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장. 느리지만 한 걸음씩. -03
“갑작스러운 초대였을 텐데 거절하지 않고 응해 주어서 고맙네.”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제갈 대협을 한번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제가 가고 싶은 길을 먼저 걸어가고 계시니까요.”
“하긴. 선배라고도 할 수 있겠군. 본가와 사마세가는 참 많은 것이 비슷하니까.”
“과거에는 그랬었지요. 그러나 앞으로는 많이 다를 겁니다.”
제갈문곡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사마의성이 말했다.
조금 과장하면 선전포고하듯이 말이다.
“많이 다를 것이라.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해지는구려. 더불어 기대도 되고 말일세.”
“기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말하니 더 기대가 되네만.”
자신감 넘치는 포부에 제갈문곡이 소리 내어 웃었다.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걸 사마의성도 알았기에 내심 의아했다.
단둘이 보는 게 처음이었지 다른 이들과 함께 만난 적은 몇 번 있었기에 사마의성은 제갈문곡의 이런 반응이 조금 이상했으나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우선은 가문을 재건하는 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그게 제일 큰 목표인가?”
“예.”
“쉽지는 않을 것이네.”
“그래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그게 제 숙명이니까요.”
제갈문곡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대로 그가 사마의성의 상황이었어도 똑같았을 터였다.
“이런. 손님을 초대해 놓고 차도 따라 주지 않았군. 따로 선호하는 차가 있나? 본가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차를 좋아하는지라 웬만한 차는 다 가지고 다닌다네.”
“딱히 가리는 건 없습니다. 제갈 대협께서 드시는 걸로 마시겠습니다.”
“알겠네.”
묘하게 딱딱한 어투에 제갈문곡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부분을 콕 짚어 말하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자신이 예민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몇 번 마주치기는 했어도 지금처럼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기도 했고.
또르륵.
“향이 좋네요.”
“어떤 차인지 알겠나?”
“백호은침 같습니다만.”
“맞네. 용정차도 있지만 자네에게는 백호은침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일세.”
“상등품인 것 같습니다. 제가 최상품의 백호은침을 마셔 보지 못해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요.”
은은하면서도 진한 향은 지금까지 사마의성이 마셔 봤던 백호은침 중 으뜸이었다.
그래서 사마의성은 이게 최상품이나 상등품일 거라고 추측했다.
“최상품에 가까운 백호은침이라네. 아무리 나라도 최상품은 쉽게 구하기가 힘들어서 말이지. 워낙에 소량만 만들어지기도 하고.”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나야말로 잘 마셔 주어서 고맙네.”
공손하게 고개 숙여 대답한 후 차를 한 모금 들이켜는 사마의성을 제갈문곡은 지그시 바라봤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였다.
그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사마의성도 차를 상당히 즐긴다고 들었다.
“좋네요. 입맛이 까다로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요.”
“입에 맞다니 다행이구먼. 원한다면 조금 나눠 줄 수도 있네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정중히 거절하는 사마의성의 모습에 제갈문곡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리 선을 그으려는 것임을 알 수 있어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부담 갖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정말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예의상 한번 더 권했던 제갈문곡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어서였다.
근데 신기한 건 이래서 더 사마의성이 마음에 들었다.
후르릅.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제갈문곡은 사마의성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사마의성 역시 제갈문곡이 자신을 불러낸 것에 대해 생각했기에 자연스럽게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 이런. 손님을 초대해 놓고 방치하다니. 정말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용한 시간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제가 언제 또 제갈 대협과 이렇게 독대를 하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닐세. 당장 이곳에서만 하더라도 나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이들이 많지 않나.”
“저는 제갈 대협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허허허. 그리 생각해 준다니 고맙군. 근데 나와의 독대를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네. 자네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런 자리는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제갈문곡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똑똑한 사마의성에게는 차라리 정공법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에둘러 표현하면 사마의성도 똑같이 애매모호하게 대답할 가능성이 컸기에 제갈문곡은 정공법을 택했다.
“마지막 말씀이 의미심장하네요.”
“자네라면 무슨 뜻인지 짐작하겠지. 또한 내가 초대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도 했을 테고.”
“그렇습니다.”
사마의성은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갈문곡의 말대로 이런 식의 대화가 이어질 거라 짐작해서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온 모양이로군.”
“예.”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내 말을 한번 들어 봐 주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사마의성은 순순히 제갈문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잠깐 시간을 내 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대가가 최상품에 근접한 백호은침이라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이렇게 제갈세가의 수장과 독대하는 것도 사실 큰 이득이지만.’
제갈문곡이 겸손하게 말했으나 그는 무림오대세가의 수장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무게감이 살짝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위인은 절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결코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내가 자네를 따로 보자고 한 건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네. 알고 있겠지만 바로 정략결혼이지. 상대는 내 아들이자 본가의 소가주이고. 물론 내 아들이 많은 점에서 부족하다는 걸 잘 알고 있네.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자네 주변에 있는 이들하고만 비교해도 명백하게 알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네. 본가가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력이지만 세력에서 나오는 힘 역시 무시할 수 없다네. 또한 본가는, 제갈세가는 사마세가를 재건하는 일에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줄 수 있네.”
