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장. 속가장문인. -01
사마의성의 관심이 서조운을 지나 무상문에서 머무는 한 명의 여인에게로 향했다.
같은 여자로서 그녀는 모용희수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웬만한 용기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사마의성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할수록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아서였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건가.”
사마의성은 반대로 생각해 봤다.
만약 자신이 모용희수였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고.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결론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오빠도 그 점을 높이 사는 것 같고.”
반호진의 성격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절대 무르지 않았다.
평소에도 단호하고 단호해야 할 때는 더욱 단호했다.
그럼에도 반호진이 모용희수가 머무는 걸 허락한 건 그녀의 각오를 느껴서일 터였다.
또한 진심에는 똑같이 진심으로 응하는 게 예의였다.
“강적이야.”
사마의성의 눈빛이 깊어졌다.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솔직히 사마의성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것도 백봉이라 불리는 모용희수가 말이다.
그래서인지 불만을 표하는 이들은 있어도 모용희수를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은 지금 해야 하는 일부터.”
모용희수에 대해서 생각하던 사마의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까지고 모용희수를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였다.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그녀의 결단에 놀랍기도 하고 감탄도 했으나 지금 중요한 건 모용희수가 아니었다.
자신과 사마세가, 그리고 무상문에 대해서 신경 쓸 일이 수두룩했기에 사마의성은 본래의 업무로 돌아왔다.
“가장 시급한 건 무공과 인력인가.”
소실되었던 사마세가의 무공은 거의 복구가 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기껏해야 과거의 성세를 복구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십대세가에는 속했으나 오대세가에는 들지 못했던 수준이었기에 사마의성은 가문의 무공을 복구함과 동시에 개량시킬 생각이었다.
거기에 하오문과의 약속도 떠올렸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야.”
둘 다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아직 사마의성의 역량은 아쉽게도 그 정도가 아니었다.
사마세가의 후예들이 찾아오는 중이라고는 하나 아직 소수였다.
그렇다고 인원을 무작정 충원할 수도 없었기에 사마의성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역시 이거지.”
인원을 모집한다고 알리면 찾아오는 이들은 분명 많을 것이었다.
비록 다른 일행들에 비해 무림에서의 위상이 낮다고 하나 그럼에도 사마의성의 명성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신뢰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기에 사마의성은 망설이지 않고 전자를 선택했다.
똑똑똑.
“나야.”
“들어와.”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바로 서조운이었다.
“어후. 저거는 여전하구만. 네 성격상 안 치운 건 아닐 테고. 오늘 새로 온 거야?”
“응.”
“대단들 해. 집념이라고 해야 하나.”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적응이 됐지. 근데 넌 아니잖아.”
서조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찍이 반호진과 함께 무수한 관심을 받았던 이가 서조운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제는 적응이 된 상태였다.
명성이 높아지자 알아서 일정 수준 이하는 걸러지기도 했고.
“적응하는 수밖에는 없단 말이지.”
“아니. 다른 방법도 있어. 혼인을 하면 돼. 남자야 삼처사첩을 둘 수 있지만 여자는 대부분 일부종사(一夫從事)하니까. 임자가 생기면 더는 널 귀찮게 하지 않겠지.”
“일처다부는 생각 안 하는 거야?”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러면 되지.”
갑작스러운 말이었으나 서조운은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일부다처가 되는데 일처다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서였다.
역사적으로 일처다부를 한 이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중원에서는 거의 없지만 문화가 다른 곳에서는 전통적으로 일처다부를 택한 곳도 있었다.
“안 놀라네?”
“난 꿈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람이거든.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지 남의 생각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나도 삼처사첩을 말하는데 너라고 못 할 건 없잖아?”
“그렇긴 하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응원해.”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매를 찡긋거리는 모습에 사마의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응원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런. 나의 진심을 몰라주다니. 서운한데?”
“서운하기는. 근데 괜찮겠어? 이제는 삼처사첩을 원한다는 말을 조심해야 하지 않나?”
“왜?”
“유화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서조운이 흠칫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조운은 창졸간에 신색을 회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도 눈치는 있나 보네. 나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갑자기 유화가 왜 나와?”
“모른 척하기는.”
“진짜 모르거든?!”
서조운이 시치미를 뗐다.
인정하는 순간 약점을 하나 붙잡히는 것이었기에 서조운은 강하게 반박했다.
“애 마음 갖고 놀지 마. 아니면 확실하게 말해. 그래야 감정이 더 크기 전에 정리하지.”
“그보다 넌 괜찮아? 모용 소저가 아주 적극적인데.”
“말 돌리기는.”
“정말 신경 안 쓰여?”
서조운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 애쓰는 것이었다.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지. 또 네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냉정하기는.”
“책사의 기본 소양이야. 언제, 어느 때라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근데 궁금하네. 왜 하필 너지?”
“뭐야?”
