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366화 (366/468)

제 119장. 더 나은 미래를 위해. -03

봉구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길을 잃었다는 표현이 너무나 가슴에 와닿아서였다.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 딱 떨어지는 문장에 봉구의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맞아요. 잠깐 길을 잃고 방황한 것 같아요.”

“네 위치가 애매해졌다고 생각했을 거야. 잔살방에서 데리고 온 이들 때문에.”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점도 없지 않아 있었어요.”

“그런데 역할이 달라. 이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알겠지?”

“예.”

봉구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초면에 대뜸 오체투지했던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부져진 봉구의 눈빛과 표정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제 체력훈련하러 가 봐.”

“예. 그리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주님.”

“문도를 신경 쓰는 건 문주로서 당연한 거야. 그러니 너는 네 몫만 잘하면 돼. 난 많은 거 안 바란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고.”

손을 휘휘 젓는 반호진을 보며 봉구가 씨익 웃었다.

조금은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주고자 반호진이 일부러 저런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동시에 잠시 잊고 있었던 충성심이 활활 불타올랐다.

믿어 주고 챙겨 준 반호진에게 그만큼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이래서 불화가 없는 건가.’

방을 나서며 봉구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상문은 더 이상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조금씩 늘어나던 인원은 어느새 백 명을 훌쩍 넘었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조금의 불화도 없다는 점이었다.

누구 하나 불평불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무상문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했다.

‘내가 할 일은 단순해. 잘하는 걸 더욱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문주님을 보필하는 것. 그 외에는 신경 쓸 것 없어.’

반호진과 상담 아닌 상담으로 머리가 맑아진 봉구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애초에 그는 반호진이나 서조운처럼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최선을 다해 하면 되었다.

꾸욱!

‘할 수 있어.’

집무실로 향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걸음걸이로 봉구가 주먹을 움켜쥐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지금껏 허투루 보낸 시간들을 자책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봉구는 몰랐다.

그가 보낸 시간들이 결코 의미 없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라고 하기도 힘든 소소한 일들이 있었으나 반호진은 딱히 힘들어하지 않았다.

일문을 운영함에 있어 이 정도 일은 일이라고 할 수도 없어서였다.

게다가 이제는 체계가 잡혀서 반호진이 크게 신경 쓸 일도 없었다.

“좋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는 뒷마당을 창가에서 내려다보며 반호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는 매일 보는 광경이 지루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반호진은 달랐다.

이런 유유자적함이야말로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기에 반호진은 적막하고 고요한 풍경과 분위기를 맘껏 즐겼다.

그러나 수련을 게을리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휘이이잉.

시원하기보다는 싸늘한 산바람을 느끼며 반호진은 생각에 잠겼다.

정확하게는 뇌리에 떠오르는 온갖 상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목표 의식은 있지만 그렇다고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더 높은 경지는 갈구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건 심마지.”

경지가 높을수록 무인이 조심해야 하는 건 점점 늘어났다.

그중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나태함도, 게으름도 아닌 심마였다.

품고 있는 힘이 거대할수록 심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주화입마는 모든 걸 파괴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까지 전부 다 말이다.

“나라고 해서 심마가 피해 가는 건 아니니까.”

반호진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전생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심마를 겪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겪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게 심마였기에 그에 따른 대비는 항상 해 두어야 한다고 반호진은 생각했다.

스윽.

동녘이 서서히 밝아 오는 걸 보던 반호진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한쪽 벽에 걸려 있던 검을 잡았다.

바로 소천검을 받기 전까지 사용하던 검이었다.

거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 검에 반호진은 전현(前現)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우우우웅.

조심스레 붙잡는 반호진의 손길에 전현검이 잘게 떨었다.

마치 반호진의 손길을 느끼는 듯이 미약하게 검명을 토해 내며 반응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빙긋 웃으며 전현검의 검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녀석.”

검객에게 있어 검은 단순히 금속으로 이루어진 무기가 아니었다.

평생을 함께하는 반려나 마찬가지였기에 어떻게 보면 아내보다 더 가까운 게 애병이었다.

더욱이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못하는 비밀도 전현검에게는 할 수 있었다.

“내가 널 너무 함부로 썼어. 애지중지한다고 말만 했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상처가 많아.”

반호진이 손가락으로 검신을 부드럽게 쓸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관리가 잘되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외양만 그랬다.

속은 많이 망가져 있었다.

검을 아끼는 법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에 막 사용한 대가였다.

웅웅웅!

“괜찮다고? 넌 늘 그렇게 말했지. 근데 그래도 안 돼. 너는 이번에도 나와 같이 끝까지 함께해야 하거든. 소천검도 마찬가지고.”

친구와 대화하듯 반호진이 웃으며 말했다.

진짜 대화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반호진은 그렇게 느꼈다.

전현검의 의지가 자신에게 마음으로 전해진다고 말이다.

“너는 모르겠지만 지난 생에서 우리는 마지막을 함께했지. 그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널 잃고 싶지 않고. 그러니까 너무 질투하지 마. 적어도 지금은 소천검을 안 차고 있잖아?”

늘 한쪽 자리에 놓여 있는 무명천을 허공섭물로 들어 반호진은 전현검의 검신을 닦기 시작했다.

