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장. 느리지만 한 걸음씩. -01
“어…….”
반호진의 반문에 서조운이 주변을 살폈다.
많은 하객들이 연회장을 채우고 있기에 혹시라도 엿들을까 싶어서였다.
“편하게 말해.”
“애정 없는 결혼이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결혼은 이런 게 아니거든요. 물론 방이 형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해요. 소가주라는 자리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르니까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막내라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하고요.”
“답을 잘 알고 있네.”
최대한 작게 말하는 서조운을 보며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그로서는 서조운의 입장도 이해가 가서였다.
“알고는 있죠. 저도 다 컸으니까요. 다만 씁쓸해서 그렇죠. 어른의 비애를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어른의 비애는 무슨.”
가만히 듣고 있던 모용척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이가 없는 건 반호진과 사마의성, 정이륭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모용척의 나이는 서조운이 비해 겨우 한 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척아.”
“예, 형님!”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모르는 건 아니다. 그것도 편견이야.”
“시,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할 것까지는 없고.”
실언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모용척이 기합이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겠죠?”
“잘살 거야. 우리보다는 정략결혼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도 하고.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고. 나름 잘사는 이들도 많고.”
“하긴. 저보다는 많이 알 테니까요. 근데 장인이 하북팽가주님인 건 좀.”
서조운이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라면 아무리 가문을 위해서라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남들이야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라지만 그건 그냥 알고 지낼 때의 얘기였다.
장인이 팽만철이라고 생각하면 말 그대로 끔찍했다.
“그건 나도 좀.”
“쉽지 않은 각오이기는 하지.”
모용척과 정이륭도 서조운과 같은 마음이라는 듯이 냉큼 말을 받았다.
아무리 가문을 위한 결정이라고 하나 그래도 이왕이면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았다.
선택지가 팽수영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저라도 장인이 팽 대협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개방주님.”
“어이쿠! 벌써 소식이 문주님에게까지 전해진 겁니까?”
슬쩍 반호진의 옆으로 다가온 오중건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하니 반호진이 알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대부분 알고 있던데요.”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관심 없는 이들도 모르고요.”
“세상일에 아예 무관심하지는 않습니다.”
“저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지요?”
“방주님보다는 개방에 관심이 아주 조금 있습니다.”
오중건이 실소를 흘렸다.
아주 조금이라는 네 글자가 유독 깊게 다가와서였다.
딱히 강조하듯 말하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이상하게도 서운하기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개방에라도 관심을 가져 주셔서.”
“농담입니다. 방주님께는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이.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이러시면 제가 불안해집니다.”
오중건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이렇게 나오면 어깨가 들썩이기보다는 부담스러워서였다.
차라리 막 대하는 게 그는 마음 편했다.
“저는 진심인데요?”
“그냥 후개 때처럼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취임식은 따로 안 하십니까?”
“거지에게 취임식이라니요. 그럴 돈 없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분타주들하고 방도들에게 소식만 전하면 됩니다.”
방주가 되었음에도 오중건은 후개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듯이 말했다.
실제로 진짜 그렇게 느끼기도 했고 말이다.
“개방답기는 하네요.”
“늘 이래 왔기도 하고요.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후개 때랑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개방을 대표하는 것 말고는요. 그래서 딱히 인수인계할 게 없더라고요.”
“힘내십시오.”
“그래야지요. 힘, 내야지요.”
언제 웃었냐는 듯이 오중건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개방의 수장이 되었지만 딱히 좋은 점을 느낄 수가 없어서였다.
신임 방주가 되었기에 많은 이들이 대접해 주긴 했으나 그것과 행복은 별개였다.
“오 대협이라면 잘하실 겁니다.”
“그럴까요?”
“예. 전대 방주님이 계실 때에도 개방을 잘 이끄시지 않았습니까. 이미 능력은 충분히 증명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증명이라.”
오중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이렇게 말해 주자 감동이 폭풍처럼 밀려와서였다.
“전대 방주님은 어떠십니까?”
“여전히 요양 중이시긴 하지만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술도 매일 드시고요. 몸이 그렇게 안 좋으면 금주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제는 짐을 내려놓았다고 더 많이 드십니다.”
“마시던 걸 갑자기 안 마시면 몸에 이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한 번에 끊는 건 누구나 힘들기도 하고요. 차라리 서서히 줄여 나가는 식으로 하시죠.”
걱정이 가득 담긴 깊은 한숨에 반호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린다고 해서 될 인물이 아님을 잘 알아서였다.
“서서히 줄이는 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쉽지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하는 오중건의 모습을 보며 반호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개왕의 술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애주가 중의 애주가였기에 건강을 위해서 술을 줄이라고 말해 봤자 소용없을 게 분명했다.