제갈문곡은 최대한 천천히 말했다.
자신이 급하지 않다는 걸 목소리와 표정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사마의성이 탐나는 것은 맞지만 간절한 건 또 아니었다.
“제갈세가라면 그럴 역량이 있지요.”
“역시 이 정도로는 마음을 돌리기 힘든가 보군.”
“부족하기보다는 제 욕심 때문입니다. 제갈세가의 도움으로 일어선 사마세가보다는 저 혼자 일으킨 사마세가를 원합니다.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면 절대 혼자서 걷지 못하니까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제갈문곡의 심유한 눈빛이 사마의성에게 향했다.
마치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강렬한 제갈문곡의 시선에도 사마의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눈빛을 흘려 넘겼다.
“예.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거절할 생각도 없지만요.”
“허허허허.”
제갈문곡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마지막 말은 헛된 곳에 힘쓰지 말란 말과 같아서였다.
남궁세가, 사천당가, 하북팽가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나 제갈문곡도 아직 포기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관점에서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데 유일하게 사마의성만이 그걸 간파하자 제갈문곡은 아쉬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오빠동생 사이이니 어느 쪽도 다 가능하니까요.”
“욕심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틀린 말이 아니니 뭐라 따질 수도 없군. 무슨 말을 해도 궁색하기만 할 뿐이니.”
“그렇다고 해서 꼭 제가 유리한 것도 아니에요.”
“그것도 맞지.”
얼굴 가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제갈문곡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매하다는 표현이 딱 맞아서였다.
더불어 사천당가와 남궁세가, 하북팽가가 골머리 좀 썩을 듯싶었다.
반호진의 지근거리에 사마의성이 있으니 세 사람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게 분명해서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제갈문곡이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한 차, 감사히 마셨습니다.”
“벌써 가려는가?”
“제갈 대협의 시간을 더 빼앗아서는 안 될 것 같아서요.”
“조심히 가게.”
말은 자신을 위한다고 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하지만 사마의성을 더 붙잡을 명분도 없었기에 제갈문곡으로서는 그녀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사마의성이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나섰다.
달칵.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제갈문곡의 표정이 속마음과 똑같아졌다.
진심으로 아쉬운 기색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개였기에 제갈문곡은 깊은 한숨과 함께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신수가 훤하네.”
“볼이 아주 홀쭉한데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돌려서 말해야지.”
“아!”
반호진이 선우방의 옆에 조신하게 앉아 있는 팽수영에게 눈짓을 하자 서조운이 퍼뜩 놀랐다.
미처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일행들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이제는 형수라 할 수 있는 팽수영도 같이 있었기에 서조운은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괜찮아요. 가가랑 허물없는 사이인 걸 모르지 않으니까요.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앞으로는 말조심하겠습니다.”
팽수영이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가볍게 치며 말했으나 서조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니만큼 그에 맞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친한 형인 건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형수 앞에서는 예의를 지키는 게 맞았다.
“어이구. 가가라니.”
“가가라는 단어가 어때서? 당연한 건데.”
“넌 닭살이 안 돋냐?”
“돋을 게 어디 있어?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
양팔을 벅벅 긁는 모용척과 달리 정이륭은 평온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정략결혼임에도 둘 사이가 꽤 오붓해 보여서였다.
“뭐, 잘 어울리기는 하네.”
“그렇게 틱틱대면 질투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여.”
“질투라니!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있지.”
검지를 휘휘 흔들며 말하는 정이륭의 모습에 모용척의 얼굴이 붉어졌다.
흥분으로 인해 안면이 달아오른 것이었다.
“아니거든!”
“어쨌든 모두의 의견은 나쁘지 않다는 쪽이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결혼 축하한다.”
“고맙다.”
흥분한 모용척의 어깨를 다독이며 반호진이 너무나 쉽게 분위기를 정리했다.
딱 한마디로 모든 걸 정리했던 것이다.
“제수씨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제수씨라니. 형수님이지.”
선우방이 짐짓 정색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호칭을 정정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형수님은 무슨. 당연히 제수씨지.”
“아무리 너라도 이건 양보 못 한다!”
“그럼 생일로 따지든가.”
“끄응!”
마치 이렇게 나올 걸 예상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받아치는 반호진의 한마디에 선우방이 앓는 소리를 냈다.
생일로 따지면 그가 한 달가량 늦어서였다.
“헛된 꿈은 그만 꾸고 현실적이고 건설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어때? 선우세가의 소가주로서 해야 할 의무가 아직 하나 남아 있잖아.”
반호진의 능글맞은 표정과 목소리에 팽수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그녀는 무슨 말인지 단박에 이해한 것이었다.
선우방도 마찬가지인 듯 목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 다른 얘기로 넘어가자.”
“개인적인 바람인데, 나는 조카를 빨리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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