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장. 좋은 소식. -03
“알겠습니다.”
“바쁘면 다음에 시간을 만들어도 되고. 알겠지만 이제 좀 여유가 있어서 말이지.”
“진짜 괜찮습니다.”
황매향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급한 용무가 있어도 반호진과의 시간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또 반호진의 말마따나 이런 자리는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그녀는 조용히 뒤따랐다.
또르륵.
“운기조식은 꾸준히 하는 모양이네?”
“네. 문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니까요. 또 호신 때문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익히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따라 주는 차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며 대답하는 황매향을 보며 반호진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꼭 고수가 되기 위해서 무공을 익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다들 알고 있거든요.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요. 그래서 모두 문주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불만은 없대?”
“전혀 없어요. 있어서도 안 되고요.”
황매향의 표정이 일변했다.
마치 그런 이가 있다면 자신이 먼저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일순 냉기를 풀풀 날리는 표정에 반호진이 웃었다.
“얼굴 좀 풀어. 민감한 문제도 아닌데 왜 그래.”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표정을 보니 다행히 불만을 가진 아이들은 없는 모양이네.”
“네. 제가 알기로 단 한 명도 없어요.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어디에서도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없거든요. 오히려 다들 쫓겨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요.”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쫓아낼 생각은 없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반호진이 말했다.
정말 큰 사고나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면 반호진은 자신이 먼저 사람을 자를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앞날을 생각하면 식구는 계속해서 늘 터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편하게 해 주면 기강이 해이해지니까요.”
“당연하지. 건성건성 하는 이들을 봐줄 생각은 없어. 그래서 부총관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지금처럼 앞으로도 잘해 주었으면 해.”
“네.”
반호진의 칭찬에 황매향이 환하게 웃었다.
칭찬에 인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뿌듯한 보람을 느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들과 여인들은 어때? 부총관의 입장에서. 여자아이들은 의술을 배우는 쪽으로 많이 선택했던데.”
“의녀가 되면 먹고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어서 우 의원에게 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 역시 의원이나 의녀가 많아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고요. 아이들은 춘이와 다른 애들을 보면서 자신들도 무상문도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에요. 오히려 의욕이 과하게 높다고나 할까요.”
“독립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거야?”
반호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쩌다 보니 거두게 되었으나 앞으로도 계속 데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적당한 시기가 되거나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떠나보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기본공이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운기토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고.
“어른이 된다고 세상의 냉혹함이 사라지진 않는다는 걸 아이들도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렇기는 하지.”
반호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세상의 냉혹함은 결코 나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공평하게 차가웠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떠나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가 본문 소속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문주님께서 허락하셔야겠지만요.”
“사고뭉치들이 있을 텐데?”
“아직까지는 큰 사고를 치지 않았어요. 사소한 다툼은 몇 번 있었는데 원래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잖아요.”
“맞아. 싸우면서 정이 들기도 하고.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말이네?”
“네.”
황매향의 보고 아닌 보고를 들으며 반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 운영된 것 같아서였다.
동시에 처음에는 진짜 동생들하고만 시작했던 무상문이 점점 커져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장원에서 머무는 인원만 오십 명이 훌쩍 넘었다.
‘진짜 많이 늘었네.’
눈을 감았다가 뜨면 훌쩍 자란다는 아이처럼 무상문도 마찬가지였다.
반호진이 모르는 사이에 규모가 훌쩍 커져 있었다.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부담도 되었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새삼 느껴져서였다.
‘근데 나쁘지 않아.’
지난 생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부담감이었으나 반호진은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긍정적인 자극이 되었다.
또 무공뿐만 아니라 문파와 사람을 키우는 재미도 알게 되었기에 반호진은 기대가 되었다.
내년, 내후년이 아니라 십 년 후, 이십 년 후가 말이다.
“물론 그 전에 부총관도 행복해야겠지만.”
“네?”
뜬금없는 말에 황매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나와 본문을 위해 애써 주는 것도 좋지만 부총관의 행복도 챙겼으면 좋겠다고. 너무 이기적인 건 안 되지만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
“아.”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고. 다만 고민은 해 보라고 하는 말이야.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난 생각하거든. 삶 자체가 고뇌의 연속이기도 하고.”
“명심할게요.”
어떤 마음으로 반호진이 이런 말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황매향은 눈을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반호진 역시 이 이상 더 말하지 않았고.
“허어. 하루가 짧다, 짧아. 장원 한 바퀴 돈 것뿐인데 벌써 정오가 다 되어 가다니.”
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면 간식 안 줬다고 삐친 건 아니지?”
헥헥헥!
황매향과의 담소를 마무리 짓고 다시 밖으로 나온 반호진이 뒷짐을 지고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곁에는 여전히 일동이가 있었다.
오늘 하루는 자신이 반호진의 호위무사라는 듯이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안 줄 생각은 없었다. 단지 깜빡했을 뿐이지.”
휘익! 딱!
반호진의 손이 품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순간 검갈색의 무언가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일동이 역시 몸을 날렸다.
반호진이 던진 게 무엇인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반응한 것이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육포를 일동이가 예술적인 움직임으로 낚아챘다.
