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장. 우리도 간다. -01
담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뜬금없는 말에 크게 당황한 것이었다.
“포달랍궁과 북해빙궁?”
“예.”
“갑자기 두 곳은 왜?”
“늘 당하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한 번 정도는 되갚아 줘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
높게 치솟았던 담현의 눈꺼풀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반대로 동공은 점점 더 커졌다.
반호진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아서였다.
“두 곳 역시 사부님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허를 찌르기에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맞아. 지금껏 중원 역사상 새외무림으로 원정을 떠난 적은 극히 드물었지. 그중에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은 없었고.”
중원무림은, 정확하게 백도무림은 북해빙궁이나 포달랍궁과 꽤 많이 싸웠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두 곳을 치기 위해 원정을 떠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대막이나 중원에 인접한 서장 정도였다.
그런 만큼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은 백도무림의 침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러니 한 번 정도는 저희가 쳐들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시기적으로도 좋고요. 전력이 복구가 안 된 건 피차일반이니까요.”
“네 말은 원정군을 구성하자는 말이냐?”
“아니요.”
단호히 고개를 젓는 반호진의 모습에 담현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침공을 하자면서 원정군은 소집하지 않는다고 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혹시 소수정예를 생각하는 것이냐?”
“예. 이동속도를 생각하면 소수정예가 낫습니다. 치고 빠지기에도 용이하고요. 멸문시키는 건 힘들겠지만 적어도 큰 피해는 입힐 수 있을 겁니다. 멸문이 가능할 것 같으면 그대로 쓸어버리면 되는 일이고요.”
“호오.”
담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들어 보니 확실히 원정군을 꾸리는 것보다는 소수정예가 나았다.
인원이 많아지면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이 낌새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았다.
서장과 북해는 저들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니 기습을 위해서라도 소수정예로 가는 게 맞았다.
또한 불필요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고.
‘얼마나 동조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담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원정에 대한 논의는 전쟁이 막 끝났을 때도 나왔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원정보다는 안정을 택했다.
무리해서 원정을 떠나느니 차라리 손실된 힘을 회복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지만 소수정예라면 말이 다르지. 일단 천하십대고수급 무인이 두 명이니까.’
담현은 안정을 택한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문의 수장으로서 그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였다.
연이은 전쟁에 너무 큰 피해를 입기도 했고.
누가 봐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큰 원정이었기에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수정예라면 말이 달라졌다.
특히 담현은 이동속도라는 네 글자가 뇌리에 팍 박혔다.
“저와 사부님이라면 설사 정체가 들통난다고 해도 소식이 전해지는 것보다 먼저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에 도착할 겁니다.”
“맞아. 단순히 치고 빠지는 기습이라면 우리 쪽의 피해 없이 적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고. 예상했던 것보다 적은 피해를 주더라도 경각심만큼은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반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한 것도 이와 같아서였다.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큰 위기는 없을 것이었다.
“너는 우리 둘만 생각하고 있겠지?”
“일단은요.”
“역시 같은 생각을 했구나.”
담현이 빙그레 웃었다.
짐작했던 대로 반호진 역시 더 큰 판을 그리고 있어서였다.
“다들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분들이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또 못 할 것도 없지 않더냐. 우선은 물어보자꾸나. 강요는 못 해도 제안은 할 수 있는 거니까. 그 전에 누구누구를 생각하고 있느냐?”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게 두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상 진인과 곤륜파의 운왕 대협이요.”
담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반호진의 말대로 두 사람이 합류할 가능성은 높았다.
하지만 둘만으로는 아쉬웠다.
이왕 하는 거 담현은 규모를 좀 더 키우고 싶었다.
“두 사람도 좋지만 몇 명을 더 합류시키는 게 어떻겠느냐?”
“천하십대고수급으로요?”
“그래.”
“혹시 상 문주님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반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상문에서 머물고 있는 상일기여서였다.
그런데 그 말에 담현은 고개를 저었다.
“상 문주님께서 합류해 주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요?”
“남궁세가와 하북팽가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반호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라고 두 가문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곤륜파 장문인인 운왕과 마찬가지로 남궁호와 팽만철 역시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이라면 이를 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두 사람과 반호진의 사이가 서먹해졌다는 것이었다.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둘 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지는 않을 게야.”
“남궁 대협은 몰라도 팽 대협은 아닐 것 같습니다. 워낙에 감정적인 사람이라.”
반호진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사부의 말도 일리는 있으나 냉정하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솔직히 말하면 대면하기 껄끄러운 것도 있었다.
“네가 불편하느냐?”
“그건 아닙니다. 개인적인 감정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이니까요.”
“두 사람 다 마찬가지일 게다. 그리고 요청하는 게 아니라 물어보는 거니까. 선택은 두 사람이 하는 거고. 그보다 나는 조금 아쉽구나. 구천문이 계속 걸려.”
담현이 미간을 좁혔다.
