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장. 하늘에서 내리는 단죄. -02
반호진의 손짓에 아무렇게나 땅바닥을 뒹굴고 있던 피 묻은 검 한 자루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 모습에 일행들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다들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맞아. 그냥 갈 수는 없지. 암!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까지 선물은 남겨 주고 가야지.”
“저 녀석들은 딱히 원하지 않겠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먹여 줘야 하지 않겠어? 직접 주둥이에 말이지. 크흐흐흐!”
반호진이 철검 한 자루를 허공섭물로 들어 올리는 걸 보기 무섭게 팽만철과 남궁호도 똑같이 칼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아직 반 가까이 남아 있는 공력을 칼에 주입시켰다.
부르르르!
칼이 최대한 버틸 수 있는 만큼 진기를 주입하자 날이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금세 한계치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그 칼을 팽만철은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향해 날렸다.
슈우우욱!
그 뒤로 반호진과 일행들이 날린 검들이 따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높이 솟구치지 않았다.
굳이 공격을 숨길 필요가 없기에 검들과 도는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한번 구천문의 대장원에 떨어졌다.
꽈과과광! 콰아앙!
“마지막 선물로 화끈하고 좋네.”
“가시죠.”
곳곳에서 일어나는 먼지구름을 일별하며 반호진이 몸을 돌렸다.
볼일을 다 봤기에 미련 없이 움직인 것이었다.
“그러자고.”
“다음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당우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두 눈을 번뜩이며 홀로 다음을 기약했던 것이다.
잠시 후 당우혁도 땅을 박차며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
서장의 성도라고 할 수 있는 랍살(拉薩)에 도착한 반호진은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피풍의로 얼굴의 거의 가리다시피 한 채로 움직였는데 피풍의를 입고 있는 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중원에서 상행을 온 상인들도 꽤 많았고.
“다행히 간자는 없는 듯하구나. 전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구천문의 소식도 아직 전해지지 않은 듯합니다.”
“그럴 수밖에. 인편은 물론이고 전서응보다 우리가 더 빠르지 않더냐.”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헐렁한 피풍의로 몸을 가리고 있던 담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설사 구천문이 포달랍궁에 연락을 했다고 해도 속도에서 상대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렇긴 하죠. 그걸 노리고서 경로를 짜기도 했고요.”
“포달랍궁이라.”
반호진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담현의 시선이 언덕 위에 지어진 듯한 희고 붉은색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을 지그시 바라봤다.
소림사가 낮고 넓은 느낌이라면 포달랍궁은 좁고 높았다.
건물에 심적으로 압박을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포달랍궁은 위압감이 있었다.
“부서지면 새로 짓는 데 고생 좀 하겠네요.”
“허허허허!”
“흘흘흘!”
생각지도 못한 반호진의 한마디에 담현과 개왕, 운상이 웃음을 터트렸다.
말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놀라워서였다.
특히 똑같은 건물을 보고 있음에도 하는 생각이 다르다는 게 담현은 신기했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네.”
“부수는 건 팽가주님 전문이지 않습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기는 하지. 저 건물이 심히 거슬리기도 하고.”
팽만철이 퉁방울만 한 눈으로 성채와 비슷한 포달랍궁을 노려봤다.
구천문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 보게 되자 가슴 속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전쟁 때 치고받던 기억과 함께 자연스레 살기가 일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마음껏 날뛰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구천문하고는 다르니까.”
“구천문보다는 남아 있는 전력이 더 강할 겁니다.”
“그래 봤자 예전만 못하잖아?”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단순히 복수심 때문에 구천문과 포달랍궁을 노린 게 아니었다.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했고, 충분히 할 만하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움직였다.
“흘흘! 개방과 금가장, 하오문의 정보력이 합쳐졌다면 못 알아낼 게 있겠소이까.”
“그래도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알려지지 않은 존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개왕과 달리 반호진은 신중했다.
구 할 이상 확신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변수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하면 언제라도 원래의 계획대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걱정 마시구려. 반 문주의 신신당부를 다들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을 터이니. 더구나 갈 곳이 아직 한 곳 더 남아 있지 않소이까. 여기서 심각한 부상을 당하면 북해에는 자연스럽게 가지 못하니 다들 몸을 적당히 사릴 것이오.”
“크게 흥분하지만 않으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시작하자고.”
개왕과 반호진의 대답을 들으며 팽만철이 이를 드러냈다.
지금껏 꾹꾹 눌러 놓았던 투기를 서서히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시에 등에 메고 있던 길쭉한 봇짐에서 날이 넓은 대도 한 자루를 꺼냈다.
묘강에서와 달리 서장은 사천성과 청해성에서 넘어오는 상인들이 많았기에 중원 양식의 병장기들을 구하는 건 쉬웠다.
스르릉.
그렇기에 팽만철은 물론이고 다들 자기 손에 익은 형태의 검들을 꺼냈다.
품질도 구천문 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좋았기에 주입되는 공력의 양도 달랐다.
웅웅웅웅!
그 사실을 증명하듯 공명음 자체가 달랐다.
더욱 크고 묵직하게 울리는 공명음과 함께 열댓 개의 칼들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하다 보면 는다는 말처럼 모두가 한 자루가 아닌 두 자루씩 칼을 던진 것이었다.
“시작은 내가 하겠소이다!”
쑤아아앙!
뒤이어 개왕이 호쾌한 목소리로 쌍장을 내질렀다.
포달랍궁의 새하얀 벽면을 향해 강룡십팔장을 극성으로 펼친 것이었다.
정문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에도 개왕은 일부러 한쪽 벽을 선택했다.
어차피 다 때려 부술 거 어디를 고르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쿠콰콰쾅!