서조운의 부동심이 결국 흔들리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끝내 사마의성의 공격에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이해가 안 가서. 척이 오빠는 내가 봐도 아니지만 이륭 오빠도 있는데.”
“끄응!”
놀리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사마의성의 모습에 서조운은 입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은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신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 주어야 하니까.”
“언제까지 놀릴 거야?”
“난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놀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하고.”
“티 났어?”
사마의성이 혀를 쏙 내밀었다.
결국에는 인정한 것이었다.
그 모습에 서조운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이성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그 말을 기다렸다.”
“근데 양팔이 가볍다? 오늘은 준비한 게 별로 없나 봐?”
“여기에 다 있으니까.”
서조운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암기에는 자신이 있기도 하거니와 오늘 상의할 내용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서조운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맹신하다가 훅 간다.”
“그럴까 봐 빨리 쓰려고. 넌 다 준비했어?”
“물론이지.”
“좋아. 그럼 어제에 이어서 시작하자.”
사마의성이 준비해 둔 문방사우 중 벼루에 담긴 먹물을 흥건히 머금은 붓을 서조운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오늘 토론할 것들에 대해서 빠르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공의 초식은 아니고 서조운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무론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풀이했단 말이지.”
“너는 달라?”
“응. 나도 일단 적어 볼게.”
사마의성이 눈을 빛냈다.
확실히 서조운의 무재가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았고 사마의성은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자극도 받았다.
“흐음.”
먼저 다 쓴 서조운은 사마의성이 써 내려가는 무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사마의성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극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무론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끼이익.
부총관인 황매향이 열어 주는 문으로 방일석이 주춤주춤 걸어 들어갔다.
처음 찾아온 것도 아니건만 방일석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데 그건 같이 온 방현승도 마찬가지인 듯 얼굴이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방 국주님. 방 사형.”
“오랜만이지?”
“표정이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니. 그건 아니고.”
응접실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던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과는 반응이 너무 달라서였다.
누가 봐도 들떠 있었던 저번과는 달리 둘 다 뒷간에서 개운하게 볼일을 보지 못한 표정으로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야.”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반호진의 시선이 빠르게 방일석과 방현승을 훑었다.
암만 봐도 평소와는 달라서였다.
“진짜 없었어. 그냥 예전과는 좀 달라져서 그래. 네가 아니라 우리가. 안 그렇습니까, 국주님?”
“맞아.”
“달라졌다고요?”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말에 반호진이 눈을 껌뻑였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할 수가 없어서 그래. 소림검성까지는 그래도 사제로서 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호진이 네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잖아. 차기 천하제일인으로 거론되는 게 너잖아.”
“세간에서 그런 말들이 나돈다는 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일 뿐입니다.”
“알지. 근데 그게 우리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그렇습니까.”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반호진은 그러려니 했다.
강제로 원래대로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이니만큼 반호진으로서는 그냥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천사맹, 마도련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넌 모를 거야.”
“저도 충격적이었습니다. 흡정대법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네 신위가 더 대단했어. 천사맹주를 그렇게 다룰 줄도 몰랐고.”
“계획된 게 아니라 임기응변이었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방일석의 말에 방현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한 이야 공정하지 않다고 한탄할지 모르나 어쩔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결과였고 하늘은 사사혈천교주가 아닌 반호진을 택했다.
“운이 좋기는 했습니다.”
“근데 난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운이 없었어도 네가 이겼을 것 같은. 아마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걸?”
“그건 모르지요.”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이야 당연히 자기가 이길 거라 생각했지만 굳이 다른 이들에게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지. 진실은 너만이 알고 있겠지.”
“늦었지만 전쟁 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는 그 당시에 감사 인사를 전했어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여의치 않았다기보다는 네가 그냥 떠났잖아.”
“더 머물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뭐, 그것도 틀린 건 아니지만. 근데 감사 인사는 됐어. 우리가 너에게 받은 도움이 한두 개가 아닌데.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표국들도 마찬가지고.”
반호진이 부연 설명을 해 달라는 눈빛으로 방일석을 쳐다봤다.
그러자 방일석이 빙긋 웃었다.
“녹림도들을 죄다 쓸어 버렸잖아. 네 덕분에 반쯤 뿌리 뽑히다시피 해서 우리가 얼마나 편해졌는데.”
“아.”
이어지는 말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표국들이 편해진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천사맹과 마도련의 패배로 수적들의 패악질도 많이 줄어들었다고 들었다.
“아직 수적들이 남아 있기는 한데, 기세가 예전 같지는 않지.”
“맞네. 벼르고 있는 이들도 많고.”
“잘됐네요. 빚은 갚을 수 있을 때 갚는 게 가장 좋으니까요.”
대화를 좀 주고받아서 그런지 두 사람의 표정이 한결 편해져 있었다.
그걸 느끼며 반호진은 차를 홀짝였다.
“흠흠! 그래서 말인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전쟁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훈련을 언제쯤 시작할 생각인지 알고 싶어서. 절대 압박하는 건 아니야.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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