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장. 좋은 소식. -02
상일기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크게 놀란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가타부타 말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륭이의 삶도 있듯이 문주님의 삶도 있지 않습니까. 아직 정정하시기도 하고요. 이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사부님께도 여쭈어보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상일기가 황급히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담현에게 묻지 않아도 반호진의 마음은 과할 정도로 그에게 전달이 되었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문주님.”
“괜찮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은 누구나 말할 수 있으니까요. 저를 위해서 고민 끝에 꺼낸 말이라는 것도 알고요. 다만 당혹스럽네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괜히 늦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가둬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늦었다고 판단하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말이죠.”
“그렇지요.”
상일기의 두 눈이 멍해졌다.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듯했다.
“근데 고민하시는 걸 보니 호감이 있으신 분이 계신 모양이네요?”
“아, 아닙니다.”
상일기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으나 반호진은 눈치챘다.
미세하게 상일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반호진은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대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그렇게 말해도 다 안다는 듯이.
“흠흠! 이륭이의 혼인과 함께 반 대협께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혹 이륭이가 둘째를 낳는다면 무상문도로 받아 주실 수 있으신지요?”
“이륭이와 둘째 아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상일기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 맺혔다.
그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반호진이 해 주어서였다.
내심 바람은 제자로 받아 주었으면 했지만 그게 욕심이라는 것을 상일기는 잘 알았다.
“감사합니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요. 이륭이의 자식이면 제 조카이지 않습니까. 다만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는데 너무 앞서가신 것 같습니다.”
“허허허허.”
상일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어서였다.
동시에 그의 바람이기도 했다.
정이륭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말이다.
“이 마음을 이륭이도 알아야 할 텐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산에서 저와 함께 자라서 그런지 완전 쑥맥인 녀석이라.”
상일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재는 뛰어났지만 대신 다른 부분이 부족했다.
특히 여자에 대해서는 무지했기에 그는 걱정이 많았다.
그나마 반호진과 함께하면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으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나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나름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있기도 하고요. 참고로 전 아닙니다.”
반호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상일기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
“좋구나. 아주 잘 말렸어.”
“감사합니다, 사부님!”
“허허허!”
이제는 제법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우송덕은 사부님이라는 세 글자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평생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말이었기에 그에게는 그 어떤 말보다 달콤했다.
그러나 우송덕은 그러한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봄에 심을 약초들을 정리했습니다.”
“처음이니 너무 완벽하게 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리 계획을 완벽하게 짜 놓아도 변수는 발생하니까. 오히려 갖은 시행착오를 겪을 거라 예상하고 준비하는 게 더 나을 게야.”
“알겠습니다.”
아직은 어린 제자들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보며 우송덕은 인자하게 웃었다.
의술에 이제 막 입문한 상태였기에 가르칠 것이 한가득이었으나 그는 이조차도 기뻤다.
“이제는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야.”
“문주님!”
“잠시 시간 괜찮아?”
“없어도 만들어야지요.”
갑자기 나타난 반호진에 우송덕은 물론이고 소년, 소녀들도 깜짝 놀랐다.
예고 없는 방문에 모두 당황한 것이었다.
“굳이 만들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가 들른 거라.”
“정말 괜찮습니다. 아이들이 각자 공부할 것들이 많기도 하고요.”
“그럼 잠시 들어가자고.”
“예. 모시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으나 우송덕은 전혀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반호진이 직접 행차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최근까지 전쟁으로 바깥에 나가 있었다고 하나 그래도 너무 무신경한 것 같았기에 내심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반호진이 찾아와 주자 우송덕은 기뻤다.
“안녕하세요!”
“처,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나도 반갑구나. 그런데 대화는 우 의원과 먼저 나눈 후에 나누자꾸나.”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으나 처음 보는 아이도 있었다.
게다가 의외로 성비는 소녀들이 더 많아 놀랐지만 반호진은 그러한 티를 절대 내지 않았다.
아이고 어른이고 사소한 것에 상처받는 건 똑같았기에 반호진은 이 부분에 특히 조심했다.
그래서 일부러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하고는 우송덕을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약향이 은근하게 나는 게 의방 같네.”
“감사합니다.”
반호진을 상석으로 안내한 우송덕이 환하게 웃었다.
별거 아닌 말이었음에도 이상하게 칭찬처럼 들려서였다.
때로는 큰 칭찬보다 작은 칭찬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 완전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두 문주님 덕분입니다. 문주님께서 거두어 주신 덕분에 새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아부가 늘었어.”
