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장. 속가장문인. -03
방일석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왠지 까먹었을 것 같아서였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난 또 혹시 깜빡했을까 봐. 워낙에 사제가 대단하니까. 유명하기도 하고. 근데 바빠 보이지는 않네? 최근의 일로 정신없을 줄 알았는데.”
“궁금한 게 모용 소저였군요?”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백봉이지 않나! 그것도 이런 일편단심이라니!”
방일석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초반에는 나름 평정심을 유지하였으나 뒤로 갈수록 그는 본심을 숨기지 못했다.
노총각의 질투가 가득 담긴 포효 같은 외침에 반호진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방현승도 사촌 동생의 추태는 견디기 힘든 모양인지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일편단심이라니요. 아직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건 말이 안 되지.”
“호감 정도입니다.”
“글쎄. 내 생각은 다른데. 호감만으로 이렇게까지 할 리가 없지. 자기 인생이 걸렸는데. 만약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사제의 이름이 모용 소저에게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야. 그런데 과연 호감만으로 이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여전히 부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방일석이 열변을 토했다.
방현승은 조용히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고.
특히 그는 딸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모용희수와 모용궁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흐음.”
“사제도 알고 있잖아? 진실과 진심을. 그래서 조금 의외이기는 해. 내가 아는 사제는 절대 어중간한 성격이 아니니까. 맺고 끊는 게 누구보다 확실한 성격 아냐?”
“저도 사람입니다. 감정과 일은 다르기도 하고요.”
“호오. 그렇다는 말은 감정이 있긴 있다는 뜻이네?”
방일석이 눈을 반짝였다.
만약 눈곱만큼이라도 감정이 없었다면 반호진의 성격상 진즉에 모용희수를 모용세가로 돌려보냈을 것이었다.
모용척이 이곳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무상문에서 기거할 수 있게 허락했다는 건 반호진도 아주 조금은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방 사형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본인의 미래를 걸었다고. 그런 사람을, 그것도 여인을 어찌 매정하게 쫓아내겠습니까. 저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도 했고요.”
“암. 그래야지. 미녀가 온몸으로 달려드는데 그걸 거부하면 사내대장부가 아니지. 자고로 남자는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아야 해.”
“그건 방 사형의 좌우명 아닙니까?”
“대부분은 그래.”
“저는 아닙니다.”
반호진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다른 남자들과 도매금처럼 묶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말했잖아. 대부분이라고. 아닌 사람들도 있지. 어쨌든 부럽다. 백봉이라니. 근데 사제의 능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려나.”
방일석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다시 한번 자신의 현실을 깨달을 수 있어서였다.
청림표국의 대표두라는 직책도 결코 가벼운 건 아니었으나 그가 바라는 여성과 맺어지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일단 나이가 너무 많았다.
“방 사형도 아직 안 늦었습니다.”
“아니. 늦었어. 그러니 나는 나 나름대로 즐기면서 살아야지.”
처연한 얼굴로 방일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방일석의 그 모습에 방현승은 콧방귀를 끼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말하지만 방일석의 삶도 썩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만족이라는 게 상대적이기에 하소연을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사제는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다 가진 사람인데.”
“아직은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미 다 가졌어.”
“오랜만에 대련이나 한번 할까요? 방 사형께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사람도 있고요.”
대련이라는 말에 방일석과 방현승이 눈을 번뜩였다.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냉큼 문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몰랐다.
반호진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대련을 꺼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눈이 소복이 쌓은 숭산은 여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지난 생에서 보았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
그저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을 뿐.
“여전하네.”
어검비행술로 등봉현에 도착해서 천천히 숭산에 오르던 반호진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맺혔다.
태어난 곳은 다른 장소였으나 반호진에게 있어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 숭산이었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심적으로 제일 편한 장소가 숭산과 소림사였다.
“향화객들도 여전히 많네.”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일주문 앞에는 사람들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부모와 조부모의 손을 잡고 일주문을 지나는 모습에 반호진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어서였다.
저벅저벅.
그러나 반호진은 일주문에 도착했음에도 사찰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옆의 샛길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바로 숭산에서 지낼 당시 머물렀던 목조건물로 향한 것이었다.
자연의 풍광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지어진 두 채의 전각을 보자 반호진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왔느냐.”
“사부님.”
“나도 있다.”
그런데 전각 앞에 두 사람이 있었다.
담현과 법무였다.
마치 반호진이 이리로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제가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리셨습니까?”
“얼추 예상이 되더구나. 제자 성격을 아니까.”
“안에서 기다리셔도 되는데요.”
“우리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단다.”
담현의 말에 법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지 한 식경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이 정도면 가벼운 산책 수준이었다.
둘 다 산책을 좋아하기도 했고.
“흐음.”
“왜 그러십니까?”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 다르게 법무가 그의 전신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어서였다.
그것도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무가 얼굴 가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흠흠. 듣자 하니 사제가 키우는 개들이 아주 똘똘하다고 하던데. 새끼들도 많이 낳았고.”
“대사형도 동물을 좋아하세요?”
“내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 예전에는 몇 마리를 기르기도 했었거든. 약하게 태어나서 그런지 부모들이 버린 들개 새끼였는데 안타깝게도 번식을 하지는 못했었어.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데 애초에 약하게 태어나서 그런지.”
