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장. 경사다, 경사. -03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자네다우니 넘어가겠네.”
“왜? 고상하게 말하길 바라나?”
“할 수는 있고?”
“없지.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바꾸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입심이 진짜 많이 늘었어.”
남궁호가 피식 웃었다.
몇 년 사이에 입심이 급격하게 늘었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옛날에는 무작정 힘만 썼다면 지금은 나름 완급조절을 할 줄 알았다.
“크흠! 그만큼 이 몸이 노련해진 게지.”
“그건 아니고. 이제 그만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모인 것 아닌가.”
당우혁이 적당히 중재했다.
불필요한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나도 원하던 바일세.”
“나 역시. 근데 충격을 받은 건 다 똑같은 모양이야.”
“안 받을 수가 있나.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인데. 심지어 반 문주가 막내라고 애지중지하지 않았나.”
당우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정도로 그는 갑자기 여인이 된 사마의성을 경계했다.
익숙함과 친밀함이라는 점에서 누구보다 앞서 있는 게 사마의성이었기 때문이다.
“경계해야 하는 건 맞지. 근데 충격적인 건 반 문주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은데.”
“남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여동생이 되면 당혹스럽기는 하겠지.”
“그러니까. 근데 과연 여자로 느껴질까? 혹시 배신감이 들지는 않을까? 난 그럴 것 같은데 말이지.”
“배신감이라. 그 말도 일리는 있어.”
팽만철이 솥뚜껑 같은 두꺼운 손으로 아래턱을 긁었다.
만약 자신이 반호진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 비밀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고, 그걸 숨기기까지 했다.
이해는 되겠지만 신뢰에는 미세하게라도 금이 갔을 것 같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걸 알아봐야 하는 것 같은데.”
“당장은 힘드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여기 있는 팽가주의 사위와 회포를 풀고 있다는군.”
“그럴 만한 사이이기는 하지. 이왕이면 아내와 처제도 불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우혁과 남궁호가 동시에 실소를 흘렸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였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아직 아내는 아니지. 예비 신부일 뿐인데.”
“초야만 안 치렀을 뿐이지 부부나 마찬가지야.”
“아니지.”
당우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오로지 팽만철의 생각일 뿐이었다.
정작 선우세가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우리가 모인 거 아닌가?”
“미안하군.”
“당가주 때문이야.”
순순히 사과하던 당우혁이 팽만철을 노려봤다.
그러나 당우혁의 매서운 눈빛에도 팽만철은 태연히 웃어 보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두 사람의 생각이 듣고 싶군.”
“우선은 반 문주와 사마의성이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알아내야겠지.”
“내 생각은 달라. 굳이 호진이까지 알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다른 감정이 있었다면 호진이 성격상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했겠지. 그런데 알아보니 사마의성이 자신이 여자라는 걸 밝혔음에도 대하는 게 딱히 달라진 게 없다던데.”
남궁호와 당우혁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팽만철을 바라봤다.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 둘의 모습에 팽만철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놀랍군. 거기까지 조사했을 줄이야.”
“내 말이.”
“흥! 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야! 어쨌거나 중요한 건 사마의성이란 말이지. 고 녀석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핵심이야. 막말로 유일하게 육탄공세가 가능한 신분이니까. 현재로서는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 있기도 하고.”
팽만철의 말에 남궁호와 당우혁이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뭐래도 사마의성은 반호진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기에 팽만철의 의견도 타당했다.
“그렇게까지 할까 싶지만, 사람이 욕심에 눈이 멀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니까.”
“맞아.”
당우혁의 말에 팽만철이 맞장구를 쳤다.
특히나 팽만철이 보기에 당우혁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어쩌면 이미 시도했다가 실패할 수도 있었고.
“이 정도로 위협이 될 줄이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세.”
“떠오른 게 있나?”
“위협이 된다면, 치우면 될 일 아닌가?”
“흐음?”
남궁호가 눈을 껌뻑였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팽만철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와 맺어지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 아닌가? 사마의성을 차지한다면 사마세가 역시 갖게 된다는 뜻이니까.”
“호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당우혁의 모습에 팽만철이 눈을 빛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사마의성은 사마세가의 당대 가주이지만 여인이었다.
그러니 사마의성을 손에 넣는다면 사마세가 역시 덩달아 가질 수 있었다.
“혼수가 사마세가라.”
“좋군.”
“나쁘지 않지.”
아들이 남궁광 하나뿐인 남궁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참전하고 싶어도 참전할 수가 없어서였다.
방계는 많지만 현재 사마의성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어불성설이었다.
반면에 아들이 남아 있는 팽만철과 당우혁은 눈을 반짝였다.
“하북팽가와 사천당가가 안 된다면 다른 곳과 연결해 주는 방법도 있고.”
“그러기에는 아깝지.”
“오랜만에 의견이 일치하는군.”
팽만철과 당우혁이 서로를 바라봤다.
둘 다 사마의성을 다른 곳에 넘겨주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특히 팽만철은 욕심이 꿈틀거렸다.
앞에서는 호방하다고 말하면서 뒤로는 단순무식하다고 세인들이 지껄인다는 걸 잘 알았기에 그는 진심으로 사마의성이 탐이 났다.
“이거이거. 팽가주의 욕심에 불을 지른 것 같은데.”
“본가에 아주 필요한 인재인 것 같아. 반대로 사천당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닌가?”