이왕 하는 거 구천문까지 했으면 싶어서였다.
“그럼 사천당가에도 한번 연락해 보시죠. 사부님 말씀대로 거절하면 그때 포기하면 되니까요.”
“해 볼까?”
“예. 밑져야 본전이지 않습니다. 다만 운상 진인과 운왕 대협께 먼저 연락을 했으면 합니다. 만약 세 분이 거절했을 때를 대비해서요.”
“그게 좋겠구나.”
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둘의 확답을 받아 놓으면 세 사람을 설득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셋 중 둘 정도는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지만 실상 결과는 다르게 나올 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사정으로 거절할 수도 있기에 담현은 반호진의 말대로 우선은 운상과 운왕에게 먼저 연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사부님께 말씀드릴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몇 가지 더 말해도 된다. 너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
“사부님의 시간을 오래 빼앗을 수는 없지요.”
“괜찮다. 내 업무를 조금씩 법무에게 넘기고 있으니. 일을 잘하고 있기도 하고.”
담현이 따스하게 웃었다.
대제자인 법무에게는 꽤나 엄하게 대했으나 반호진은 달랐다.
막내제자이기도 했거니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잘해서였다.
“어제 말씀하셨던 속가장문인 자리,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공개는 따로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굳이 대외에 알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마. 그리고 고맙다. 너의 결단 덕분에 진산제자와 속가제자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될 거다.”
“갈등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래도 분열이 크게 일어나지는 않을 게야. 일단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할 창구가 하나라도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의 차이는 지대하니까. 그러니 권력이 분할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보다 더 협력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담현의 미소가 짙어졌다.
앞으로도 소림사의 영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속가장문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건 좀 고민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허허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담현이 실소를 흘렸다.
속가장문인이 되었어도 여전한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게 전혀 밉지 않았다.
오히려 반호진다웠기에 담현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
“끝까지 집중해! 건성으로 주먹을 뻗지 마!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해!”
반호진이 불같이 호통을 쳤다.
아무리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라고 하나 집중력이 너무 떨어져서였다.
몸 상태가 최상일 때는 누구나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고수는 체력과 공력이 바닥난 상태임에도 초반과 똑같은 집중력을 유지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죄, 죄송합니다!”
“실전이었으면 모두 죽었다!”
꿀꺽!
연이어 터져 나오는 불호령에 이대제자들이 바짝 얼어붙었다.
그 정도로 반호진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살벌했다.
잠시나마 해이해졌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말이다.
“다시 해!”
“예!”
매서운 눈빛으로 반호진이 말하자 이대제자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반호진은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흐읍!”
특히 반호진은 정현을 알게 모르게 유심히 지켜봤다.
이대제자들 중에 최고라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수련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제일 나았다.
성장 폭도 가장 컸고 말이다.
그게 반호진은 흡족했으나 그러한 기색을 표정에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휘이익! 탁!
“하체가 흔들린다!”
연무장에는 수십 명의 이대제자들이 있었으나 반호진의 눈은 예리했다.
보법을 잘못 밟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몸의 중심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데 신기한 건 누구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반호진의 지시를 따르려고 애썼다.
“소림이 부럽구려. 반 문주가 이렇게나 신경 써 주다니.”
“방주님.”
“흘흘흘! 이제는 방주가 아니외다. 일개 뒷방 늙은이일 뿐이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개왕 대협.”
개방의 전대 방주인 개왕의 기척을 느꼈기에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개왕과 함께 다가오는 세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는 살짝 놀랐다.
개왕이 온 거야 이상하지 않지만 세 명은 의외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표정 관리가 안 되는데?”
“굳이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세 분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알기로 상당히 바쁘신 걸로 아는데.”
거구답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팽만철을 보며 반호진이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림사를 찾아올 만한 이유가 없어서였다.
무당파나 곤륜파면 모를까 세 곳에는 아직 연락을 하지 않은 걸로 반호진은 알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다고 들었네.”
“어떻게 아신 겁니까?”
남궁호의 표정과 눈빛에서 반호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부와 나누었던 대화가 네 명에게도 알려졌다는 걸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우연히 알게 되었네. 정확하게는 옆에 계신 전대 방주님께 들었지.”
“크흠! 그게 그러니까…….”
무표정한 반호진의 눈빛에 개왕이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가 아무리 개방의 전대방주이고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라고 하나 반호진은 당대의 천하제일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제아무리 개왕이라도 반호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소림사와 상의 없이 중요한 정보를 발설한 건 분명 잘못이었으니까.
“어르신께서는 잘못이 없어. 말하지 않으려고 하시는 걸 우리가 조르고 졸라서 알아낸 거니까. 그리고 우리 셋에게도 제안을 하려고 했다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개왕의 모습에 팽만철이 입을 열었다.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과 남궁호, 당우혁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렇다고 해도 말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건 보안과 직결된 문제이니까요. 만약 정보가 새 나갔다면 당하는 건 오히려 이쪽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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