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장. 우리도 간다. -02
팽만철은 입을 다물었다.
모두 다 맞는 말이어서였다.
오죽했으면 천하의 개왕조차 고개를 숙였다.
반호진의 말대로 정보가 샜다면 역으로 이쪽이 당할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꿀꺽!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남궁호는 물론이고 당우혁도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그들이 천하십대고수이고 북해빙궁과 포달랍궁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하나 그래도 각자 북해와 서장을 지배하는 패자들이었다.
저력이 있는 곳이었기에 두 곳이 마음먹고 함정을 판다면 두 사람도 위험했다.
“……미안하외다, 반 문주.”
“나도 사과하마.”
“나 역시 사과하겠네.”
“미안하네.”
개왕을 시작으로 팽만철과 남궁호, 당우혁이 차례대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이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더불어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을 얼마나 만만하게 봤는지도.
“사과는 되었습니다. 그보다 이 사실을 몇 명이나 알고 있습니까?”
네 사람의 사과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사과가 아니라 어디까지 알려졌느냐였다.
만약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알려졌다면 바로 폐기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우리만 알고 있다오.”
“나도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어. 가문에도 소림사에 간다고만 했지.”
“그나마 다행이네요.”
반호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 같아서였다.
네 사람의 등장과 함께 강기막을 쳤기에 주고받은 대화는 이대제자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흠흠! 자리를 옮길까? 도착하자마자 이곳에 온 거라 방장께 인사도 드려야 하는데.”
지은 죄가 있기에 팽만철은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러시죠.”
“바로 가자고.”
“예.”
무뚝뚝한 얼굴로 반호진이 대답하며 앞장섰다.
사과는 받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반호진은 이대제자들에게 전음을 보내고는 곧바로 방장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앉으시지요.”
미리 연락을 받은 모양인지 담현이 웃으며 네 사람을 맞아주었다.
그러나 담현의 환대에도 네 사람은 웃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오, 방장.”
“이미 벌어진 일이지 않습니까. 지나간 일은 흘려보내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시지요.”
“고맙소이다.”
개왕이 남궁호와 당우혁, 팽만철과 함께 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담현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개왕의 사과에도 놀라지 않았다.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실수입니다. 이런 상황까지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으니까요.”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소이다. 모두 다 내 불찰이외다. 내가 입이 가벼워 이 사달이 벌어진 것이오.”
개왕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자신의 실수라고 담현이 말했으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잘못한 건 그와 세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담현 역시 진담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노야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 분이시지 않습니까. 제가 따로 비밀엄수를 부탁드린 것도 아니고.”
“아니외다. 내가 눈치껏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개왕이 계속해서 자책했다.
그러자 세 사람도 입을 다물었다.
유구무언이라고 개왕이 이러니 셋도 할 말이 없었다.
후르릅.
한편 조용히 차를 마시던 반호진은 상황이 완벽하게 파악이 되었다.
조금 의아한 게 있었는데 담현과 개왕의 대화로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담현이 무당파와 곤륜파에 최대한 빠르게 연락을 하기 위해 개방에 부탁했고, 그 소식이 자연스럽게 개왕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걸 세 사람이 우연찮게 알게 된 모양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쯤 하시지요.”
“알겠소이다.”
“그보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본방에서는 방주와 나, 그리고 외부인은 여기 있는 세 사람뿐이오.”
“다행이군요.”
그 사부에 그 제자라는 말처럼 반호진과 똑같은 걸 물었던 담현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눈치를 살피던 개왕과 세 명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이면 곤륜파에도 서신이 도착했을 거외다.”
“역시 빠르군요.”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세 분께서 직접 본사에 오셨다는 건 합류할 의향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여전히 미안함에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개왕을 일별한 담현이 남궁호와 팽만철, 당우혁과 차례대로 눈을 마주했다.
개왕에게 추스를 시간도 주고 세 사람의 의중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조금 그렇습니다만, 솔직히 약간 서운했습니다. 이런 일을 저만 빼놓고 하시는 게요.”
차분하게 대답하는 남궁호와는 다르게 팽만철은 콧김을 내뿜었다.
이토록 흥미진진한 일에 자신을 배제시켰다는 게 그는 서운했다.
물론 반호진이나 담현, 운상과 비교하면 자신의 실력이 뒤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교 대상이 운왕이라면 자신도 그리 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팽가주.”
직설적으로 서운하다고 말하는 팽만철의 모습에 당우혁이 화들짝 놀랐다.
사과를 한 게 방금 전이었다.
한데 흥분하며 서운하네, 어쩌네 하자 당우혁은 가슴이 철렁했다.
자칫 잘못하면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어서였다.
“이보게!”
그건 남궁호도 마찬가지인 듯 안색이 해쓱해졌다.
가까스로 봉합한 상황을 한순간에 어그러뜨릴 수 있기에 남궁호는 다급하게 팽만철을 불렀다.
“괜찮습니다. 팽가주님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하지만 제 입장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으니까요.”
