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장. 느리지만 한 걸음씩. -04
“저도요.”
“확실히 후계를 낳는 게 소가주의 의무이기는 하죠.”
“조카라.”
선우방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우 넘어가나 싶었는데 반호진이 불씨를 크게 키워서였다.
게다가 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고, 뜯고, 씹자 선우방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난 네가 나보다 어른이라고 생각해. 원래 남자는 결혼을 하면 진짜 어른이 된다고 하잖아.”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그럼 앞으로는 영매를 형수님이라 불러.”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대신 나도 나중에 장가가면 형수님이라 부르게 하지 않을게.”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툴툴거리는 선우방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건 팽수영도 마찬가지였다.
“농담은 이쯤하고, 앞으로 잘 살아.”
“마치 헤어질 것처럼 말한다?”
“넌 여기 있어야지. 이제는 아내도 있는데. 설마 부인을 독수공방시킬 생각이야?”
팽수영이 슬쩍 남편을 바라봤다.
그녀가 지금껏 봐 온 선우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서였다.
그 정도로 선우방과 반호진의 사이는 돈독했다.
이런 장난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말이다.
“으음!”
“같이 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이제 제수씨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 선우세가야. 또한 네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렇지.”
선우방이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반호진 말대로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함께 무상문에 가는 건 진짜 욕심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아는데, 그럴 필요 없어. 이제는 너 혼자서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으니까. 자랑 같지만 그 예로 내가 있잖아. 환경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본인의 의지니까. 넌 이미 충분히 보고, 겪어 봤잖아. 이제부터는 그걸 어떻게 너의 것으로 만들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해.”
“귀신같네.”
“그럴 수밖에. 나도 똑같은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래도 아쉽다. 정도 많이 들었는데…….”
선우방의 시선이 반호진을 지나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에게로 향했다.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정 역시 깊어진 상태였기에 선우방은 진심으로 아쉬웠다.
이대로 모두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제수씨 서운하겠다.”
“저는 괜찮아요. 어떤 심정일지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하고요. 사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가가와 함께 무상문에 가고 싶어요.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팽수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반호진이 부담을 느끼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남편인 선우방이야 친구이니 무작정 찾아가도 이상하지 않지만 자신은 달랐기에 팽수영은 미리 허락을 구했다.
“방이와 함께라면 언제라도 괜찮습니다.”
“그럼 여동생과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팽 소저도 괜찮습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팽수영은 물론이고 선우방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반호진이 이렇게 순순히 허락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팽화영의 재능을 알기에 이득이면 이득이었지 손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웬일이래?”
“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중원무림에 고수가 많아져서 나쁠 건 없고.”
“귀찮음을 감수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거지?”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지.”
반호진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기에 순순히 인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팽만철에게 여지를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반호진이 허락한 건 여인으로서의 팽화영이 아니라 미래의 도후이기에 허락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문주님. 화영이도 기뻐할 거예요. 당장은 힘들겠지만 나중에 꼭 가가랑 함께 방문할게요.”
“편할 때 오시면 됩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막 혼례를 올렸기에 무상문에 찾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건 팽수영뿐만 아니라 선우방도 마찬가지였기에 반호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시작을 끊었으니 너희들도 빨리 갔으면 좋겠다.”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죠. 형이 장가갔다고 우리가 반드시 뒤따라서 가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너나 이륭이는 몰라도 척이는 얼마 안 남았을 거 같은데?”
선우방의 시선이 서조운을 지나 모용척에게로 향했다.
여러모로 그와 상황이 가장 비슷해서였다.
그걸 모용척도 알아서인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 말은요.”
“그만큼 다들 생각이 비슷하다는 뜻이니까.”
“아직 멀었어요. 생각도 없고요.”
“그래.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을 거야.”
선우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이다.
“혼인한 게 좋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
“무, 물론이지.”
“근데 왜 말을 더듬어?”
“갑자기 질문하니까 그렇지.”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었던 선우방이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제발 이쯤에서 그만해 달라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모두가 폭소했다.
“너는 앞으로도 잘할 거야. 그러니 좀 더 네 자신을 믿어. 노력할 마음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을 텐데 그건 아니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네가 지금 느끼는 두려움은 발전하지 못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 혼자만 떨어져서 뒤처지지는 않을까. 근데 결국 끝은 같아. 수십 개의 길 중 자신에게 맞는 길을 가면 돼.”
“귀신이네 진짜.”
“말했잖아. 내가 이미 거쳐 간 길이라고.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장난기를 쏙 빼고서 반호진이 말했다.
그 정도로 반호진은 선우방을 믿었다.
미래가 많이 바뀌었기에 이제는 장담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건 있는 법이었다.
“고맙다. 걱정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아.”
“그렇다고 농땡이 피우지는 말고. 근면성실보다 중요한 건 없다.”
