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장. 속가장문인. -04
“허어. 너까지 이러느냐.”
“처음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한 번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가 사부님을 생각해서 가져왔잖습니까.”
설마하니 법무가 반호진의 편을 들 줄은 몰랐다는 듯이 담현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법무는 단호했다.
그 역시 담현이 오래오래 건강하길 바라서였다.
“사부님과 인연이 있기에 이렇게 만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절묘한 시기에 만날 수가 없지요.”
“차라리 잘 말려서 보관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나중에 필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 가서 구하면 됩니다. 제가 그 정도 능력은 있습니다.”
“저도 있고요.”
법무가 슬쩍 거들었다.
자신과 반호진이 힘을 합친다면 구하지 못할 게 없을 것 같아서였다.
또 정 급하면 대환단과 소환단이 있었다.
반호진이 지금까지 중원무림을 위해 한 일을 생각하면 대환단 하나 정도는 충분히 내어주는 게 가능했다.
“이 녀석들이.”
“그러니까 편히 받으세요.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백년산삼이 구하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또 아무 때나 쉽게 캘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알았다. 받으마.”
“잘 생각하셨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제자 이기는 사부는 없었다.
그래서 담현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받기로 했다.
“대신 나도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선물을 주고 부탁을 받는 건 좀 이상한데요.”
“너에게도 나쁜 건 아니야.”
떨떠름해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담현이 인자하게 웃었다.
말이 부탁이지 반호진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아서였다.
“안 들을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돼.”
“애초에 선택지가 없군요.”
“선택지는 있지. 듣고 거절하면 되니까. 근데 이왕이면 나는 네가 받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우선 듣겠습니다.”
반호진이 자세를 바로 했다.
일단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싶어서였다.
그리고 사부인 담현이 그에게 안 좋은 일을 시킬 일도 없었기에 우선은 들어 보기로 했다.
“속가장문인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느냐.”
“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반호진의 두 눈이 커졌다.
예상을 넘어서는 말에 대경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반호진은 법무를 바라봤다.
한데 담현과는 이미 얘기가 되어 있는 모양인지 그와 달리 법무는 딱히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 지금껏 속가장문인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그리고 속가장문인이라는 직위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놀란 감정을 수습하며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담현의 말대로 속가장문인이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굳이 속가장문인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네 말도 일리는 있어. 굳이 필요하지는 않지. 하지만 있어서 나쁠 것도 없지 않더냐? 그리고 이유를 말하자면 전쟁 때문이다. 연이은 전쟁에 본사가 입은 피해가 커. 다른 문파들과 마찬가지로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목숨을 많이 잃었지. 그건 너도 알고 있지 않더냐.”
“예.”
“그러니 최대한 빨리 복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기 위해서는 진산제자들뿐만 아니라 속가제자들의 힘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취지는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권위가 둘로 나뉠 수도 있습니다. 대사형과 제가 아무 문제가 없어도 다른 이들은 달리 생각할 수도 있고요.”
자고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회의적이었다.
게다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반호진이 법무보다 강하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그런데 걱정할 필요 없다. 설마하니 내가 이런 것도 법무와 상의하지 않았을 것 같더냐?”
“사부님의 말씀이 맞아. 충분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에 흔들릴 나나 사제가 아니잖아. 안 그래? 중요한 건 본사와 사제이지. 그러니 딱 이 두 가지에만 집중하자는 거야.”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마치 속내를 읽은 듯이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반호진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민감한 부분인 만큼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어서였다.
“당장 대답해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아. 충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돼. 다만 이왕이면 숭산을 떠나기 전에 말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그리하겠습니다.”
반호진은 결정을 미뤘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충분히 고민한 다음에 결정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였다.
앞에 있는 담현이나 법무는 그가 받아들였으면 했으나 반호진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너무 부담은 갖지 말고.”
“어떻게 부담을 안 가질 수 있겠습니까. 다른 직위도 아니고 속가제자들을 대표하는 자리인데요.”
“반대로 너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가 있더냐?”
“…….”
반호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서였다.
“속가장문인이라는 자리가 아닌, 소림사의 제자들을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담현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반호진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가기에 그는 최근에 숭산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사백님!”
“오냐!”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런 것 같기는 하구나. 네 키가 많이 자란 걸 보면.”
뒷짐을 지고서 소림사의 내원을 돌아다니던 반호진이 마주친 정현을 보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창 자랄 때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정현의 키가 훌쩍 자라 있자 반호진은 눈을 크게 떴다.
“헤헤헤! 갑자기 쑥쑥 크더라고요.”
“수염도 굵어지고. 난 네가 콧수염만 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 상남자네?”
“헐! 저를 어떻게 보신 거예요?!”
“어떻게 보기는. 수염도 안 날 것 같은 꼬맹이로 봤지.”
“저도 이제 남자예요!”
정현이 강하게 부정했다.
이제는 소년보다 남자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였다.
수염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털이 났기에 정현은 당당하게 사내임을 주장했다.
