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장. 가장 바라는 것. -04
담담한 사마의성의 목소리에 반호진의 동공이 서서히 확대되었다.
오직 그만이 유일하게 사마의성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서였다.
반면에 아무것도 모르는 네 사람은 말없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말하려고?”
“네. 이제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저 스스로 죄책감도 들고.”
“죄책감이라.”
“어찌 됐든지 간에 숨긴 건 사실이니까요.”
“못 알아챈 게 아닐까?”
반호진의 반문에 사마의성이 옅게 웃었다.
일부러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고자 반호진이 이렇게 말하는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런데 진짜 괜찮았다.
솔직하게 네 사람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그건 그것 나름대로 기분 좋네요. 제가 정말 잘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듣고 보니 그것도 맞기는 하네. 반대로 넷 다 무심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무심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관심이 크게 없는 건 사실이지만요.”
“……무슨 말이에요?”
서조운이 반호진과 사마의성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그건 옆에 앉아 있던 선우방과 정이륭, 모용척도 마찬가지였다.
넷 다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계속 움직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말할 수 없어. 의성이가 직접 말해야지.”
“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에 서조운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 들으면 들을수록 알쏭달쏭해서였다.
그래서 서조운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친구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지금 말하려고 했어. 그 전에…….”
서조운을 시작으로 선우방과 모용척, 정이륭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사마의성은 두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두건과 함께 긴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음?”
“어어?!”
이마를 감싸고 있는 두건을 풀 때까지만 하더라도 네 사람 다 그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한데 머리끈을 풀자 모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래부터 선이 가는 미남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처럼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자 묘하게 여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사마의성은 늘 펑퍼짐하게 입었던 무복을 살짝 조였다.
“……뭐야?”
웬만해서는 감정 기복이 없는 정이륭조차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이, 그리고 보여 주는 행동이 오직 한 가지만을 설명하고 있어서였다.
그래서인지 동갑내기인 서조운은 아예 입을 쩍 벌린 채로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의성이 네가…….”
얼마나 놀랐는지 선우방이 말을 더듬었다.
그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허! 정말이야? 진짜야?”
모용척의 반응도 다른 이들과 대동소이했다.
그저 자신 못지않게 잘생겼다고만 생각했지 여자일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상상하지 않았었기에 모용척은 헛웃음을 흘렸다.
“네. 보시는 대로요.”
“남자치고 너무 미성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변성기가 약하게 오는 사람도 있어요.”
“알지. 그래서 의심을 안 했던 거고.”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모용척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에게 있어 사마의성이 여자라는 사실은 결코 좋지 않아서였다.
가뜩이나 경쟁자가 많은데 사마의성까지 늘어나자 모용척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믿기지가 않네.”
“속여서 미안해. 근데 변명을 하자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알지. 지금은 밝혀도 되니까 밝힌 거 아냐.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다고 판단한 거니까.”
“맞아.”
“근데 충격적이기는 하다. 어쩐지 목욕할 때도 따로 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서조운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사마의성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더불어 가끔씩 이해가 되지 않았던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목욕은 원래부터 혼자 하는 걸 좋아했어.”
“뭐, 그거야 성격이니까. 조금 예민한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그럼 이름도 본명이 따로 있는 거야?”
“이름은 내 이름이야. 가명을 쓸 생각은 없었어. 부모님이 직접 지어 주신 이름이니까. 또 중성적이기도 하고.”
“여자 이름 같지는 않지만.”
“남자인데도 여자 이름처럼 느껴지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잖아.”
서조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표정이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너는 알고 있었다며?”
휘익!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분위기가 다시 한번 달아올랐다.
선우방의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반호진에게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맞아. 나는 알고 있었지.”
“어떻게? 아니, 의성이가 말해 준 거야?”
“그건 아니고.”
“네가 먼저 눈치챘다고?”
선우방은 물론이고 동생들 전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리고 솔직히 사마의성도 의문이기는 했다.
반호진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는 게 말이다.
“이건 저도 궁금했어요. 들키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거든요.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이 먼저 알아차리실 줄은.”
“아직도 형님이냐?”
“어, 입에 붙었나 봐요. 오……빠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부르르르!
사마의성의 입에서 오빠라는 말이 나오자 서조운이 간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떨었다.
왠지 모르게 남자가 오빠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근데 그건 선우방과 모용척, 정이륭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셋 다 서조운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낯설긴 하네.”
“차차 수정해 나갈게요. 저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너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고.”
반호진의 시선이 선우방과 정이륭, 모용척, 서조운에게로 향했다.
그가 보기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은 네 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겠네요.”
“근데 괜찮겠어? 아무리 네가 적통이라고 하나 여인이기에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들이 생길 수 있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거고.”
“여인의 몸으로 황제가 된 이도 있는데 일가의 가주가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 처음 꿈을 품었을 때부터 난관들이 수없이 많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있어요.”
“그렇다면야.”
“형님께서도 도와주실 거잖아요.”
사마의성의 맑은 두 눈이 반호진에게로 향했다.
두건과 머리끈을 풀어서 그런지 더욱 크게 느껴지는 두 눈을 마주하며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생이 도와 달라는데 도와줘야지. 그게 형이니까.”
“오빠라는 말이 잘 안 나오시는 모양이네요?”
