담이 줄어들지 않겠나.”
“도와주게?”
“화풀이는 필요하니까. 포달랍궁주와 칠성을 잡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쉽지. 마음 같아서는 멸문을 시키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남궁호가 서늘한 눈으로 시산혈해가 된 전장을 둘러봤다.
사방에 시체와 피가 가득했으나 그의 눈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서리지 않았다.
포달랍궁의 침공으로 죽은 이들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전쟁 당시 죽은 이들 중에는 남궁세가의 가솔들도 있었다.
“나도 합류하지. 포달랍궁의 자긍심을 짓뭉개는 일이니까.”
“그 말 마음에 드는데. 자긍심을 짓밟는다라. 아주 좋아.”
당우혁의 말에 팽만철이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말이 마음에 쏙 들어서였다.
그런데 가세한 건 남궁호와 당우혁만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포달랍궁에 쌓인 게 많은 운왕 역시 슬그머니 세 사람 옆에 섰다.
스윽.
“너도 보태게?”
“저라고 쌓인 게 없겠습니까? 구천문 때야 독 때문에 다가가기가 힘들었다지만 포달랍궁은 다르니까요.”
“크흐흐흐!”
운왕에 이어 반호진까지 가세하자 팽만철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동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공력을 남겨 두고는 나머지를 전부 끌어올렸다.
웅웅웅!
근데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공력만을 남겨두고서 모두가 가용 가능한 내공을 끌어올려 강환을 생성했다.
이윽고 다섯 명 주위로 수십 개의 강환이 떠올랐다.
쑤아아앙!
각기 다른 빛을 발산하던 강환이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따로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겹치거나 부딪치지 않고 알아서 포달랍궁에 떨어져 내렸다.
쿠콰콰쾅! 퍼퍼펑!
비명 소리는 없었으나 대신 폭음과 무너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폭발로 인해 일차적으로 외벽과 건물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 주변의 고루거각들이 연쇄적으로 붕괴된 것이었다.
“가시죠, 북해로.”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이제 마지막 한 곳만 남았다.
휘이이잉!
서장의 바람도 황량하고 거칠었지만 북해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여덟 명 모두 한서불침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뼛속으로 파고드는 극한의 냉기에 다들 몸이 조금씩 경직되었다.
“아이고.”
그중 추위를 가장 많이 타는 건 개왕이었다.
절대고수도 나이는 어쩔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듯 개왕은 연신 양손으로 자신의 팔을 쓸어내렸다.
그러지 않으면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찬바람 때문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아서였다.
“괜찮으십니까?”
연신 곡소리를 내는 개왕에게 반호진이 슬쩍 다가갔다.
못 버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리할 필요는 없었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북해빙궁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기도 했고.
반드시 개왕이 필요한 건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그의 안색을 살폈다.
“춥긴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오. 그저 약간의 투정을 부리는 것이외다. 흘흘흘!”
“힘드시면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서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길은 제가 알고 있고요. 거의 다 오기도 했고.”
“그러니 더더욱 함께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그냥 돌아가겠소.”
개왕이 방금 전과 다르게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 자기도 모르게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 먼 북해까지 온 이상 개왕은 절대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길을 알고 계신다고?”
“예. 몇 년 전에 구경 삼아 북해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아니면 북해에 와 볼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왔었는데 이렇게 또 올 줄은 몰랐네요.”
“허어. 북해까지. 하긴. 젊었을 때 이곳저곳 돌아보는 게 좋긴 하외다. 반 문주도 보다시피 늙으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서 말이오.”
“개방주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공격할 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 지팡이로 몸의 중심을 잡으며 개왕이 허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정작 그의 허리는 조금도 굽혀지지 않았다.
“고 녀석은 좀 힘들어해야 하외다. 생각보다 고생을 덜해서 말이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봐야 이 늙은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알 터이고.”
“강하게 키우실 생각이시군요.”
“반 문주만 하겠소? 그나저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날씨가 이러니.”
개왕이 혀를 찼다.
새벽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날씨가 아침이 되자마자 눈보라가 몰아쳤다.
원래 북해는 눈보라가 쉴 새 없이 몰아친다고 하나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개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처럼 북해빙궁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오히려 손해는 북해빙궁 쪽이 더 클 겁니다. 초월경의 고수가 여덟 명 정도 있다면 모르겠지만요.”
“오호?”
개왕의 눈썹이 출렁거렸다.
듣고 보니 지금의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눈보라로 시야가 가려진 건 피차일반이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거리는 이쪽이 월등히 길 터였다.
“익숙해서 더 잘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 차이가 경지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니까요.”
“그것참 아주 마음에 드는 말이야.”
거구인 만큼 눈이 쏟아지는 면적 역시 큰 팽만철이 연신 눈을 씰룩이며 대답했다.
소매로 아무리 눈가를 쓸어 봤자 금세 송충이 눈썹에 눈이 쌓였기에 팽만철은 차라리 얼굴근육을 크게 움직였는데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커다란 몸처럼 얼굴 역시 컸기에 눈썹에 쌓인 눈이 잘 털어졌던 것이다.
