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장. 가장 바라는 것. -03
남들은 너무나 갖고 싶어 하는 칭호이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명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아쉬울 건 없었다.
무림에서의 명성이 목숨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은 본인의 실력이었기에 천하십대고수니 무림십왕이니 하는 건 관심 없었다.
“진짜 신기하다니까. 어떻게 이렇게 초연할 수가 있지?”
“애늙은이라는 표현을 너무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
“알고 있었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난희주가 원래부터 큰 눈을 더욱 크게 치떴다.
본인의 별명을 알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좋든 싫든 반응을 보이기 마련인데 반호진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하긴.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오빠이니까.”
“그냥 나란 사람이 이런 거지.”
“앞으로도 오빠가 쭉 이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쉽지 않을걸.”
“왜?”
난희주의 두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것이었다.
당연히 안 변할 거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의 대답이 나오자 난희주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 계절마다 산의 모습이 달라지듯 사람 역시 마찬가지지. 다만 점점 더 좋게 변하느냐, 나쁘게 변하느냐가 중요하지.”
“이런 모습을 보면 확실히 오빠는 불가의 제자가 맞는 것 같아.”
“불문의 무공을 익혔으니까. 어렸을 적에는 불경도 많이 읽고 독송도 했어. 하루에 꼭 읽고 독송해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지. 그때는 그게 참 싫었는데.”
“어릴 때는 좋아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거 아냐?”
난희주는 충분히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 역시도 어렸을 적에는 책이랑 글과 그리 친하지 않았었다.
밖에서 뛰어노는 것에 관심이 많았지.
그리고 지금은 그런 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맞아. 근데 돌이켜 보면 추억이지.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된 거지. 적어도 기억하기 싫은 정도는 아니니까. 내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도 오빠가 그렇게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싫은 기억은 아니지.”
“그럼 귀찮은 기억이려나?”
백동이를 품에 안고서 쓰다듬으며 난희주가 씨익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이다.
“귀찮을 게 어디 있어. 친한 동생이 머문 건데. 집이 좁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네가 불편하면 모를까.”
“난 좋았어. 이렇게 마음 편히 있어 본 적이 드물 정도로. 검신과 명왕이 지켜 줘서 그런지 잠이 잘 오더라고. 평생 머물고 싶을 정도로.”
“가끔 놀러 와.”
“치잇! 빈말이라도 좀 해 주면 덧나나?”
“아예 못 오는 것보다는 낫잖아?”
이번에는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그 미소에 난희주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또 내가 졌네. 나는 언제쯤 오빠를 이겨 보려나.”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마. 뭘 이기려고 들어?”
“오빠는 아냐?”
“당연히 아니지. 난 그냥 솔직하게 내 마음을 말한 것뿐이야.”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기고 지는 건 무공대결만으로 충분했다.
“오빠가 솔직하기는 하지. 그게 매력이기도 하고. 가끔 그래서 인간미가 없기는 하지만. 오빠야 아직 한창때의 나이이니까. 지금이나 십 년 후나 크게 다르지 않기는 하겠다.”
“뭐가?”
“여자 말이야. 혼인은 할 거라며? 근데 당장은 생각이 없어 보이고. 전쟁도 거의 끝났으니 또 여기저기서 귀찮게 할 거야.”
“그러려나.”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주변에서 하도 달달 볶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사부인 담현도 은근히 압박하기도 하고.
“눈치 안 보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왕이면 오빠도 확실하게 말을 해 줘. 그래야 여러 사람이 마음을 접고 방향을 틀지. 그 정도 예의는 보여 주라고.”
“참고할게. 언제 떠날 거야?”
“내일 아침.”
“그렇게 빨리?”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던 반호진이 살짝 놀랐다.
난희주가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라서였다.
“서운하긴 한가 보네?”
“넌 나를 너무 무정하고 매정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에이. 아니야. 오히려 기분 좋은걸. 서운해한다는 건 그만큼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잖아? 안 그래?”
“동생으로서.”
“나도 잘 알지. 근데 할 일이 있어서. 나나 본문도 사사혈천교에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의외로 우리는 뒤끝이 심하다고.”
에둘러 표현했으나 반호진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게 영원한 이별도 아니고. 간간이 놀러 올게. 그러니까 그때 문전박대만 하지 말아 줘.”
“그럴 일은 없어.”
“아침 일찍 떠날 거라 배웅은 안 해 줘도 돼. 조용히 떠날 생각이라. 그래도 편지는 틈틈이 보낼 테니까 답신은 꼭 해 주고.”
“고민해 보고.”
“참나.”
마지막까지 쉽지 않은 반호진의 모습에 난희주가 입매를 씰룩였으나 따지지는 않았다.
대신 얌전히 품에 안겨 있는 백동이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집이라 할 수 있는 무상문으로 돌아온 서조운은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침상을 정리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건 기뻤으나 냉정하게 말해 그가 기여한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서조운은 자신의 한계를 직접 보고 느꼈다.
“그깟 용의 칭호 따위.”