“남자라기보다는 그냥 무승이지. 무승은 엄밀히 따지면 남자가 아니지.”
“그거 무승을 비하하는 발언이에요!”
“비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해 주는 건데.”
“충분히 비하로 들릴 수 있어요!”
“그나저나 수련 열심히 했네?”
이제 제법 컸다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정현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건방져 보이기보다는 여전히 귀여워서였다.
별거 아닌 말에 발끈하는 게 깜찍하다고나 할까.
이제는 코 밑과 턱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났지만 반호진의 눈에는 여전히 정현이 귀여워 보였다.
“사백님께 말씀드린 대로 소림권신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어요.”
“잘했다.”
“예?”
정현의 동공이 커졌다.
갑작스러운 반호진의 칭찬에 놀란 것이었다.
지금까지 십 년 넘게 반호진을 봤으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칭찬을 한 적이 없었기에 정현은 입을 쩍 벌렸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그럼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저, 정말 제가 소림권신이 될 수 있을까요?”
“포기하면 그 순간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최소한 가능성은 있잖아. 미래는 나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레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은데.”
“가능성……!”
“근데 너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다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정현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잠시 열정이 폭발했다가 순식간에 가라앉은 것이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정현의 반들반들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끝까지 해 봐. 실패하더라도 권성(拳星)은 될 수 있지 않겠어?”
“소림권성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소림권신이 목표라서 그런지 왠지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요.”
“가능하게 만들면 되지.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고 깎아내리더라도 포기하지 마. 적어도 나는 널 응원할 테니까.”
“네!”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이 정현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근데 왜 목표가 소림권신이야? 꼭 권신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
반호진이 슬그머니 물었다.
보통은 그냥 고수이거나 아무 생각 없이 무공을 수련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소림사의 제자이기에 무공수련을 일종의 의무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좀 더 나은 경우가 자기 자신과 주변을 지키기 위해서였는데 반호진은 정현이 어느 쪽일지 궁금했다.
“저도 사백님처럼 강해져서 소림과 중원무림을 지킬 거예요. 언제 또 새외무림이 침공해 올지 모르니까요. 그러니 미리 대비를 해야죠.”
“……!”
결연한 정현의 대답에 반호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래서인지 누가 뒤통수를 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록 소림권신이 안 되더라도 소림을 위해서라면 저는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요.”
“그게 네 꿈이로구나.”
“네!”
“소년은 금방 남자가 된다더니. 진짜 다 컸네.”
“그럼요! 아마 키가 다 자라면 사백님과 비슷해질 거예요!”
몸은 많이 컸어도 행동이나 표정은 여전히 어린애였다.
그런데 그게 반호진은 싫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이 정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너무 일찍 철이 드는 것도 좋지 않았다.
“나보다 더 클 수도 있지. 나는 크다기보다는 적당한 수준이니까.”
“이왕이면 키도 크고 몸통도 두꺼운 게 좋잖아요. 신체 조건이 좋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러려면 편식을 하면 안 되지.”
“윽!”
“당분간 지켜볼 거야. 한동안은 본사에서 머물 예정이라.”
편식이라는 말에 움찔거렸던 정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당연히 볼일만 보고 바로 떠날 줄 알았는데 꽤 오랫동안 머물 듯이 말하자 반색한 것이었다.
“정말요?”
“응. 사부님과 의논할 것도 있고.”
“아싸!”
“왜 좋아해? 나랑 훈련을 같이 해야 하는데.”
“힘들지만 실력은 확실하게 느니까요. 사백님처럼 극한까지 몰아붙여 주시는 분이 없거든요.”
정현이 두 눈을 반짝였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반호진과 함께하는 체력단련과 비무는 정말 피를 토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만큼의 대가가 있었다.
발전하는 게 몸으로 느껴졌기에 정현처럼 반호진과 함께하는 수련을 기다린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렇다면 그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되겠지.”
“저도 그렇고 아이들도 예전과는 다릅니다!”
“그건 내일 직접 보면 알겠지.”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자 정현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호진의 미소를 보자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든 것처럼 추워져서였다.
동시에 괜한 말을 한 건 아닐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괘, 괜찮겠지?’
순간 반가운 마음에 괜한 호기를 부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에 정현은 울상을 지으며 반호진을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
똑똑똑.
“사부님.”
“들어오너라.”
이른 아침부터 반호진은 담현을 찾았다.
밤새 생각을 정리하고 아침 일찍 그를 찾은 것이었다.
“잘 주무셨는지요.”
“문안 인사를 하러 온 게냐?”
담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웬일로 문안 인사를 다 왔냐는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찾아뵈었으니 당연히 사부님께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야 싫지는 않다만. 근데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올 리가 없지 않느냐? 혹 결정을 내린 것이더냐?”
반호진에게 자리를 권하며 담현이 눈을 빛냈다.
혹시나 결정을 내린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성격이 의외로 급한 게 반호진이었기에 밤새 고민한 후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것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게 있지만 그 전에 사부님과 한 가지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의논?”
“예. 저희가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에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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