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장. 더 나은 미래를 위해. -02
‘내가 있어도 되는 걸까.’
다른 누구의 의지도 아닌 스스로의 결정으로 무상문에 온 게 봉구였다.
그리고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상문에 온 후였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행복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상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자! 오늘도 열심히 수련하자!”
“어제 유 호법님께 배웠던 거 복습하자!”
“그 전에 몸부터 풀어야지! 몸이 덜 풀린 상태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면 부상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어!”
해맑으면서도 열의로 가득 찬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봉구는 다시 한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순수한 저들에 비해 자신은 너무나 더럽다고.
아무리 빨고 빨아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걸레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재가 압도적인 것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떠나야 하나?’
이곳에 있는 게 너무나 좋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이런 걱정이 있었다.
언젠가 반호진이 그의 더러움과 무능력함을 알아보고는 내쫓지 않을까 하는.
게다가 계기 자체가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어떻게 보면 좋지 않은 만남이 시작이었기에 봉구는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저 녀석들처럼 될 수 없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몸을 푸는 곽춘 일행을 보며 봉구는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저들이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온 걸 알지만 그가 살아가던 세계는 더욱더 밑바닥이었다.
죽음이 거의 옆에 있다시피 한 삶이었기에 봉구는 장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저 아이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큰 욕심을 부린 걸까?’
반호진이 거두어 주었을 때 봉구는 자신이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은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굳이 그가 없더라도 무상문은 강했고, 인재가 많았다.
“고민이 많은 얼굴인데?”
“무, 문주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했어? 왜 그렇게 울상이야?”
“저는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요.”
“그렇게 보일 정도로 네 표정이 심각하다는 거지.”
갑자기 나타난 반호진으로 인해 깜짝 놀랐던 봉구가 이내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걸 알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하지?”
“그게, 그러니까요.”
“행복해 보이지가 않는구나. 처음 날 만났을 때는 그 누구보다 무상문을 원했었는데 말이야. 혹시 이곳이 싫어진 것이냐?”
점점 숙여지던 봉구의 고개가 번쩍 들려졌다.
그러더니 이내 흔들리는 눈으로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
봉구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끝내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입술을 넘지 못한 것이었다.
“따라오너라.”
“예? 지금은 체력훈련을 해야 하는 시간인데요.”
“지금의 네 집중력으로는 하나 마나야. 부족한 훈련은 개인 시간으로 채우면 되고. 근데 나와의 독대는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싫다면, 네 결정을 존중하마.”
“아닙니다!”
봉구가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전부 다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반호진이 이렇게 따로 불러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안 좋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꿀꺽!
그래서인지 봉구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반호진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집무실에 도착한 봉구는 반호진이 권하는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또르륵.
봉구가 자리에 앉자 반호진은 익숙하게 차호에 찻잎과 깨끗한 물을 넣고는 공력을 이용해 차를 우려냈다.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 열기로 차를 우려 내려서는 봉구의 찻잔에 따라 주었다.
“마셔.”
“감사합니다.”
은은한 차향이 서서히 실내를 채워 나갔지만 정작 봉구는 그걸 느끼지 못했다.
대답만 하고서 멍하니 차를 응시하다가 반호진이 한 모금 들이켜는 소리를 듣고서야 뒤늦게 찻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때로는 쉬어 가는 시간도 필요해. 근데 무작정 쉬기만 해서는 안 돼. 휴식에도 목적과 이유가 있어야 해. 그렇지 않은 휴식은 제대로 된 휴식이 아냐. 그냥 허송세월을 보내는 거지.”
“목적과 이유요?”
“응. 내가 쉬어야 하는 이유. 그게 있어야 해. 정확하게는 자기 스스로가 알고 있어야 하지.”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할까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봉구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작은 목소리인지 반호진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였다.
“반대로 물어보마. 사람이 고민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맞아. 이건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일종의 불가항력이지.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아. 무념무상은 수행을 오래 한 고승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고. 그러니 사람이 고민하는 건 당연한 거지. 나 역시 마찬가지고.”
“문주님께서도요?”
“나도 사람이니까.”
봉구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반호진이 스스로를 일개 한 명의 사람이라고 표현하자 이상해서였다.
“어…….”
“왜? 내가 사람 같지 않아 보여? 네가 보기에도 괴물처럼 보이나?”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똑같아. 나라고 고민이 없지 않아. 걱정도 많고. 그리고 이건 인간이라면 평생 함께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흔히들 그러잖아. 욕심에는 끝도 없다고. 걱정과 고민도 마찬가지야. 불가에서는 번뇌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담담한 반호진의 목소리에 봉구가 연신 침을 삼켰다.