서조운은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로 깨물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절대 자만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자신감은 있을지언정 자만이라는 두 글자는 자신과 해당사항이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후기지수들 중에서 손꼽힌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후기지수라는 네 글자를 빼면 수많은 무인 중 하나일 뿐이라는 뜻이었다.
서조운 정도의 무인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굳이 새외무림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더 강해져야 해.”
그 사실을 서조운은 이번에 처절하게 느꼈다.
아마 그걸 다른 형들도 느꼈을 터였다.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눈빛과 분위기로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살아남는 걸 넘어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최고의 재능이라는 말에, 남들이 치켜세워 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들떠 있었음을 서조운은 이번에 깨달았다.
얼마나 어쭙잖은 실력으로 으스댔는지도.
그걸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있다면 그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이랄까.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에 몸서리치게 만드는 기억들을 애써 뇌리 한구석에 밀어 넣고서 서조운은 마음을 다잡았다.
분명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노력도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반호진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했다.
“적어도 구파일방의 장로들이나 십대세가의 수장들 정도는 되어야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어.”
우선 서조운은 목표를 분명히 했다.
어정쩡하게 고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닿고자 하는 목표를 명확하게 정했다.
그렇다고 그게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지금 세우는 목표는 최종 목표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목표가 분명해야 게으름을 피할 수 있었다.
짜악!
갑자기 서조운이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졸린 정신도 깨우고 마음도 다잡기 위해서였다.
월?!
그 소리에 침상 옆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강아지가 퍼뜩 놀라서 깼다.
얼마나 놀랐는지 축 늘어져 있던 귀가 쫑긋 서며 사방을 정신없이 둘러봤다.
“아, 미안미안. 형이 갑자기 소리 내서 놀랐지.”
적갈색의 털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선택한 강아지에게로 서조운이 다가갔다.
웃는 얼굴로 몸을 낮추며 눈높이를 맞췄다.
의외로 사람 표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알았기에 서조운은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최대한 부드럽게 웃었다.
끼이잉?
“별거 아냐. 좀 더 자면 돼, 염룡아.”
자신의 별호를 이름으로 준 서조운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염룡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러자 그 손길에 염룡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덩치는 제법 커졌지만 아직 새끼이다 보니 잠이 여전히 많았다.
먹는 것도 엄청나게 먹었고 말이다.
“좋은 꿈 꾸렴.”
이내 다시 잠드는 염룡이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준 서조운은 다시 침상 위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었다.
목표를 정했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수련에 정진할 생각이었다.
“형님의 오른팔로서 부끄럽지 않은 실력자가 되어야 해.”
다른 이들은 큰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나 서조운은 달랐다.
반호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데다가 자칫 잘못했으면 발을 붙잡을 뻔했기에 서조운은 결연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후우우.”
이윽고 긴 들숨과 날숨이 반복되며 서조운의 주위로 대자연의 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
선우방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먼저 와 있는 이들을 빠르게 훑었다.
“무슨 일이래?”
“저는 몰라요.”
“저도요.”
“저 역시.”
자신들도 선우방과 같은 심정이라는 듯이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런 셋의 대답에 선우방의 시선이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는 반호진에게로 향했다.
“너는 알지?”
“나도 몰라.”
“어? 너도 모른다고?”
“응.”
선우방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설마하니 반호진도 모를 줄은 몰라서였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동생들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오기 전에 이미 반호진에게 물어본 듯했다.
“뭐지? 무슨 일이지? 이런 일은 처음이잖아?”
“오면 말해 주겠지.”
대수롭지 않아 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선우방은 미간을 좁혔다.
처음 있는 일이니만큼 그는 저렇게 편하게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사마의성은 사연이 있는 동생이었기에 선우방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똑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와 있는 이들의 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문을 두드린 사마의성이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늘 그렇듯이 차분한 신색으로 사마의성은 일행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했다.
“방이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걱정까지는 아니고.”
“근데 왜 그렇게 좌불안석이야? 죄라도 지은 것처럼.”
“내가 지을 죄가 어디 있어?”
“흐음?”
반호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별거 아닌 말에 선우방이 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였다.
다른 이들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모두의 시선이 선우방에게로 집중되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은데요?”
“나도 느꼈어. 분명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느낌이야.”
왠지 모르게 콕콕 박히는 듯한 서조운과 모용척의 눈빛에 선우방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평소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선우방은 몰랐다.
지금의 모습이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분명 뭔가 있는데.”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데.”
“그건 나중에 알아보고. 우선은 이 자리를 만든 의성이 말부터 들어 보자.”
점점 더 의심이 짙어지는 눈빛으로 선우방을 쳐다보는 두 동생들을 반호진이 만류했다.
그 역시 선우방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사마의성이 먼저였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조용히 앉아 있는 사마의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 맞다.”
“이 자리는 의성이가 만든 거였지.”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방이 형.”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서조운과 모용척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사마의성을 바라봤다.
물론 그러면서도 선우방에게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자, 해 봐.”
“형님은 알고 계시지만 다른 분들은 모르시는 것 같아서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히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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