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장. 더 나은 미래를 위해. -01
반호진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 정도로 모용희수의 간절한 호소는 그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더불어 의문 역시 비례해서 커졌고.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생각해 봐도 모용희수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여인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든 다 물어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다 해 드릴게요.”
다부지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던 방금 전과 달리 모용희수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호진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부끄러워하기는 해도 반호진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감정에 솔직한 모습은 남자를 떠나 한 명의 사람으로서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분명 모용 소저에게 흠이 될 겁니다. 그런데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네. 제 감정에, 선택에 솔직했으니까요. 그렇다고 문주님께서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 치실 분이 아니기도 하고요. 또 결과는 아직 안 나왔잖아요? 제 선택이 좋은 결실을 맺는다면 후회할 일은 아예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하하하.”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모용희수의 대답에 반호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당황해서 웃는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고민을 하고 결론을 내렸기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반호진은 섣불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는 알아요. 문주님께서 세 사람의 시간을 신경 써 주었다는 사실을요. 상대적으로 남자보다는 여자가 나이에 민감하니까요.”
“대단하시네요.”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거니까요. 다만 실행하는 사람이 얼마 없을 뿐이죠. 다들 알고도 그냥 넘어가니까요.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반호진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모용희수의 색다른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 있어서였다.
그저 착하고 조신하며 보통의 여인과는 다르게 조금 당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예전에 알고 있던 건 모조리 다 부서졌다.
그만큼 모용희수의 모습은 파격적이었다.
한데 신기한 건 그게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미녀로서 이러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지.’
반호진은 혼란스러웠다.
새로운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전생에 그가 알고 있던 모용희수와는 너무나 달라서였다.
겉모습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문주님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상대방을 늘 배려해 주시니까요. 한편으로는 존경스럽기도 하고요. 수많은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셨잖아요. 그러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모용희수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반호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던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 반호진에게 전해졌다.
‘순수함이라.’
반호진의 시선이 반쯤 비어 있는 찻잔으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음에도 벌써 반이나 마신 것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반호진은 모용희수에 대해서 생각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오늘까지를.
‘특이하긴 했지.’
지금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크게 다가왔지만 그 전에 반호진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용희수의 특징은 특이함이었다.
무림을 대표하는 세 명의 미녀 중 한 명임에도 모용희수는 미인 특유의 도도함이 별로 없었다.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독봉이나 매봉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었다.
거기다 모용희수는 특이하게도 요리를 배우고 직접 음식을 만들기까지 했다.
실력도 나쁘지 않았고.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숙수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으나 중요한 건 그녀의 의지와 노력이었다.
스윽.
거기까지 상념이 이어졌을 때 반호진은 시선을 옮겨 모용희수를 바라봤다.
이제는 대답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모용희수 역시 반호진의 답변을 기다렸는지 그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장원에서 머무시는 걸 허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특별대우는 없을 겁니다.”
“괜찮아요. 허락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모용희수가 싱긋 웃었다.
애초에 그녀는 관심과 애정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란 건 오직 기회였기에 실망한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모용희수는 반호진을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방은 척이의 옆 방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척이를 불러 주시겠습니까.”
“네. 그리고 늦었지만 죄송해요. 말도 없이 무작정 따라와서요.”
자리에서 일어난 모용희수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결과적으로 잘 풀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잘못한 게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모용희수는 뒤늦게나마 확실하게 사과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니 모용 소저도 이 이후로는 잊어버리시죠.”
“네. 그리고…….”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저도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모용희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두 눈으로는 연신 반호진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이다.
“그건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여, 역시 그렇겠죠? 죄송합니다! 잊어 주세요! 그럼!”
모용희수가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허둥지둥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반호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똑똑똑.
“저어,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모용희수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문 너머에서 모용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잔뜩 긴장한 모용척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앉아.”
쭈뼛거리는 모용척의 모습에도 반호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대로 차분한 목소리로 자리를 권했다.
“옙.”
하지만 모용척은 평소처럼 편하게 앉을 수가 없었다.
지은 죄가 있기에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렇게 얼어 있어? 누가 보면 내가 혼내는 줄 알겠다.”
“안 혼내세요?”
“화를 내면 모를까 혼을 낼 이유는 없지.”
“아.”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은 말에 모용척의 몸이 굳어졌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반호진은 화도 내지 않았다.
대신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네 입장을 이해하기도 하고. 모용 소저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중간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더만.”
“그렇긴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한마디 언질도 하지 않은 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
모용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부분은 그가 백번 잘못한 것이었기에 코가 탁자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사과는 그만 했으면 됐어. 앉아.”