“뭐, 저도 사돈 남 말할 자격은 없지만요. 그나저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네요. 팽가주께서 강력하게 원한 혼인이라서 그런 건지.”
반호진 일행이 오로지 선우방에 집중했다면 오중건은 연회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폈다.
특히나 하북팽가 쪽을 말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같은 남자로서 조금 안쓰럽기도 하네요.”
“다들 생각이 비슷한 모양이네요. 저희들도 그 얘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결혼은 남자에게 있어 지옥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저야 평생토록 모르겠지만요. 어떤 의미에서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속당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 꼭 불행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겠죠.”
오중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십인십색이라는 말처럼 사람의 취향은 다양했다.
그리고 선우방이 순순히 팽만철에게 휘둘릴 것 같지도 않았다.
모나지 않은 성격이라고 해서 꼭 만만한 건 아니었다.
“확실히 전쟁이 끝났다는 게 몸으로 느껴지네요. 팽가주님께서 이런 걸 생각하고 혼례를 진행시킨 건 아니겠지만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습니까. 저야 그런 것들보다는 친구가 혼인하는 게 더 중요하지만요.”
“이런 걸 보면 참 부럽습니다. 저는 아는 사람은 많아도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없거든요. 예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만날 수 없고요.”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상처가 다 아물었다는 뜻이니까요. 또 나이 차이는 좀 나지만 저도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흐흐흐!”
오중건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의도는 명백했다.
“그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도 욕심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부린다고 한들 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도 하고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인사할 곳이 많은지라.”
오중건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절묘하게 치고 빠지는 기술을 선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바쁘기도 했다.
정식으로 개방주가 된 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외부 행사였기에 바쁠 수밖에 없었다.
“여전하시네요.”
“그러게. 근데 벌써부터 저렇게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 말이지.”
“어째서요?”
“이제는 개방의 일도 일이지만 후계자도 키워야 하니까. 특히나 개방은 후개를 한 명만 정하기에 선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아.”
서조운이 입을 살짝 벌렸다.
개방주가 된 것만 축하해 주었지 후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해서였다.
“근데 어쩔 수 없어. 개방의 방주로서 후개를 키워야 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명복을 빌어 드려야겠네요.”
“우선은 방이부터 빌어 주자고. 이따가 신부랑 인사하러 올 때 힘 좀 실어 주고. 그래야 초야를 잘 보낼 수 있지 않겠어?”
“반대로 힘을 빼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신부한테 놀림을 받을 테니.”
서조운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맺혔다.
그런데 그건 같은 원탁에 앉아 있던 모용척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히죽 웃었다.
“둘 다 왜 그래?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것도 다 추억이야.”
“너희들 다 돌려받는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 지금이야 재미있지만 나중에 두 사람이 혼인을 하면 겁부터 날걸?”
정이륭이 모용척과 서조운을 차례대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흠칫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서였다.
선우방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혼인을 안 할 자신이 있으면 하지 말고.”
이어지는 정이륭의 말에 서조운과 모용척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지만 후환도 두려웠다.
“아, 이대로 포기해야만 하나.”
“방이 형 골탕 먹일 생각 하지 말고 순수하게 축하만 해 줘라. 이제부터는 한 가문의 가장인데.”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이젠 가장이네.”
“애만 낳으면 진짜 어른이 되는 거지.”
“허어.”
정이륭의 말에 모용척이 상상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혼례를 올리는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아이까지 낳는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묘했다.
“자식이라. 전 낳을 수 있는 데까지는 낳고 싶어요. 아들, 딸 구분하지 않고요.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고요. 구양절맥이 유전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걱정하지 마. 연이어 절맥을 가지고 태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니까. 설사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도 괜찮아. 치료한 너도 있고, 나도 있으니까.”
“형님.”
서조운이 감격한 눈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걱정이 조금씩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는 말자고. 행복하게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명심하겠습니다!”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서조운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몇몇은 반호진의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행복하게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잠자리에 들었을 야심한 시각에 난희주는 두 사람을 초대했다.
개인적으로 조용히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어서였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문 앞에 있을 백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난희주가 먼저 말했다.
이윽고 문이 천천히 열리며 두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소문주님.”
“많이 놀라신 모양이네요, 사마 소저. 소저라는 호칭이 불편하시다면 가주님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가주라는 호칭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요. 제가 부탁드리면 그때 가주라고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늘 그렇듯이 차분한 사마의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희주가 싱긋 웃었다.
남자에서 여인이 되었지만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외양은 많이 변했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뵈어요.”
“갑작스러운 연락이었을 텐데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모용 소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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