개왕의 화끈한 시작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았던 칼들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구천문 때와 마찬가지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낙하한 것이다.
물론 위력은 구천문 때보다 훨씬 강력했다.
고루거각이고 사람이고 할 거 없이 폭발에 휩쓸린 것들은 모조리 산산조각 났다.
“저, 적이다!”
“기습공격이다!”
“이젠 내 차례인가.”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들과 비명 소리를 들으며 당우혁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 역시 본격적으로 힘을 쓰려는 것이었다.
혼란스러울 때야말로 독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때였기에 당우혁은 거대한 강환을 생성해서는 난리가 난 포달랍궁의 내부에 떨어뜨렸다.
“퍼뜨리는 건 걱정 말라고.”
“우리가 도와주지.”
당우혁의 독기를 잔뜩 머금은 강환의 뒤로 검과 도가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폭격을 가하듯 남궁호와 팽만철, 운왕이 계속해서 칼을 던진 것이었다.
거기에 담현과 운상이 가세하자 포달랍궁의 내부는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커헉!”
“도, 독이다……!”
쏟아지는 칼과 강환에 이어 독까지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자 포달랍궁은 지옥도로 변했다.
사지가 찢어진 이들은 수두룩했고, 독에 당해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린 이들도 상당했다.
“감히……!”
“찢어 죽이리라!”
예고도 없는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포달랍궁도들의 모습에 신임 궁주와 칠성들이 노성을 터트리며 뛰쳐나왔다.
칼들과 강환들은 하늘에서 떨어졌지만 개왕의 강룡십팔장이 남동쪽의 벽면을 강타했기에 위치를 쉽게 파악한 것이었다.
뒤이어 수십, 수백 명의 격분한 포달랍궁도들이 달려 나왔다.
불법을 공부하는 승려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살기 가득한 모습이었는데 그런 이들을 보고도 반호진은 긴장하지 않았다.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소천검을 뽑아 들고서는 가볍게 휘둘렀다.
쩌어어억!
검기 하나 서리지 않은 평범한 횡베기였으나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반호진의 깨달음이 담긴 일검이었기에 포달랍궁주와 칠성을 제외하면 누구도 막아 내지 못했다.
심지어 장로들조차도 즉사만 면했을 뿐 치명상을 입고서 허물어졌다.
“크으윽!”
“소림검신……!”
구멍이 뻥 뚫린 벽을 통해 밖으로 나온 포달랍궁주가 이를 갈았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중원의 천하십대고수들이 눈앞에 있어서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중원무림에서 먼저 서장을 침공한 적이 없었기에 포달랍궁주는 현재의 상황이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꾸욱!
하지만 이내 포달랍궁주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습격을 당했다는 점이었다.
포달랍궁의 유구한 역사상 이렇게 처참하게 외벽이 부서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그는 눈을 부릅뜨며 땅을 박찼다.
오직 죄를 묻는 것만 생각하면서 말이다.
“셋 정도인가.”
많은 이들이 피를 토하거나 몸이 동강 난 상태로 쓰러졌지만 그럼에도 그의 일검을 버텨 내고서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아쉬워하지도,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딱 그가 예상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인원이 딱 맞네?”
“포달랍궁주는 누가 맡을 거지?”
사나운 기세로 포달랍궁주와 칠성이 짓쳐 들고 있었으나 팽만철과 남궁호는 여유로웠다.
여덟 명을 필두로 수백 명의 포달랍궁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나 두 사람이 신경 쓰는 건 포달랍궁주와 칠성만이었다.
나머지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미타불. 포달랍궁주는 제가 상대해도 되겠습니까?”
“방장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안 그래?”
조심스레 입을 여는 담현을 보며 팽만철이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다른 이였다면 양보할 생각이 없지만 담현과 운상은 달랐다.
천하의 팽만철도 고개 숙이게 만드는 이가 두 사람이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듯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요. 그보다 운상 진인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빈도는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운상의 대답에 팽만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름 장유유서를 신경 써서 물었는데 아무나 상관없다고 하자 팽만철의 입꼬리가 귀에 닿을 듯이 올라갔다.
“제가 둘을 맡지요. 노야께서는 쉬셔야 하니.”
“흘흘흘! 신경 써 주어 고맙소이다.”
“약속한 것이니까요.”
거기에 반호진이 일행들의 고민을 줄여 주었다.
굳이 개왕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럼 결정됐군.”
“슬슬 마중을 나가자고.”
“그래. 크흐흐흐!”
어느새 지척까지 가까워진 포달랍궁주와 칠성을 바라보며 팽만철과 남궁호가 땅을 박찼다.
반호진은 담현과 함께 느릿하게 몸을 날렸다.
알아서 득달같이 달려오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지난번에 하지 못한 복수를 하겠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상대가 정해지며 자신의 앞으로 칠성 중 두 명이 달려오자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짙은 살기가 사방에 휘몰아쳤지만 정작 반호진에게는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둘은 칠성의 자리를 하나씩 차지할 정도로 강자이기는 했으나 초월경에 오른 무인은 아니었다.
구천문과 마찬가지로 포달랍궁 역시 전쟁 때 소실된 전력을 복구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모두 다 사지를 자르고서 묻어 주마!”
그 사실을 포달랍궁주와 칠성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들만으로는 쓰러뜨리기 힘들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앞마당이었다.
똥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처럼 여기는 포달랍궁이었다.
쑤아아앙!
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상대를 죽이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초월경에 오른 이가 세 명 있기는 하나 같은 경지라고 해서 수준이 같은 건 절대 아니었다.
엄연히 고하(高下)가 있었고 명백히 그들이 열세였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우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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