“말을 이상하게 하는군.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모르는가?”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밑밥을 까는 팽만철을 당우혁이 노려봤다.
검은 속내가 너무 뻔히 보여서였다.
하지만 당우혁의 매서운 눈빛에도 팽만철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삶에서 경쟁은 필수이니까.”
“둘만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밀 패가 없기에 구경꾼처럼 한발 물러나 있던 남궁호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강렬한 두 쌍의 시선이 남궁호에게 집중되었다.
“그게 무슨 일이지?”
“무슨 말이긴. 경쟁자가 둘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우리가 하는 생각을 다른 이들이라고 못 할 리가 없지 않나? 우리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도 있는데.”
“으음!”
팽만철이 침음을 흘렸다.
누굴 말하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 정도 눈치와 머리는 있기에 팽만철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크흠!”
그리고 그건 당우혁도 마찬가지였다.
남궁호의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그의 뇌리로 똑똑한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 사람이 떠올랐다.
심지어 그 역시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아들이 있었다.
“두 사람 다 떠올린 모양이로군.”
“역사적으로 사마세가와 제갈세가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지. 더욱이 그때는 세력이 비슷했기에 경쟁하는 사이였고.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제갈세가주는 현명한 사람이기도 하고. 가문에 이익이 되는 걸 포기할 사람이 아니지.”
“그건 부정할 수가 없군.”
당우혁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가 아는 제갈문곡이라면 충분히 사마의성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 정도의 포용력은 있는 사내였으니까.
더욱이 제갈세가를 더욱 발전시킬 수도 있는 만큼 어쩌면 여기 있는 그나 팽만철보다 사마의성을 훨씬 더 원할 수도 있었다.
“근데 이건 자네들의 입장이고 사마의성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 우리가 떠올린 걸 그 아이가 생각해 내지 못할 리 없으니까.”
“똑똑한 녀석이니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있기는 하겠지.”
“든든한 뒷배도 있으니 두려울 것도 없을 테고.”
당우혁과 팽만철이 동시에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이 갖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가질 수 없음을 잘 알아서였다.
반호진이 뒤에 있는 한 강압적인 방법은 아예 쓸 수가 없었다.
“근데 성에 차겠어? 무상문주가 늘 가까이에 있는데. 그리고 사마세가를 집어삼키려는 걸 그 아이도 뻔히 알 텐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도 보지 않는 게 좋은데 말이지.”
“내가 자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군.”
못마땅한 눈으로 남궁호를 쳐다보던 팽만철이 고개를 휙 놀렸다.
잡아먹을 듯이 당우혁을 쳐다봤던 것이다.
“사마의성에 대한 건 두 사람이 나중에 따로 얘기하고, 본론으로 넘어오자고. 이렇게 모인 목적이 사마의성과 사마세가는 아니지 않나.”
“우리 모두 솔직하게 속마음을 까 보자고. 포기할 사람?”
남궁호의 말에 동의하듯 팽만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팽만철이 콧김을 내뿜었다.
두 사람의 속내가 훤히 보여서였다.
“계륵이란 말이 떠오르는군.”
“계륵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먹음직스러운 것 같은데.”
당우혁이 피식 웃었다.
그로서는 남궁호의 발언에 동의할 수 없어서였다.
“진짜 계륵이라고 생각한다면 양보해 주지 그러나?”
“그럴 수는 없지.”
“결국 다시 원점인 건가.”
팽만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마의성에 대한 해결책은 나온 듯싶었으나 반호진에 대해서는 여전히 제자리인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둘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끝난 게 아니니 쉽사리 포기가 안 될 터였다.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 볼 수밖에.”
“먼저 지쳐 떨어지면 거기서 끝이고.”
“그렇지.”
당우혁의 말에 남궁호와 팽만철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절대 먼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봤다.
***
급하게 준비했을 텐데도 혼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부족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더구나 많은 이들이 하객으로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기에 더욱 풍성해 보였다.
“얼굴은 나쁘지 않네요.”
“그렇게 하소연을 한 것치고는 말이지.”
“이해해야지.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텐데.”
찬찬히 표정을 살피는 서조운과 달리 모용척은 코웃음을 쳤다.
앞뒤가 다르게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모용척과 달리 정이륭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남자로서 선우방의 감정기복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다른 삶이라.”
“넌 방이 형과 다를 거 같아?”
“비슷하긴 하겠지만 똑같지는 않을 거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섣부른 장담은 좋지 않아.”
정이륭이 검지를 들어 휘휘 저었다.
지금은 이렇게 호언장담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뭐, 그렇긴 하지. 나도 방이 형이랑 비슷한 입장이니까.”
“똑같이 하소연해도 들어는 줄게.”
“형님.”
모용척이 울상을 지었다.
왠지 반호진이 말하는 게 자신 역시도 선우방과 비슷할 거라고 확신하는 듯해서였다.
그 말에 서조운과 사마의성이 킥킥 웃었다.
“내가 보기에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거든.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될 것 같다고나 할까.”
“저는 제가 원하는 여인과 혼인을 할 겁니다!”
“그건 모르는 거지. 모용가주님께서 결정하시는 거니까. 그래도 나름 잘 어울리기는 하네.”
반호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주 보며 미소 짓는 선우방과 팽수영이 의외로 잘 어울려서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제가 보기에는 좀 씁쓸해요.”
“왜?”
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