“봐주시는 겁니까?”
“안 봐주면? 내가 설마 쫓아내기라도 할까 봐?”
“감사합니다!”
모용척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모용척에게 있어 그 어떤 시간보다 길었다.
또한 마음이 무거웠다.
부친인 모용궁도 무서워하지 않는 게 그였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말 그대로 그의 인생을 바꿔 준,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준 사람이 반호진이었기에 모용척으로서는 부친보다 훨씬 큰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모용궁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했고.
“모용 소저는 네 옆 방에서 머물기로 했어. 그러니까 잘 챙겨 줘. 신경도 좀 쓰고. 네가 말했다시피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절대 사건사고를 일으키지 않게 제가 예의주시하겠습니다.”
“모용 소저가 죄인이냐. 그리고 사고는 네가 칠 가능성이 높지. 지금까지 모용 소저가 무상문에서 지내면서 문제 일으킨 적 있어?”
“어…… 없는 것 같습니다.”
모용척이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여동생이 사고 친 게 있나 황급히 확인해 본 것이었다.
“부엌을 몇 번 초토화시킨 적은 있지만 건물 자체를 날려 버린 건 아니니까.”
“몇 번 그랬었죠.”
모용척의 고개가 빠르게 끄덕여졌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서였다.
처음 폭발이 일어났을 당시 정말 많은 이들이 놀랐었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불에 적응한 뒤로는 아예 없었고.”
“맞습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너나 잘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형님.”
“말해.”
반호진의 허락에도 모용척은 우물쭈물했다.
여동생을 받아 준 건 감사하지만 그만큼 걱정도 되어서였다.
더욱이 선우세가에서 공표 아닌 공표를 한지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모용척은 남궁세가와 사천당가, 하북팽가가 어찌 나올지 걱정이 되었다.
“괜찮을까요?”
“다른 가문들 말이지?”
“예.”
“불평불만을 막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 모용 소저가 아니었어도 어떤 식으로든 불평불만을 내뱉었을 거야. 이유야 붙이기 나름이니까.”
모용척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점잖게 소리를 내는 가문들도 있겠으나 반대로 뒤에서 몰래 별의별 말들을 토해 내는 곳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그리고 모용 소저는 자격이 있지. 부친의 반대도 각오하고 자신의 결정에 모든 걸 걸었잖아. 실패하면 본인에게 어떤 낙인이 찍힐지 뻔히 알면서. 그런 용기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거 아니다. 특히나 명문세가의 여식이.”
“그렇지요.”
모용척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도전하는 건 좋았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잃는 게 너무나 컸다.
또한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갈 게 분명했다.
그래서 모용희수를 응원하면서도 계속 말렸던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뭐라 떠들든 무시하면 돼. 어차피 내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으니까. 그리고 형평성에 어긋난다면 똑같이 하면 돼. 난 말린 적 없으니까.”
“아!”
“대박을 얻으려면 그만큼 판돈을 올려야 하지 않겠어?”
“지당하십니다.”
“그렇다고 모용 소저를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어. 나 역시 어느 정도는 책임을 지는 게 맞으니까. 다만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을 네가 챙겨 주라는 거야.”
모용척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면서 새삼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반호진은 그가 남자로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또한 닮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맡겨 주세요. 확실하게 챙기겠습니다.”
“네 동생인 걸 잠시 잊은 것 같다? 임무가 아냐. 당연한 거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나가 봐. 개인 시비가 없어서 많은 점이 불편할 거야. 인력이 필요하면 모용세가에서 부르고.”
“예!”
언제 좌불안석이었냐는 듯이 힘차게 대답하는 모용척의 모습에 반호진은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게 밉지는 않았다.
반호진도 형제가 있기에 모용척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했고.
“곧 있으면 새해네.”
모용세가의 남매가 나가자 조용해진 방 안을 거닐며 반호진이 옅게 웃었다.
지금의 평화로움이야말로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삶이었다.
무탈하고 평온하게.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좀 쉬어 주어야 할 때였다.
***
무상문에 머문 지 제법 되었음에도 봉구는 여전히 많은 것들이 신기했다.
특히 경쟁은 하되 암투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감정도 있었지만 더불어 부정적인 감정도 있었다.
그리고 꽤 많은 이들이 아무 이유 없이 적의나 악의를 품었다.
한데 이곳은 달랐다.
잘 숨기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순했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지.’
그게 봉구는 묘하게 씁쓸했다.
하얀 강아지들만 있는 무리에 검은 털을 가진 강아지 한 마리만 덩그러니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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