“기습을 펼치기에는 지금의 환경이 오히려 더 좋습니다.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든 모르든 상관없지. 어차피 미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방심은 금물입니다. 여전히 북해빙궁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으니까요.”
반호진은 경각심을 일으켜 주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다들 지난 두 번의 기습 공격을 성공시키자 긴장이 풀어진 듯해서였다.
어쩌면 마지막인 북해빙궁이 가장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을 수도 있기에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방심은 금물이었다.
“아미타불. 시작과 끝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작이 아무리 좋아도 마지막이 좋지 않으면 결과적으로는 실패입니다.”
“그리고 실패하면 중원무림 역시 위험해집니다. 저희들이 사라지면 어찌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담현에 이어 운상이 말하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핵심 전력을 잃은 세력이 어떻게 되는지 여기 있는 모두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 예가 구천문과 포달랍궁이었기에 다들 얼굴이 굳어졌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무리도 잘 짓고 각자의 집으로 건강히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떠났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요.”
“나도 그렇단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무리를 잘 맺어야겠지.”
“그렇습니다.”
담현의 지지를 들으며 반호진이 먼 곳을 응시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인해 시야가 많이 가렸지만 그럼에도 반호진의 눈에는 보였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성처럼 보이는 거대한 성채가 말이다.
언뜻 보면 궁전인지 성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딱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이었다.
“어마어마하군.”
“그러게. 포달랍궁보다 더 큰 것 같은데?”
“완전 요새인데. 문파가 아니라.”
남궁호와 당우혁, 팽만철도 이제야 발견한 듯 다들 한마디씩 감상평을 내놓았다.
반면에 담현과 운상, 운왕은 담담했다.
개왕이야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놀랄 이유가 없었고.
“일단 인사부터 할까요.”
서장과 달리 북해에서는 병기를 구하는 게 어려웠다.
병기의 형태도 다를뿐더러 언어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더욱이 자는 사이에 북해빙궁에 외부인의 등장을 알릴 수도 있기에 반호진은 무리해서 병장기를 구하기보다는 보안을 택했다.
정 안되면 현장에서 강탈하는 방법도 있었고.
“여기서? 좀 더 가까이 가야 하지 않나?”
“충분합니다.”
“역시 천하제일인이라 이건가.”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옵니까? 그리고 전 아직 천하제일인이 아닙니다.”
“아니긴. 내가 보기에 비빌 만한 인물이 중원에는 없는데.”
팽만철이 능글맞게 씨익 웃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부정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건 모르는 겁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절대고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들은 모래알처럼 많으니까요.”
“너무 겸손한 것도 좋지 않아. 기만으로 보이거든.”
“그럼 중원뿐만 아니라 새외까지 포함하는 걸로 하죠.”
“새외무림이라고 해서 딱히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팽만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암만 생각해도 가능성이 희박할 것 같아서였다.
“시작하겠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쓸데없는 대화가 계속 이어질 듯했기에 반호진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구천문과 포달랍궁을 기습했을 때와 달리 여분의 병장기를 구하지 못했으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웅웅웅웅!
담현의 기운과 똑 닮은 황금빛 광채가 반호진의 장심에서 솟구쳤다.
찬란한 금광을 흩뿌리며 강환이 생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크기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작다고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부우웅!
장정의 주먹보다 작은 크기였으나 그 안에 담긴 거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기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반호진이 생성한 강환이 북해빙궁 한복판에 떨어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인지 다들 기대하는 눈빛으로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천천히 낙하하는 강환을 주시했다.
“눈보라 때문인가. 전혀 눈치채지를 못하는데.”
“자만심도 있겠지. 설마 여기까지 쳐들어올 줄은 몰랐을 테고.”
“크크크! 방심의 대가인가. 많이 아프겠는데.”
“문제는 더 아플 거라는 점이지. 이게 시작이고.”
손바닥으로 눈썹 위를 가려서 쏟아지는 눈을 차단한 팽만철과 남궁호가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천천히 떨어지던 강환이 드디어 북해빙궁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꽈아아앙!
굉음과 함께 북해빙궁이 뒤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실제로 외벽에서 먼지구름이 일었다.
동시에 충격과 공포가 뒤섞인 괴성들이 내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자아, 그럼 우리도 시작합시다. 정문은 이 노개(老丐)가 맡겠소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환경도 환경이지만 반호진이 날린 강환의 크기가 너무 작았다.
그래서 북해빙궁으로서는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 개왕이 기름을 부었다.
북해빙궁의 정문을 향해 대성에 이른 강룡십팔장을 꽂아 버린 것이다.
쑤아아앙!
새하얀 강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이 포효하듯 살벌한 파공음을 토해 내며 단숨에 두꺼운 정문을 박살 내 버렸다.
그로 인해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난데없는 습격에 북해빙궁도들이 크게 당황한 것이었다.
반대로 반호진 일행은 담담하게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런 거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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