“크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강렬한 당우혁과 남궁호의 눈빛에 팽만철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뒤늦게 자신이 과했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우선 거리가 먼 게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하북성에서 서장까지는 거의 끝과 끝이니까요.”
“그렇긴 합니다.”
담담한 담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팽만철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박할 여지가 전혀 없어서였다.
담현의 말대로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가야 했기에 팽만철은 곧바로 수긍했다.
“두 번째는 명분입니다. 세 분께서 서장과 북해까지 갈 이유가 그리 크지는 않으니까요. 연이은 전쟁으로 본사뿐만 아니라 사천당가와 하북팽가, 남궁세가가 입은 피해가 크기도 했고요. 마지막으로 호진이와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도 그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팽가주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요.”
괜히 입을 열지 말라는 듯이 양옆에 앉은 남궁호와 당우혁이 팔꿈치로 팽만철의 팔뚝을 툭툭 쳤다.
팽만철이 워낙에 거구였기에 살짝만 팔을 들어도 팔뚝에 팔꿈치가 닿았기에 담현이나 개왕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왜 그러는지도 다 알고 있었고.
“제가 아무리 천둥벌거숭이처럼 굴어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압니다.”
“그래도 제자의 일인지라 빈승으로서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습니다.”
“방장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팽만철이 고분고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서운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한 이유도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담현이었어도 조심스러웠을 터였다.
“팽가주의 말이 맞습니다. 반 문주가 여전히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한 가문의 수장이니만큼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하지요.”
“남궁세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도 합류하고 싶습니다.”
“방장께서 받아만 주신다면요. 아시겠지만 저희는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당우혁과 남궁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팽만철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복수할 기회가 있는데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빈승이야 함께해 주신다면야 감사하지요.”
“흘흘흘! 나도 합류할 생각이외다.”
“노야께서 말씀이십니까?”
개왕의 말에 담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단순히 사과하러 온 줄 알았는데 함께 가겠다고 하자 놀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함께 온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소이다. 빠르고 은밀히 이동해야 할 터인데 그러려면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겠소이까? 중원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젊었을 적에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녔기에 새외에도 나름 정통하다오.”
“길잡이가 필요하긴 합니다만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담현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개왕을 바라봤다.
노구인 데다가 전쟁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게 개왕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잘 요양해서 회복이 되었다고 하나 제아무리 절대고수라도 노쇠한 육신은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서장과 북해를 넘나들어야 하는 일정이었기에 담현은 우려가 되었다.
“허어. 중원을 위한 일이지 않소이까. 일정이 빡빡해서 염려하시는 것 같은데 길 안내 정도는 이 노구로도 가능하외다. 아직 싸울 수도 있고 말이오.”
“으음!”
개왕이 호언장담했으나 담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함께 가 준다면야 그로서는 편했으나 변수가 많았기에 걱정이 되어서였다.
만약 개왕이 잘못된다면 담현은 오중건을 볼 면목이 없었다.
“반 문주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말을 하지 않아도 표정만으로 담현의 의중을 알 수 있었기에 개왕은 시선을 옮겼다.
담현의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반호진에게 물어봤던 것이다.
“제가 말린다고 안 가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흘흘흘!”
개왕이 껄껄 웃었다.
된다, 안 된다가 아니라 그의 속내를 정확히 짚어서였다.
“그러니 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는가?”
“거절할 수 있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않겠나.”
또다시 예상을 벗어나는 대답에 개왕이 히죽 웃었다.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어서였다.
또한 반호진은 애초에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개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 보겠습니다.”
“방장 다음으로 이 늙은이를 챙겨 줄 수 있겠는가? 세 사람이야 아직 한창때라지만 나는 아니지 않은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흘흘! 그거면 충분하네.”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으나 개왕은 만족했다.
일단 거절은 아니어서였다.
“저 역시 노야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만 하게.”
“절대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걸 약속해 주시지요.”
“그리하겠네.”
개왕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기도 하거니와 담현이 어째서 이런 부탁을 하는지 잘 알아서였다.
그래서 개왕은 가슴을 탕탕 치며 약속했다.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방장에게 고맙지. 실수를 했는데도 용서해 주었으니. 근데 어디부터 갈 생각이신가?”
“잠시만요.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는지요?”
담현과 개왕의 대화에 당우혁이 끼어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두 사람은 물론이고 반호진과 남궁호, 팽만철의 시선도 당우혁에게로 향했다.
“하시지요.”
“구천문도 추가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어지는 당우혁의 말에 세 명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곳의 등장에 셋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구천문에도 갚아야 할 빚이 있지 않습니까. 이왕 서장과 북해에 가는 거 묘강에 들르는 것은 어떻습니까?”
놀라는 세 명과 일일이 눈을 마주하며 당우혁이 말을 이었다.
이왕 새외로 나가는 거 묘강까지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확실히 구천문에 빚이 있기는 하죠. 독이 신경 쓰이기는 하나 묘강 전체가 독지대인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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