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장. 느리지만 한 걸음씩. -02
사마의성과 인사를 나눈 난희주가 모용희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모용희수보다는 사마의성이 좀 더 편했기에 먼저 인사를 나눈 것이지 결코 그녀를 차별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난희주는 사마의성을 대할 때보다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놀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불편하거나 싫지는 않았어요. 소문주님께서 미리 언질을 해 주시기도 했고요. 이런 자리가 만들어진 게 신기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여자들끼리만 모인 적은 없잖아요.”
“맞아요. 보통은 다 같이 모였었죠. 오빠를 중심으로요.”
“들을 때마다 부럽네요. 무상문주님을 오빠라고 편히 부를 수 있다는 게.”
모용희수가 진심으로 씁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꽤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여전히 그녀와 반호진의 거리는 똑같았다.
눈곱만큼도 좁혀지지 않았기에 모용희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같은 마음이신가 보네요?”
“다 똑같지 않을까요? 여기 계신 두 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요.”
모용희수가 신색을 수습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앞에 앉아 있는 난희주야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 사마의성 역시 그녀가 보기에는 마찬가지였다.
“저는 힘들죠. 모용 소저와는 상황이 정말 많이 다르기도 하고요.”
한발 물러나는 난희주의 발언에 모용희수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하니 난희주가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라서였다.
반면에 사마의성은 짐작했다는 듯이 묵묵히 차만 홀짝였다.
“의외이신가요?”
“네.”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는 모용희수의 모습에 난희주가 옅게 웃었다.
저러는 게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였다.
솔직히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기도 했고.
그러나 그녀는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저에게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요.”
“그런가요.”
“두 분께 이 말을 해 드리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어요. 미움은 이왕이면 덜 받는 게 좋으니까요.”
“그래도 또 모르죠.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용희수가 묘한 눈빛으로 난희주를 바라봤다.
지금은 이렇게 말해도 나중에는 변할 수 있어서였다.
괜히 뒷간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의 마음이 다르다는 속담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근데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모용 소저도 아시잖아요. 여자에게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이해되네요.”
여전히 난희주를 믿지는 않았지만 납득은 되었다.
동시에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도.
“개인적으로 두 분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남자들은 모르는 여자들만의 대화도 있잖아요?”
난희주의 시선이 사마의성에게로 향했다.
모용희수가 그녀를 힐끔거리자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렇긴 하죠.”
“오늘 많이 시달리셨죠?”
“부정은 못 하겠네요.”
조용히 차를 들이켜던 사마의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일 때보다 여자라고 밝힌 후 그녀를 찾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자신을 찾는 이유가, 원하는 이유가 너무나 뻔히 보여서였다.
“지금의 사마 소저는 사마세가와 동일시되고 있으니까요. 더구나 오빠와도 각별한 사이이고요. 알고 계시죠? 오빠를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여자는 저와 사마 소저뿐이라는 사실을요.”
“잘 알죠.”
“그래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어쩌면 오늘 사마 소저를 찾은 이유 중 하나가 그거일지도 모르고요.”
두 사람의 대화에 모용희수가 눈을 빛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가 궁금한 것을 난희주가 대신 물어봐 주어서였다.
물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궁금해서겠지만 중요한 건 사마의성의 속내를 알아낼 기회라는 것이었다.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을까요.”
“……순리요?”
“네. 억지로 잇고자 해서 이어지는 게 인연이 아니니까요. 그건 두 분 모두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호호호.”
예상치 못한 사마의성의 대답에 난희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나 고단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걸 이렇게 빠져나갈 줄은 몰랐기에 난희주는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어본다고 한들 사마의성이 순순히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굳이 자신이 나서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순리대로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두 분을 응원해요. 그렇다고 기회를 버릴 차 버릴 생각도 없지만요.”
“나서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겠다는 말씀이시죠?”
“네. 중요한 건 결국 오빠의 마음이니까요.”
조급한 모용희수와 달리 사마의성은 여유로웠다.
동갑이지만 시야가 달랐기에 그녀는 초조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늘 그렇듯이 최악의 상황도 상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고.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사마 소저.”
“별말씀을요.”
“우리 선의의 경쟁을 해 봐요.”
“네.”
여느 여인들의 기 싸움과는 사뭇 달랐으나 난희주에게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두 여자의 차가운 불꽃과도 같은 각오가.
선우방이 새신랑으로서 초야를 치르고 있을 때 반호진의 방으로 세 명의 인영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은 아니고 반호진의 초대였다.
끼이익.
반호진은 물론이고 방문자 세 명 모두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절대고수들이었기에 따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알아서 기척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앞장서서 걸어가던 팽만철은 호쾌하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 사이에 너무 딱딱하게 굴 거 없어. 편하게 해, 편하게.”