말을 할 듯 말 듯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런 봉구를 보고도 독촉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저기, 문주님.”
“말해.”
“제가 이곳에 있어도 될까요?”
“말이 이상한데. 넌 내가 데려온 아이가 아냐. 네 스스로 오고 싶다고 했지. 정확하게는 거두어 달라고.”
시릴 정도로 냉정한 말에 봉구가 움찔거렸다.
반호진은 그런 봉구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는 말했지. 다른 아이들과는 차별되는 장기를 네가 가지고 있다고 말이야.”
“……예.”
“근데 지금 보니 그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야.”
“정확하게는,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이건 의외인데.”
점점 수그러지던 봉구의 고개가 멈췄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반호진을 바라본 것이었다.
“예?”
“처음 만났을 때 보여 주었던 독기는 어디로 간 거야? 생활이 너무 평화로웠나? 그것도 아니면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또래를 보고 겁을 먹은 건가?”
부르르르!
봉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실망인데.”
봉구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듣고 싶지 않던 두 글자가 반호진의 입에서 흘러나와서였다.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실망이라는 단어에 봉구의 몸이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나가라고 하시면, 나가겠습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생각하던 장점들, 아직도 기억하느냐?”
“예.”
젖은 목소리로 봉구가 힘겹게 대답했다.
좌절했다고 해서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다만 그것들이 더 이상 장점이라 생각되지 않았을 뿐.
“그것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느냐?”
“예. 제가 좀 더 나은 건 사실이지만 압도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들이고요.”
“또 도망치는구나.”
“…….”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건 중요했다.
그러나 그게 자격지심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었다.
도망치는 자에게 허락된 건 더 지독한 구렁텅이뿐이었다.
“네 선택이 도망치는 것이라면, 존중해. 결국 자신의 삶은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 누구도 네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아무리 도와준들 결국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이 한마디는 해 주고 싶구나. 도망쳐서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 잠시 모면할 수는 있으나 해결책은 될 수 없어.”
“하지만 마주 보고 맞서 싸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맞아. 노력과 결과는 결코 비례하지 않지. 그러나 가능성은 생겨. 비록 희박할지언정 말이지. 하지만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야. 일말의 가능성도 모두 다 사라지지. 넌 지금 그 선택을 하려 하고 있고. 그런데 넌 한 가지 사실을 잠시 망각한 모양이야. 이곳에서 도망치는 순간 넌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거야. 하오문에서 생활하던 너로.”
흠칫!
땅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던 봉구가 몸을 움찔거렸다.
반호진의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물론 반호진의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다.
꼭 하오문에 돌아가는 선택지만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봉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속담처럼 결국 자신은 다시 하오문으로 향할 게 분명했다.
“그건 싫은 모양이구나.”
“예.”
처음으로 봉구가 곧장 대답했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동시에 흐릿했던 두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 눈빛으로 돌아왔구나. 그러니 묻겠다. 넌 무엇이 되고 싶으냐? 최고의 무인이 되고 싶더냐? 아니면 일문의 수장이 되고 싶은 것이냐.”
“저는…….”
봉구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느낌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방금 전까지는 단순히 의기소침했다면 지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동자에 힘이 있었다.
“난 너에게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다. 또한 고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지.”
“아!”
봉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생각해 보니 반호진의 말이 맞아서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반호진은 단 한 번도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또한 강요한 적도 없었고.
“네가 느끼는 좌절감, 열등감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인생은 상대적인 거야.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한 재능을 가진 이들은 존재해. 그러나 세상이 재미있는 게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꼭 최고가 되는 건 아니야.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아. 그걸 증명한 사례는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테고. 그런데 내가 말해 주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냐. 네 말대로 네가 가진 재능들은 별거 아닐 수도 있어. 다른 아이들이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 그렇지만 중요한 건 과연 노력해서 그 능력들을 얻었다고 해서 너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애초에 재능을 가진 네가 노력을 한다면 더 앞서가지 않을까?”
“그럴 것 같아요.”
“사람에게는 각자만의 재능이 있어. 그게 비록 본인이 원한 재능은 아닐지 몰라도. 근데 아예 없는 것보다는 뭐라도 있는 게 낫잖아? 그리고 네 말대로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이걸 잘 조합한다면 원하는 수준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면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든가.”
봉구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반호진의 조언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그걸 알 수 있었기에 반호진은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봉구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것이었다.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아니, 정확하게는 찾은 것 같아요. 멍청하게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인데…….”
“멍청한 게 아니다.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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