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장. 경사다, 경사. -02
“솔직히 말하면 피곤해. 근데 어쩔 수 없지. 새신랑의 숙명이나 마찬가지니까. 또 먼 길을 오셨는데 내가 직접 마중을 나가는 게 맞고.”
“수련할 때 사용하는 체력과 손님 맞이하는 데 사용하는 체력은 완전히 다르니까.”
“맞아. 아주 죽겠어.”
웬만해서는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선우방이 한숨을 푹푹 쉬며 말하자 원탁에 앉아 있던 일행들이 키득거렸다.
저렇게 앓는 소리를 해도 안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아서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되긴. 뻔한 거지. 그냥 하는 거야. 별다른 이유 없어. 명문세가끼리의 정략결혼인 거지.”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서조운과 달리 모용척은 심드렁했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어서였다.
“맞아. 흔하디흔한 정략결혼이지.”
“어쩔 수 없는 건가?”
“어쩔 수 없다기보다는 익숙한 일이라고 봐야겠지? 그렇다고 강제로 혼인하는 건 아냐. 나도 나름 소가주이기에 거부할 자격은 있어. 아버지께서 강요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긴 한데, 이번 혼인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너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는 뜻인가?”
반호진이 눈을 빛냈다.
지금의 발언에서 선우방도 새신부를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호감은 예전부터 있었지. 사실 본가가 시기적으로 아주 중요하기도 하고.”
“상관세가의 빈자리 말이군.”
“맞아.”
오대세가에는 속하지 못했으나 십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명문세가가 상관세가였다.
그런 상관세가가 배신함으로써 십대세가의 한 자리가 비게 되었고, 공석이 된 그 자리에 현재 가장 가까운 가문이 바로 선우세가였다.
“다 계산된 것이라는 뜻이네?”
“그렇지. 본가가 십대세가가 되는 데 있어 하북팽가는 분명히 큰 도움이 되니까. 미래와 감정으로 모두 보고 결정한 일이라고 보면 돼.”
“결국 애가 생긴 건 아니라는 뜻이네요.”
반호진과 선우방의 대화에 서조운이 끼어들었다.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심 사고를 치길 바랐는데 그게 아니자 다들 입맛을 다셨다.
“……날 뭘로 보는 거야?”
“남자요.”
“사내대장부죠. 근데 반쪽짜리인 것 같습니다. 자고로 사내라면 당연히 으쌰으쌰 해야죠.”
선우방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서조운과 모용척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나마 정이륭은 부끄러움을 아는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의성이 앞에 두고 무슨 말이야.”
“아.”
“이건 실수. 미안.”
잠시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서조운과 모용척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 사마의성이 여동생이라는 게 확실하게 각인되지 않았기에 나온 실수였다.
그러나 미안해하는 두 사람에게 사마의성은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남녀 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니까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요.”
“그래도 실수는 실수지. 앞으로는 조심하마.”
이럴 때는 또 칼 같은 모용척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말은 괜찮다고 해도 속마음은 다를 수도 있어서였다.
명백하게 그와 서조운의 실수이기도 했고.
“나도 조심할게.”
“정말 괜찮다니까. 음담패설도 아니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러면 내가 더 불편해.”
사마의성이 정말 괜찮다는 듯이 서조운을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서조운은 미안한 기색을 좀처럼 털어 내지 못했다.
“애들이랑 부총관도 전부 다 데리고 왔다며?”
“응.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네가 혼인하는데 다 함께 축하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나야 좋지. 좋은 날에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래서 난 소저에게도 초대장을 보냈어. 못 올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연락은 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
“잘했네.”
반호진은 물론이고 일행들도 살짝 놀랐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지만 하오문의 소문주인 난희주에게도 초대장을 보낼 줄은 몰라서였다.
“따로 연락받은 건 없지?”
“희주에게서?”
“응.”
“없어. 이동 중이라 못 받은 걸 수도 있고. 선우세가에 도착했으니 만나든지 아니면 연락이 오든지 하겠지. 그나저나 하객들이 예상보다 많은데?”
“대부분은 하북팽가 쪽 하객이야. 아무래도 강호에서의 영향력은 본가보다 하북팽가가 훨씬 더 크니까.”
어찌 보면 민감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선우방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굳이 객관적으로 생각할 것 없이 이게 사실이었기에 선우방은 순순히 인정했다.
“숫자는 적을지 몰라도 무게감에서는 밀리지 않을 거야.”
“맞습니다. 천하십대고수가 무려 세 명이나 참석했으니까요.”
서조운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규모에서는 밀릴지 몰라도 질은 절대 하북팽가에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참 든든해. 진심으로. 갑작스러운 결혼인데도 모두 와 주어서 고맙기도 하고.”
“당연히 와야지. 다른 일도 아니고 혼인하는데. 너는 만약 내가 결혼하면 안 오려고 했어?”
“무조건 가야지. 친구가 결혼한다는데.”
“우리도 똑같은 거야.”
의리 이상의 유대감으로 묶인 게 여기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선우방은 든든하면서 기뻤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술 한잔하자. 어쩌면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술자리일 수도 있으니까.”
“술이 마시고 싶은 모양이구만?”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복잡하더라고. 생각도 많아지고. 게다가 물릴 수도 없으니까.”