먼지 한 톨 없이 반질반질했으나 그럼에도 반호진은 정성을 다해 전현검을 닦았다.

검을 닦으면서 마음도 가다듬고, 초심도 떠올리는 것이었다.

우우우웅.

그런 반호진의 손길이 기분 좋은 모양인지 전현검이 잘게 진동했다.

하지만 정작 반호진은 그 반응을 느끼지 못했다.

검신을 닦으면서 깊은 상념에 빠져서였다.

‘기형검 이후의 경지.’

무도(武道)에는 끝이 없었다.

그 사실을 반호진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멀지 않은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라는 평가는 반호진에게 있어 별 의미가 없었다.

결국 중요한 건 본신의 무경이었기에 반호진은 지금껏 만났던 적들 중 가장 강했던 무인인 북해빙궁주를 떠올렸다.

‘지금은 일대일로 붙으면 내가 이길 거야. 전생의 북해빙궁주라면 살짝 우위일 테고.’

세인들은 그를 차기 천하제일인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현재 반호진이 쓰러뜨리지 못할 무인은 중원에 없었다.

그러나 중원 밖이라면 장담하기 힘들었다.

천하사패는 무너졌지만 새외무림에는 천하사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유를 만끽하되 노력은 계속해야 해.’

평화는 힘에서 나왔다.

정확하게는 힘이 있어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길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아예 전쟁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게 최상의 수라고 말했고 반호진도 거기에 동의했다.

그렇기에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반호진은 지금보다 더욱더 강해져야 했다.

‘기형검 다음의 경지는 분명해. 다만 거기에 이르기까지가 어려워서 그렇지.’

반호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다음 경지에 대해서는 그뿐만 아니라 무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경지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역시 방법은 이것저것 해 보는 수밖에 없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반호진이 전현검을 닦는 걸 멈추고 기지개를 크게 켰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으나 그럼에도 반호진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전설처럼 회자되는 경지지만 분명히 그곳에 닿았던 이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니 자신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진인사대천명.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고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지. 그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고.”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한 번 죽어 보았기에 반호진은 뭘 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또한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도.

그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안 그래?”

우우웅! 웅웅!

언제 심각하게 고민했었냐는 듯이 쾌활한 반호진의 목소리에 전현검과 소천검이 동시에 검명을 토해 냈다.

자신들은 언제나 반호진의 편이라는 듯이 두 개의 검명은 맑고 깊었다.

***

“후우.”

사마의성은 자신의 집무실 한쪽 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서찰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조건반사처럼 쌓여 있는 서신들을 보면 그냥 한숨이 나왔다.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보내 주는 관심에 기쁘고 고마웠으나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천하진미의 음식이라도 자주 먹으면 질리듯이 칭찬도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게 하나같이 정략결혼이라니.”

사마의성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 서찰들을 받았을 때는 고마운 마음에 전부 다 읽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몇 번의 반복 끝에 내용이 대동소이하다는 걸 알았기에 이제는 읽지 않았다.

“그만큼 내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기는 한데, 너무 과해.”

사마의성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사람들의 욕심과 탐욕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져서였다.

특히 자신과 사마세가를 싸잡아서 집어삼키려는 게 가장 역겨웠다.

“만약 내가 오빠와 같은 위치였다면…….”

사마의성은 문득 반호진이 떠올랐다.

한때 반호진 역시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게 떠올라서였다.

심지어 양은 그녀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이런 일은 그녀뿐만 아니라 선우방과 모용척, 정이륭, 서조운 모두 겪었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해.”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문곡이 직접 정략결혼을 제의했지만 사마의성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은 분명 중요했다.

그리고 그게 제갈세가라면 분명 대단한 일이기는 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마의성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고작 오대세가에 만족할 정도로 그녀의 그릇은 작지 않아서였다.

“천하제일가.”

무림오대세가라는 칭호는 분명 대단했다.

수많은 무림세가 중에서 단 다섯 곳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가 바로 오대세가였다.

그러나 사마의성은 눈은 오대세가가 아닌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제갈세가는 안중에도 없었다.

“가장 높은 곳에 사마세가를 올려놓을 거야.”

비록 현재는 몰락한 무림세가일 뿐이었지만 사마의성은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는 과거의 영광을 넘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경쟁자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선우세가, 모용세가. 그리고 조운이.”

그녀와 똑같은 꿈을 꾸는 이들이 근처에 무려 세 명이나 있었다.

그것도 능력이 하나같이 출중했기에 사마의성으로서는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그럼에도 사마의성은 긴장하기보다 미소 지었다.

경쟁자가 있음으로써 더 빨리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음을 잘 알아서였다.

게다가 현재 오대세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문들을 흔들기 위해서라도 세 사람은 반드시 필요했다.

셋 역시 마찬가지였고.

“조운이는 살짝 애매모호하긴 한데, 사람 일이라는 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말로는 자신도 무림세가를 일굴 거라고 하지만 사마의성이 보기에는 회의적이었다.

호언장담과 달리 현재 하는 행동들을 보면 독립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게다가 반호진을 향한 충성심이 지나칠 정도로 컸다.

때문에 사마의성은 독립보다는 무상문의 가신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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