“소인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우송덕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와 반호진의 관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들이 이 대화를 들었다면 아첨한다고 말하겠지만 모든 걸 안다면 결코 그렇게 말하지는 못할 터였다.
가히 인생을 구제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우송덕은 오히려 이런 말이 약하다고 생각했다.
“새 인생이라. 진짜 그랬으면 좋겠군.”
“적어도 저는 새로운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고요.”
“불편한 건 없고?”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풍족해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원은 충분히 해 주도록 지시를 내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풍족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풍족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래저래 들어가는 돈이 많지 않나? 약초는 물론이고 아이들 가르칠 때 필요한 물건들이랑 의서들도 꽤 많이 구입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맞습니다. 그런데 의서는 고서점에서 싸게 구입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굳이 대량으로 의서를 살 필요가 없기도 하고요. 그때그때 필요하거나 구하기 힘든 것 위주로 소량씩 구매하고 있습니다. 약초는 겨울이라 재배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지만 우선은 봄부터 심을 것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약방에서 사는 게 간편하기는 하나 그래도 직접 키우는 것보다는 못하니까요. 기본적으로 약초에 대해 깊게 알려면 직접 키우는 게 가장 좋기도 하고요.”
“일이 너무 많아지는 건 아닐까? 규모를 차차 늘릴 계획이 있기는 한데 지금 인원으로는 힘들 것 같은데?”
반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히 전문가에게 참견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괜찮습니다. 이것도 작게 시작할 생각이라서요. 소인도 약초에 해박한 건 아니라서 같이 키우고 배워 가야 합니다. 소인 역시 아는 것만 알아서요.”
“그렇다면야.”
무작정 일부터 벌일 생각은 아닌 듯하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내심 의외라는 생각도 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아서였다.
특히나 우송덕의 경우 스승의 위치이기에 제자들에게 스스로의 부족함을 밝히기가 더욱 어려울 텐데도 서슴없이 같이 배울 거라고 하자 반호진은 그 부분이 놀라웠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단번에 성공하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단기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처음부터 성공하는 게 좋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우 의원도 알잖아? 그리고 난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한 거야. 본문에 의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이왕이면 본문에 소속감을 가진 이들이었으면 좋겠고.”
“감사합니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충성심을 가지도록 따로 교육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고. 나는 사람을 원하는 거지 노예를 원하는 게 아냐.”
우송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래서인지 우송덕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건 우 의원도 마찬가지고. 지금은 아무런 직책도 없지만 규모가 좀 더 커지면 달라질 거야. 이건 내가 약속할 수 있어.”
“지금만으로도 소인은 충분합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정도로요.”
“벌써부터 그러면 쓰나. 사람이 꿈을 크게 가져야지. 이룰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사람은 꿈과 목표가 있어야 해. 그래야 살맛이 나지 않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이미 꿈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우송덕은 수긍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하나의 꿈을 이루었으니 또 다른 꿈을 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더불어 그 꿈이 반호진에게 도움이 된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라도 편하게 찾아와서 말해. 내가 부담스러우면 부총관이나 의성이를 찾아가도 되고.”
“부총관님께 찾아가겠습니다.”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사마의성이 반호진의 동생이라고 하나 엄연히 그녀는 외부인이었다.
그렇기에 우송덕은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가 가끔씩 찾아오는 게 더 편하겠지? 우 의원이나 공부하는 아이들이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와 주시면 다들 기뻐할 것입니다. 아까 아이들의 표정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오히려 무심하면 더 걱정할 겁니다.”
“적당한 관심과 방임이 가장 좋기는 하지. 어쨌든 오늘 왔으니 아이들하고 대화는 나누다가 갈 거야. 나이가 어려도 본문의 식구니까.”
우송덕이 헤벌쭉 웃었다.
식구라는 말이 너무나 정겹게 다가와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우송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어, 여자아이들이 비율이 절반 가까이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상관없어. 적어도 본문에는 여자라고 해서 차별하는 일은 없을 거야. 당장 부총관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난 첫 번째가 신뢰고 두 번째가 능력이야. 인성도 중요하고. 그 외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 우송덕이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송덕과 아이들을 격려해 준 반호진은 황매향을 찾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황매향과도 면담을 가질 생각이었다.
시기적으로 적당하기도 했고.
또 엄연히 무상문의 부총관이었기에 자격은 충분했다.
“문주님?”
“잠깐 시간 돼?”
“네.”
조신한 걸음걸이로 장원을 가로지르던 황매향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반호진의 기척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신색을 가다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 오랜만에 담소 좀 나누자고. 부총관과 따로 대화를 나눈 지 오래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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