“총각으로서 마시는 마지막 술이라. 어떤 느낌인지는 전혀 짐작이 안 가지만 현재 심정이 복잡할 것 같기는 해.”
철저한 자기 관리를 보여 주며 술을 거의 마시지 않던 선우방이 먼저 마시자고 말을 꺼내자 다들 살짝 놀랐다.
그러나 반호진을 비롯해서 모두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우방의 현재 상황을 감안하면 술을 마시자고 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팽 소저는 안 부를 거죠?”
“큰일 날 소리는 하는 거 아냐.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런 자리에서까지 같이 있을 필요는 없지.”
“너무 정색하는 거 아니에요?”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는 선우방의 얼굴을 보며 사마의성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싫어하는 것 같아서였다.
“우리끼리 편하게 마시고 싶어서 그렇지. 다른 사람 빼고.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이런 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나는 더 이상 홀몸이 아닐 테고.”
“그래. 마시자.”
“주안상을 준비하라고 할게. 먹고 싶은 안주가 있으면 지금 말해. 아마 웬만한 건 다 만들 수 있을 거야.”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 중이었기에 웬만한 식재료는 모두 갖춰진 상태였다.
그래서 선우방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난 딱히 없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먹으면 되지.”
“인원에 맞게 적당히 구색을 맞추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희들 중에 많이 먹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량으로 다양하게 만들면 되겠다. 낭비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반호진과 서조운의 의견에 선우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상 거하게 진수성찬을 차려도 되지만 선우방은 그러지 않았다.
굳이 낭비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좀 넉넉히 해서 아이들에게도 주죠. 이왕이면 남경만의 특색 있는 요리로요.”
“그거 좋네.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겠어. 생각 못 했는데 말해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여기 있는 일행들도 소중하지만 인연을 맺은 아이들과 부총관 등등도 결코 가볍지 않은 관계였다.
그렇기에 선우방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마의성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도 생각 못 했는데.”
“오빠도 정신없었잖아요. 선우세가주님이 직접 마중을 나오시기도 했고. 또 많은 이들에게 시달리기도 하셨으니 깜빡하실 수밖에요.”
“그래도 내 식구들인데 내가 챙겨야지. 앞으로는 신경을 더 써야겠어.”
“제가 더욱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형님!”
서조운이 자책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누가 뭐래도 반호진의 오른팔은 자신인데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미 충분히 잘해 주고 있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놓친 것 자체가 제 실수입니다.”
“너는 열심히 무공수련하면 돼. 유화나 쌍둥이 형제들을 잘 가르치고. 서가장주님은 언제 오신대?”
대화가 이런 쪽으로 가면 항상 피곤해졌기에 반호진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서조운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화제로 말이다.
“내일 낮이나 오후 늦게쯤 도착할 것 같아요.”
“형님들도 오시나?”
“예. 큰형이랑 작은형 모두 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오랜만에 삼형제가 모두 모이겠네.”
“딱히 좋은 일은 아니지만요.”
서조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나면야 반갑기야 하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형제들 특유의 무뚝뚝함으로 인해 인사만 하고 끝날 게 분명했다.
“가족은 볼 수 있으면 보는 게 좋지.”
“형님도 새해에는 본가에 가셔야지요.”
“그래야지. 급한 일은 다 끝났으니까.”
모두의 예상보다 천사맹, 마도련과의 전쟁이 빨리 끝났다.
그렇기에 반호진도 여유가 있었다.
끼이익.
일행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갓 만든 음식과 술이 원탁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우방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이 쏟아져 나왔다.
***
탁.
찻잔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작은 소리마저 크게 느껴질 정도로 실내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마주 앉은 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경사를 앞두고 표정이 왜 그러나? 좋은 날인데 웃어야지.”
“좋은 날인 건 맞지만 마음이 답답해서 말이야. 근데 그건 두 사람 다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난 아니네만?”
당우혁이 씨익 웃었다.
자신은 팽만철이나 남궁호와 다르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우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긴. 같이 똥줄 타는 입장인데.”
“전혀. 오히려 앞서 있다면 또 모를까.”
“사천당가가 우리들보다 앞서 있다고?”
“물론이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로군.”
팽만철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서린이가 가장 앞서 있지. 자고로 여자는 외모가 다야. 괜히 남자가 미녀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니지. 이건 역사가 증명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굳이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그 믿음을 가지고 계속 도전하면 될 테니까.”
“그럴 수는 없지. 경쟁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허참.”
당당하게 염탐을 하겠다는 당우혁의 말에 팽만철이 헛웃음을 흘렸다.
남궁호 역시 마찬가지인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당우혁을 쳐다봤다.
“그리고 꼭 우리가 경쟁자인 건 아니니까. 안 그런가?”
“나는 경쟁자이고 싶은데. 이왕이면 독점이 좋으니까.”
“그렇지.”
은근히 여지를 두는 당우혁의 말에 팽만철과 남궁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방법도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독점할 수 있는 걸 나눌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말한 이가 데릴사위를 선호하는 사천당가의 가주였기에 더더욱 믿기 힘들었다.
“협상 결렬인가.”
“애초에 협상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이런. 들켰군.”
“기 싸움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다들 그 아이 때문에 똥줄이 타서 이렇게 달려온 거 아닌가.”
남궁호와 당우혁의 눈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똥줄이라는 단어가 거슬려서였다.
품위와는 담을 쌓은 듯한 단어 선정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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