“소림사에서요?”
반호진의 눈이 커졌다.
개를 키웠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어서였다.
“맞아. 두 마리를 키웠었지. 둘 다 사람 손에 자라서 그런지 애교가 많았었어. 겁도 많았고. 그래서 사냥을 잘 못하기는 했지.”
담현도 기억이 나는지 턱을 쓰다듬었다.
회상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니까 사제는 못 봤을 거야. 사제가 입문하기 몇 년 전에 죽었거든. 시간이 꽤 지났기에 나도 자연스레 잊었는데 사제가 개를 거두었다는 말을 듣자 떠오르더라고. 새끼들을 지인들에게 주었다는 말도 들었고. 새끼도 많이 낳았다며?”
“처음 거둔 세 마리가 다 수컷이라서요. 나름 능력이 좋은 모양인지 다 암컷들을 만났더라고요. 다음에 새끼가 태어나면 몇 마리 데려오겠습니다.”
“그래 줄 수 있겠어?”
“물론이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근데 슬슬 제자를 들이셔야 할 때 아닌가요?”
“커험!”
법무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안 그래도 담현에게서 은근히 압박을 받고 있었기에 법무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거봐라. 호진이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더냐?”
“그렇게 따지면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호진이는 아직 이르지. 나이가 이제 스물셋밖에 안 됐는데.”
“항렬은 똑같습니다만.”
법무가 소심하게 반박했다.
너무 자신한테만 강요하는 것 같아서였다.
분명히 나이는 어리지만 반호진은 그와 같은 항렬이었다.
무경으로만 따지자면 그보다 훨씬 더 강했고.
“소림의 차기 방장은 너다.”
“끄응!”
하지만 이 논쟁은 애초에 법무가 질 수밖에 없었다.
그걸 그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즉 책임과 의무는 네가 더 크다는 말이지. 게다가 너는 사형이지 않더나.”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내가 당장 제자를 들이라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미리 준비하자는 것이지.”
“알겠습니다.”
압박감을 주고 있지만 법무도 담현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한숨은 쉬어도 크게 반박하지는 않았다.
“관리가 잘되어 있네요.”
“이대제자들이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청소를 하는 모양이야. 순번을 정해서.”
“간식이라도 사 주어야겠습니다.”
먼지 하나 없는 방의 모습에 반호진은 살짝 놀랐다.
그가 없기에 담현이나 법무가 조금은 신경을 쓸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한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대제자들이 청소를 해 주었다고 하자 반호진은 진심으로 놀라면서 감동했다.
이렇게까지 나설 줄은 몰라서였다.
“그것도 좋아하겠지만 네가 와 주었다는 사실에 더 기뻐할 거야.”
“경기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워낙에 강하게 가르쳐서요.”
“당시에는 힘들었겠지만 이제는 다를 거야. 그때 제대로 기본기를 다져 주었기에 지금의 수준에 이른 것이니까. 네가 봐준 애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격차가 의외로 커.”
담현의 말에 법무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동의해서였다.
진산제자나 속가제자나 지금은 똑같이 기본공을 익히고 있는데 그럼에도 반호진이 봐준 제자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수준 차이가 꽤나 컸다.
“이대제자들이 열심히 했기에 이루어 낸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잘 가르쳐도 본인이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것도 맞기는 하지.”
끝까지 자기 덕이 아니라고 말하는 막내제자의 모습에 담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해 봤자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였다.
평소에는 고집을 잘 부리지 않지만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웬만해서는 꺾지 않았기에 담현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결정했다.
스윽.
그리고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인 듯 자그마한 보자기에 싸 온 무언가를 담현에게 내밀었다.
깨끗한 천으로 포장되어 있는 물건에 담현이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고서 반호진을 쳐다봤다.
“조금 뒤면 사부님의 생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약소하지만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선물?”
“예. 운 좋게 구했습니다.”
담현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생일을 챙기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선물을 준 적은 드물었기에 담현은 의아한 눈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생일이 무어라고. 그냥 똑같은 날이건만.”
“온 김에 겸사겸사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생각지도 못한 녀석을 만나기도 했고요. 보자마자 사부님 생각이 나더라고요.”
“흐음.”
궁금증을 자아내는 반호진의 대답에 담현은 물론이고 법무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인지 담현은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손을 뻗어 보자기를 풀었다.
이윽고 평범한 목함이 모습을 드러내자 담현은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화아앗!
나무 뚜껑을 열기 무섭게 익숙한 향이 실내를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흙내음 사이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향에 담현과 법무의 두 눈이 동시에 커졌다.
보지 않아도 냄새로 목함에 담겨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였다.
“백 년에서 백오십 년 정도 묵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본문의 의원이 말하기를요.”
“허어.”
“매일같이 산책하는 곳 인근에서 발견했습니다.”
잔뿌리 하나 상하지 않은 채로 흙과 함께 온전히 담겨 있는 산삼의 자태에 담현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생일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였다.
“보는 순간 사부님이 떠오르더라고요.”
표정에서 알 수 있는 담현의 속마음에 반호진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법무도 동조했다.
매번 이런 선물을 받는 건 부담스럽지만 어쩌다 한 번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해서였다.
“받으시지요, 사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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