“쉽지 않아. 너도 그렇지만 나도 입에 익었으니까. 뭐, 차차 나아지겠지.”
“우선은 저 혼자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생각이에요. 그래야 진짜 가주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넌 잘할 거야.”
사마의성이 빙긋 웃었다.
별거 아닌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녀가 느끼기에는 달랐다.
정말 큰 응원으로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편하게 말하고.”
“나도 있다?”
“선우세가도 있고.”
“모용세가도 있지.”
사마의성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처음에는 다들 놀라서 당황해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을 동생으로, 친구로 여겨 준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물론 갑자기 뒤바뀐 성별에 반호진을 제외한 모두가 얼떨떨하다 못해 어색해했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마음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모두, 모두 고마워요.”
“나를 뭘로 본 거야. 나는 성별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사람이 아냐. 단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라 당황해서 그런 거지.”
“동생은 동생일 뿐이지. 다만 동생이라는 두 글자에 여라는 한 글자가 더 붙은 것뿐.”
“친구는 친구지.”
모용척, 선우방, 서조운의 말에 사마의성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 행세를 할 때는 감정도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안 그래도 되었기에 사마의성은 지금의 감동을 마음껏 표현했다.
“방이 형 말대로야. 나에게 있어 의성이 너는 언제나 동생이야.”
“고마워요, 이륭 오빠.”
“물론 나도 적응은 안 된다만. 그래도 빨리 적응해야겠지.”
정이륭이 어색하게 웃었다.
놀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자신의 비밀을 솔직하게 말해 주어서 정이륭은 기뻤다.
비밀을 공개한다는 건 그만큼 여기 있는 이들을 믿는다는 뜻이었으니까.
“원하신다면 형이라고 불러 드릴 수 있어요.”
“아니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꿔야지. 애들이 잘못된 호칭을 보고 배우면 안 되니까. 우리야 괜찮다지만 어린애들은 본 것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알았어요.”
약간 고지식하지만 이게 바로 정이륭이라는 사람이었다.
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무상문도들이 본보기로 삼는 인물이기도 했고.
“아, 나도 할 말이 있어.”
“혹시 형도 사실은 여자였다거나?”
“이게!”
선우방이 짐짓 눈을 부라리듯이 서조운을 노려봤다.
얼토당토않는 소리를 해 대서였다.
그런데 서조운의 그 말에 실내가 떠들썩해졌다.
다들 웃음을 터트려서였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끔찍한데.”
“방이 형은 안 어울리지. 의성이야 원래 얼굴선이 가늘어서 보는 순간 납득이 되지만 방이 형은…….”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저도 척이랑 생각이 같습니다.”
반호진에게서 시작된 고개 저음이 모용척과 정이륭에게까지 번졌다.
셋 다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 모습에 선우방이 평소답지 않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호진이 너까지 이러기냐?”
“그만큼 오늘 애들이 받은 충격이 크다는 거지. 이왕이면 안 놀랄 만한 걸로 말해 줘. 나야 괜찮지만 애들은 한도가 초과된 것 같아서.”
“딱히 특별한 건 아냐. 본가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럼 그냥 말하면 되지 왜 그렇게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아?”
“내가 잡았나. 저 녀석이 잡았지.”
선우방이 서조운을 살짝 노려봤다.
이 사태의 원흉은 자신이 아니라 서조운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선우방의 매서운 눈빛에도 서조운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문맥적으로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잖아요.”
“전혀 아니거든. 같이 목욕까지 한 주제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하냐?”
“말이 좀 그러네요. 같이 목욕까지 한 사이라니.”
“하아.”
선우방이 이마를 짚었다.
어째 대화를 하면 할수록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농담은 그쯤하고. 무슨 일이 있어서 가는 건 아니지? 예를 들면 안 좋은 일이라거나.”
“안 좋은 일까지는 아니고. 근데 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라서 일단 본가에 가서 연락할게.”
“그래.”
선우방의 표정이 살짝 이상했으나 반호진은 따로 묻지 않았다.
괜히 개인적인 부분을 파고드는 것일 수도 있어서였다.
분위기가 요상하기는 해도 나쁜 일 같지는 않았기에 반호진은 모른 척 넘어갔다.
***
헥헥헥!
오랜만에 반호진과 함께 아침 산책을 해서 그런지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매일 오고 가던 익숙한 길이지만 주인과 함께하는 산책이었기에 삼형제의 꼬리는 쉴 새 없이 원을 그렸다.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뛰어다니는 세 마리의 모습에 반호진은 뒷짐을 진 채로 실소를 흘렸다.
“좋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안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침 햇살에 서서히 흩어지는 광경을 보며 반호진은 흡족한 듯 웃었다.
지금의 모습이야말로 평화로움의 극치여서였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평온이 오는 풍경에 반호진은 느릿하게 목장을 둘러봤다.
음무우우!
소와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닭과 오리가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광경을 반호진은 멍하니 구경했다.
남들에게는 별거 아닌 풍경일지 모르나 반호진에게는 달랐다.
전생에서는 그렇게나 보고 싶은 광경이었고, 만들고 싶었던 풍경이었다.
때문에 반호진은 하염없이 목장을 바라봤다.
“이제는 진짜 끝났으면 좋겠는데. 이대로 평화롭게 쭉 가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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