“다행스럽게도 그건 내가 가장 잘하는 거라.”
“지켜보겠어.”
“그래. 그럼 이제 밥 먹자.”
가벼워진 마음만큼이나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선우방이 작은 종을 흔들었다.
준비된 음식을 가져오라는 신호였다.
잠시 후 시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들을 가져왔다.
***
새신랑의 친구로서 선우세가에서 며칠을 더 머문 후 집으로 돌아온 반호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했다.
웬만해서는 평정심이 흔들리지 않는 반호진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혀, 형님.”
“너는 입 다물고. 아무리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어도 나한테는 말을 해 줬어야지. 이거 어떻게 보면 배신이다.”
“으음!”
모용척이 침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좌불안석도 이런 좌불안석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모용척도 어쩔 수가 없었다.
스윽.
안절부절못하는 모용척을 일별한 반호진이 남장을 하고 있는 모용희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 시선을 느낀 듯 모용희수가 움찔거렸다.
“모용 소저.”
“……네.”
고저 없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모용희수가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대답했다.
지은 죄가 있기에 모용희수는 반호진을 쳐다보지 못하고 애꿎은 바닥만 바라봤다.
“척아.”
“예, 형님.”
“자리 좀 비켜 주겠느냐? 아무래도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다.”
아무리 남매 사이라고 하나 서로에 대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남들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으나 혈육에게는 그러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고.
더욱이 지금과 같은 일은 어찌 보면 남녀 사이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었기에 반호진은 남매 양쪽을 배려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죄송하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이 자리에서 해도 된다면.”
반호진의 시선이 잠시 모용희수에게 머물렀다가 모용척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모용척은 긴장한 상태인데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화가 난 상태임에도 반호진이 자신과 여동생을 배려해 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모용척은 더더욱 반호진에게 미안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여동생을 말리지 않은 것도, 형님께 보고하지 않은 것 모두요. 그러니 벌은 제가 다 받겠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다 지겠다?”
“……예.”
매일 싸우고 말을 듣지 않는 동생이지만 그래도 동생이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무리 밉고 싫어도 피는 물보다 진했다.
때려도 자신이 때리면 때렸지 남에게 맞고 오는 건 싫었기에 모용척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하자.”
“알겠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있던 모용척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에둘러 거절했음을 알아서였다.
그러나 그는 따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조용히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끼이익. 쿵.
모용척의 현재 심정을 알려 주듯 문이 천천히 닫혔다.
그리고 서서히 멀어지는 모용척의 기척도 느껴졌다.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모양인지 속도가 평소에 비해 한없이 느렸다.
꿀꺽!
동시에 모용희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본인도 이 정도로 소리가 클 줄은 몰랐는지 침을 삼키면서 화들짝 놀랐다.
“취조나 심문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긴장하지 마시죠.”
“정말요?”
“예. 제게 그럴 자격도 없고요. 단지 궁금할 뿐입니다. 모용 소저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요.”
반호진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무림삼봉 중 백봉이라 불리는 모용희수가, 그 못지않게 많은 곳에서 혼담이 들어오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말이다.
“정말 모르시나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압니다. 다만 제가 궁금한 건 그 이유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알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타심통(他心通)의 경지에 오른 것도 아닌지라.”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반호진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뜬금없는 말에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모용희수는 그런 반호진의 반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음에도 설명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선우세가에서 세 가주님들께 공표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소식이 모용세가까지 전해진 모양이군요.”
“문주님과 남궁 대협, 당 대협, 팽 대협은 아무래도 모두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기는 하죠.”
반호진은 순순히 인정했다.
또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았다.
세 사람을 만나 확실하게 뜻을 전한 이유가 바로 이 점 때문이어서였다.
그래야 끈덕지게 달라붙던 이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기에 반호진은 일부러 그 자리를 만들었다.
“문주님께서 어떤 의미로 그런 자리를 만들었는지도 알고요.”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이 이렇게 행동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그럼에도 오고 싶었어요.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허락해 주셨어요. 그만큼 걱정도 많이 하셨지만요.”
“안 그럴 수가 없겠죠.”
저돌적인 모용희수의 행동과 대답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 정도로 지금의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감정도 싹텄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해요. 탐탁지 않지만 오빠의 마음도요. 그렇지만 저는 솔직하고 싶었어요. 문주님께서 공표하신 이유를 알지만, 그럼에도 기회를 얻고 싶었어요.”
“상처를 입어도요?”
“네. 실패나 성공은 시도해야만 나오는 결과이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요. 물론 상처를 입지 않을 수는 있겠죠. 그러나 나중에 남는 건 후회라고 생각해요. 왜 그땐 용기를 내지 않았을까. 한 발만 내디디면 되는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그렇게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상처를 입더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그러니 저에게 딱 한 번의 기회를 주세요. 문주님의 관심이나 사랑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구걸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저 기회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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