“그러기에는 배분도, 나이도 차이가 많이 나지 않습니까. 친구의 장인어른이시기도 하고요.”
“친구의 장인어른보다는 그냥 장인어른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앉으시죠.”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반호진이 자리를 권했다.
그 모습에 팽만철이 얼굴 가득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제는 아예 받아 주지도 않는 것 같아서였다.
“조금 놀랐네. 반 문주가 직접 우리를 초대할 줄은 몰랐거든.”
“한번쯤은 이런 자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당우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왠지 모르게 반호진의 발언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와서였다.
그건 남궁호도 마찬가지였는지 동공이 살짝 커졌다가 본래의 크기로 되돌아왔다.
“필요하기는 했네. 근데 이렇게 다 모일 줄은 몰랐네만. 난 이왕이면 단둘이 봤으면 싶었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릴!”
팽만철이 노성을 터트렸다.
그것만은 그가 용납할 수 없어서였다.
남궁호도 불안한데 음흉한 당우혁은 더더욱 안 됐다.
“차 한 잔 하시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시죠.”
“크흠!”
반호진이 차를 따라 주었음에도 팽만철의 일그러진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아무래도 팽가주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이야.”
“좋은 날에 굳이 흥분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속은 저 녀석이 먼저 긁었어!”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남궁호와 반호진을 향해 팽만철이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실내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으나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팽만철이 입을 여는 순간 셋 모두 청각을 차단한 것이었다.
반호진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소리가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게 강기막을 일으켜 차단했다.
“개인적인 바람도 말 못 하나?”
“속을 긁지는 말았어야지!”
“싸우실 거면 이만 자리를 파하죠.”
팽만철의 고성에도 눈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맞받아치던 당우혁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건 팽만철도 마찬가지인 듯 언제 노성을 터트렸냐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 다 대화할 준비가 된 것 같은데.”
“그런 것 같네요.”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당우혁과 팽만철의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세 쌍의 시선이 반호진에게 집중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세 분을 모신 건 이제는 확실하게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역시 우리의 딸들과 관련된 내용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입을 연 남궁호는 물론이고 팽만철과 당우혁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분위기로 보건대 그들에게 좋은 소식 같지는 않아서였다.
“세 분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신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도 잘 알고 있고요. 그러나 예전에도 은연중에 말씀드렸었지만 저는 정략결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 마음이 바뀔 것 같지도 않고요.”
“꼭 정략결혼을 원한 건 아니네. 만나다가 마음이 맞으면 그때 혼례를 올려도 되는 일일세.”
“옳은 말을 하는군. 적어도 나는 정략결혼을 원한다고 말한 적 없어.”
팽만철이 다급하게 남궁호의 말을 받았다.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반호진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반호진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이제 그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 단호한 반호진의 한마디에 세 사람 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두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당혹감이 얼굴을 가득 채웠다.
“제가 왜 이렇게 말을 하는지 세 분 모두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잠깐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시죠.”
“왜 벌써 결정을 내린 것인가? 내가 알기로 반 문주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다 나이도 젊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던 당우혁이 한 차례 숨을 고른 후 물었다.
그로서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기에 얼굴에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감정이 가득했다.
“당가주님 말씀대로 저는 창창하지만 소저들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한창 아름다울 시기이지 않습니까. 이 꽃 같은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는 건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소저들 모두 좋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막연히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세 분 소저들을 아껴 주고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는 게 더 행복할 거라 생각합니다.”
“나와 내 딸이 괜찮다고 해도 말인가?”
“예. 제 결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허어…….”
당우혁이 자기도 모르게 장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그건 팽만철과 남궁호도 다르지 않았다.
둘 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번 반호진의 대답에서 굳건한 의지를 느낄 수 있어서였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그건 아닙니다. 그저 제 삶을 좀 누리고 싶어서요.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요.”
“흐음.”
남궁호가 코로 길게 날숨을 내쉬었다.
한숨과도 같은 날숨이었는데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반호진이 이렇게 말해 주는 게 정말 큰 배려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남궁호의 속마음은 거절 쪽에 무게가 실렸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반호진이라는 인물이 너무나 아까워서였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과를 안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일인데.”
“죄송합니다.”
“에잉!”
다시 한번 사과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팽만철이 혀를 찼다.
그러나 닦달하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 게 반호진이 배려해 주는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대신 그는 다른 걸 생각했다.
사마의성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긴장한 기색은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초대였으나 그렇다고 긴장해야 하는 만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분명 강호에서의 위상은 대단했지만 그녀와 늘 함께하는 반호진에 비하면 아무래도 격이 떨어졌다.
똑똑똑.
“들어오게나.”
“예.”
이미 자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는지 누구냐고 묻지 않는 중후한 목소리에 사마의성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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