“내가 개 간식을 가지고 다닐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야무지게 육포를 잘근잘근 씹어 먹는 일동이의 모습에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불과 이 년 전만 하더라도 반호진은 개를 키운다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키울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지금은 삼형제와 함께하는 게 익숙해졌다.
“차합!”
“이번에는 안 져!”
일동이가 육포를 뜯어 먹는 걸 잠시 지켜보던 반호진이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였다.
일동이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육포를 문 채로 귀를 쫑긋거리며 머리를 돌렸다.
“흐음.”
반호진의 발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들려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그리고 반쯤 남은 육포를 입에 문 일동이가 나란히 걸었다.
따다다당!
외부에서의 시선을 차단하고자 높게 쌓은 벽을 지나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자 살 떨릴 정도로 치열하게 대련을 하고 있는 네 명이 눈에 들어왔다.
서조운과 예유화, 쌍둥이 형제가 대련을 하고 있었는데 단 넷뿐인데도 열기가 후끈했다.
네 사람 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여 주는 모습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련임에도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어서였다.
언뜻 보기에는 당연하고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고 편하기에 긴장이 풀어지기 쉬웠다.
스윽.
이제는 장원에서 지낸 시간이 제법 되어서 그런지 일동이는 얌전히 반호진의 옆에 앉았다.
작은 소리도 네 명에게 방해가 된다는 걸 알았기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좋아하는 육포도 씹지 않고 땅에 내려놓았다.
“녀석.”
본능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았기에 반호진은 일동이가 대견했다.
더구나 따로 지시를 내린 것도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내심 놀라웠다.
그래서 부드럽게 일동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연검이라.”
일동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반호진은 예유화를 응시했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휘두르는 연검을.
백휘경, 백휘성 형제가 동경하는 서조운을 따라 검을 든 것과 달리 예유화는 연검을 선택했다.
재능이 넘쳐 나는 서조운조차 잘 모르는 병기인 연검을 말이다.
휘리리릭!
그렇다고 장원 내에 연검을 잘 다루는 무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예유화가 연검을 선택했을 때 우려를 표했었는데 지금 보니 괜한 우려였던 것 같았다.
독학했을 텐데도 예유화의 검술은 상당히 뛰어났다.
사부가 없기에 감각적인 부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역시 재능이란.”
서조운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명백했다.
그런데도 저 정도 수준까지 올랐다는 건 예유화가 가진 재능 덕분이었다.
게다가 무공과의 궁합도 상당히 좋았다.
그 말인즉슨 안목도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저 녀석들은 여전하네.”
이성적으로 대련에 임하는 서조운, 예유화와 달리 쌍둥이 형제는 격렬했다.
지나치게 과열된 비무에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실력은 빠르게 늘고 있어요. 유화가 너무 특출나서 상대적으로 느려 보이는 거지 휘경이와 휘성이의 성취도 엄청나게 빠른 거예요.”
“비교 대상이 가까이에 있으니까. 그래서 문제이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이 재미와 성취감보다는 좌절감과 자격지심을 먼저 배우니까.”
사마의성이 슬그머니 다가왔음에도 반호진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기척을 숨기지도 않았고.
“저도 그 부분이 걱정이었는데, 직접 살펴보니까 괜한 걱정이었어요.”
“그래?”
“네. 오빠 말대로 좌절감과 자격지심을 느끼긴 해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순수하게 인정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오히려 좌절감이나 자격지심을 느끼지 못하면 그게 더 문제이지 아닐까요?”
“그것도 그렇지.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야 발전도 있으니까. 안 그래도 이따가 살펴보려고 했는데 잘됐네.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아이들이 강하더라고요. 오빠 때문인지.”
사마의성이 일부러 오빠라는 두 글자에 힘을 주었다.
형님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었기에 그걸 떨쳐 내기 위해서였다.
“근데 일흑이는 없네?”
“나름 바쁜 몸인 것 같아요.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가. 낮잠도 안 자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더라고요.”
“모든 동물들이 그렇지만 고양이에게도 자기 영역은 중요하니까.”
“그나저나 잘 어울리죠?”
사마의성의 시선이 한 쌍의 남녀에게로 향했다.
그래서인지 반호진은 그녀가 정확히 지칭하지 않았음에도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둘 다 선남선녀이니까.”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고요. 장담컨대 유화는 일 년만 지나면 지금보다 더 예뻐질 거예요. 삼봉에 버금갈 정도로요.”
“그럴 것 같기는 해. 조운이도 점점 남자다움이 나타나고 있고.”
반호진은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애와 같았던 서조운은 이제 어엿한 한 명의 후기지수이자 청년이 되었다.
예전 모습을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아직 애죠. 성숙한 척하는. 남자는 아니에요.”
다정한 눈빛으로 예유화를 바라보며 칭찬하던 것과 달리 사마의성은 지극히 냉정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예외는 절대 없다는 듯이 단호한 목소리에 반호진은 실소를 흘렸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역시 형님, 아니 오빠세요.”
“이 시간에 네가 밖에 나와 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맞아요. 놀랍고도 충격적인 소식이 왔어요. 그것도 공식서한으로요. 방이 오빠가 혼인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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